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2화 (32/917)

#32

1.

아멜리아와 시우는 마차에 올랐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2인승 마차인데 마부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도 소피아의 마차다.

옷을 준다길래 아카데미 비품실에서 대충 던져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대뜸 바깥으로 외출이라니.

마차는 덜컹이며 아카데미 정문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양장점이요."

"그렇군요."

근데 양장점은 여자들 옷 만드는 곳 아닌가?

옷 준다더니 갑자기 맞춤형 드레스를 입혀줄 생각은 아니겠지.

혹시 이게 신종 괴롭힘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우는 이내 망상을 그만두었다.

"......"

"......"

그나저나 숨 막히는 공간이다.

이 비좁은 공간에 둘 밖에 없는 데다가 서로를 빤히 마주 봐야 하는 구조라 그런가.

지난번 여관에서의 사건 이후로 시우는 아멜리아가 껄끄러웠다.

호오 중 오에 의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아리송함에서 기인한 껄끄러움이다.

물론 아멜리아 모르게 그녀의 가슴을 빤 일도 어쩐지 가책이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큰 고민거리가 있다.

자율방어가 왜 시우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던가가 혼란의 주된 원인이었다.

아멜리아를 미워하는 시우의 마음이 자율방어의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치자.

그런데 가슴을 건드리는 순간까지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아멜리아의 무의식이 그것을 허락했다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귀족적인 마녀의 표본인 아멜리아가? 일개 노예에게? 라는 의문이 붙어버리면 다시 오리무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영영 알 수 없는데 막상 모든 진실을 말했을 때 아멜리아의 반응과 위험도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니 결국엔 소용없는 일.

모르겠다.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소피아는 아멜리아는 어린애 같다고 했었는데 사실 그 발언부터가 이해가 가질 않으니.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하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안에 문을 여는 마법을 완성해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말없이 창밖을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아멜리아가 헛기침을 했다.

시우는 상념에서 벗어나 묻는다.

"큼큼...!"

"불편하신 점 있으신가요?"

"관리인, 건강에는 문제가 없나요?"

전속이 되었으니 신경 쓰는 티를 내고 싶은건가?

여태껏 이런저런 일로 괴롭혔던 일은 없던 일로하고?

요새 갑자기 뒤바뀐 그녀의 태도에 시우는 조금 쫓아가기가 어려웠다.

"전염병이라던가, 피부병이라던가. 있다면 미리 말하세요."

"없습니다."

사람이 좀 꼬질꼬질 할 수도 있지 면전에서 저런 말이나 하다니.

아무래도 시우의 스윗하우스는 아멜리아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듯하다.

그래도 찬물로 꼬박꼬박 샤워하는 시우다.

다행히 몸이 가렵거나 그런 적은 딱히 없었다.

"알겠어요."

"예."

"........"

"........"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문다.

요 며칠간 지긋지긋하게 반복해온 어색한 대화 패턴.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체할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는 덜컹덜컹 잘도 달렸다.

그때 시우의 시야에 들어오는 한 풍경.

"어?"

하얗고 높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커다란 성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아를 깎아 만든 것 같이 고상한 자태를 풍기며 서 있는 성벽은 아직 거리가 한참 남은 것 같은데도 위용이 범상치 않았다.

게헨나에서 성채에 둘러싸인 타운은 단 하나다.

레노먼드 타운도, 타로 타운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기는...

"부교수님. 마차가 가는 곳이 아르스 마그나 타운인가요?"

"그래요."

시우는 입을 떡 벌렸다.

해자 위로 늘어진 다리를 건넌 마차는 이내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2.

아르스 마그나 타운.

풀네임으로 부르려면 8음절이나 되기 때문에 으레 줄여서 화이트 타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운을 쭉 둘러싼 하얀 성벽이 죄다 특수 연금처리가 되어있기에 빛을 받으면 은은한 젖빛을 내며 빛나기 때문이다.

특징을 먼저 설명하자면 게헨나의 최중앙 도시이자, 최고의 부촌이며, 가장 아름답고 중요도가 높은 타운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아르스 마스나 타운은 작위를 지닌 마녀만이 거주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3명의 공작, 7명의 백작, 32명의 남작, 이것이 화이트 타운 주민의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헨나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들이 이곳에 집결해 있다.

우선 게헨나의 자잘한 공무처리를 도맡는 '중앙 시청'이 이곳에 있으며 게헨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의결기관 '세피로트의 나무' 도 중앙 시청 옆에 붙어있다.

레노먼드 타운의 금고은행을 제외하면 이게 게헨나 행정기관 전부이니 딱히 언급할 게 없다.

하지만 돈 좀 있는 마녀라면 누구나 화이트 타운을 찾는 이유는 최고의 고급시설들이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5 위계 이상의 마녀만이 출입할 수 있는 사교회 '첫번째 붉은 지붕 살롱',

예소드 백작이 운영하는 레바나 대욕장,

게헨나의 유행을 선도하는 '플로라 양장점',

마도구 중에서도 최고품만을 취급하는 '제머나이 마도구 본점' 등 마녀들이 환장할 만한 온갖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시설이 죄다 박혀있는 것이다.

일반 시민은 허가 없이 드나들 수 없으며 설령 마녀라 해도 어중간한 위계의 마녀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찍소리도 못하고 위압감을 느껴야 하는 도시이니 노예인 시우가 이곳을 와봤을 리 없다.

