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1.
소피아는 축 늘어진 시우를 두고 방문을 나섰다.
그녀의 아래서 자지러지던 시우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괜한 욕심이 생겼지만 이내 단