시우는 마차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에 입을 쩍 벌렸다.

이렇게 많은 마녀를 한 번에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차 8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성도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대충만 세봐도 50명은 훌쩍 넘어 보인다.

"와...."

시우는 아멜리아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벌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웅장한 풍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신화 속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고딕, 바로크, 로코코에 이르러 일직이 건축에 있어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의 건축물들.

그 건축물들을 한계까지 높게, 그리고 커다랗고 깔끔하게 쌓으면 대충 이 타운의 모습과 엇비슷하리라.

현대 건축 소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니 시우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레노먼드 타운의 정경도 처음 보았을 때는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레노먼드 타운의 건물들이 세계 문화유산 급이라면 화이트 타운의 건물들은 세계 미스터리 급이다.

마법이 없다면 이런 건물을 절대로 지을 수 없겠지.

"그런가요?"

마법이라는 학문을 접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이런 아름다운 도시를 볼 수 있는 것도 게헨나의 없다시피 한 장점 중 하나다.

그래도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것 같아서 기분이 들떴다.

"부교수님의 저택도 이곳에 있나요?"

"그래요."

이런 곳에서 살면 한남더힐 사는 것 못지않게 좋을 것 같은데 문득 아멜리아의 저택 소유의 저택이 궁금해졌다.

"한번 가보고 싶네요."

"저도 가본 적 없어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시우는 아멜리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 화내는 타이밍, 심술부릴 때의 표정, 분노게이지 측정법 같은 서바이벌 필수 요소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아멜리아가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순간, 그녀의 과거 등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다.

갑자기 궁금해져 물었다.

오랜만에 싹뚝싹뚝 끊기지 않는 대화여서 좀 반갑다.

신기한 것들을 보니 마음이 좀 풀려서인지 대화가 잘 이어진다.

"어째서인가요?"

"마녀가 되기 전부터 스승님과 함께 숲속의 오두막에서 살아왔으니까요."

"숲이요? 어느 타운이었나요?"

"어느 타운도 아니었어요. 그냥 굴피나무가 우거진 예쁜 숲이었죠."

게헨나의 모든 장소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타운인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농경지나 목축지, 혹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산림 등도 있었다.

아멜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곳도 아마 그런 곳 중 하나였겠지.

"지금은 예전처럼 아름답진 않지만요."

그런 말을 꺼낸 그녀의 옆모습이 어딘가 쓸쓸 해보였다.

시우가 뭔가 말을 건네려할 때 아멜리아가 선수를 쳤다.

"도착했네요. 내리세요."

마부도 없이 마차를 목적지까지 이끌던 말 두 필을 어느 화려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간판에 적혀있는 글귀는 플로라 양장점.

5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 교회당처럼 생긴 건물이다.

새로 갖게 될 옷에 대한 기대감과 하필 그것을 양장점에서 맞추게 되었다는 애매한 불안감에 덮인 채 시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3.

아멜리아가 문고리로 문을 두어 번 두들기자 5M는 족히 되는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시우가 밖에서 보고 5층 정도 되는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양장점은 실제론 단층이었다.

고딕 양식의 예배당처럼 천장이 무지무지 높을 뿐이다.

그리고 그 높은 천장의 끝까지 벽면 한쪽을 꽉 채우는 수납장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원단들이 수납장을 한치도 빈틈 없이 한가득 꽂혀있다.

바닥 전체에 깔린 레드카펫.

시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양장점의 내부 구조를 구경했다.

호텔 로비 같다고 해야 하나 도저히 맞춤형 드레스나 만드는 소박한 곳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때 한구석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과감하게 한쪽 다리를 드러낸 드레스와 입에 문 길다란 곰방대. 한쪽 눈을 가리도록 넘긴 머리카락이 굉장히 섹시한 여자였다.

그리고 아마 저 여자도 마녀일 것이다.

아멜리아를 보고도 주눅 든 기색은커녕 담배 연기를 후우 뱉고 있었으니 말이다.

"10년 전에 만들었던 드레스네. 그때는 눈꽃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지. 그때 사갔던 건 소피아였던 것 같은데... 네가 그 메리골드구나?"

"그래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고객을 대하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친교를 다지기 위해 하는 말 같지도 않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야. 그 드레스도 만든지 꽤 지났는데 조금도 촌스럽지가 않잖아?"

시우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데 아멜리아는 오죽할까.

다시 한번 후우 하고 연기를 뿜는 마녀.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개가 늦었네. 어차피 알고 왔겠지만 형식상 할게. 난 플로라 아라베스크, 실을 짜는 마녀야. 네가 입은 그 옷도 내가 만든 거고."

"정장을 맞추고 싶어서 왔어요."

"정장? 어디서 입을 건데. 현대? 게헨나?"

"이곳에서요."

플로라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대화를 중간에 끊었다.

"좋아, 마침 터키산 모헤어 울이 도착했어 만들고 싶던 옷도 있었고 예쁘게 짜줄게."

맞춤 정장이라면 과거에 한 번 맞춰본 적이 있다.

학술회 같은 곳에 참관하려면 꼭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거의 2시간 가까이 시우가 원하는 바를 물었고 제작에만 15일이 넘게 걸렸다.

근데 저 마녀는 치수조차도 재지 않는다.

시우가 황당해할 무렵 아멜리아는 손끝으로 시우를 가리켰다.

"제가 아니라, 이 남자가 입을 정장을 맞춰주세요."

플로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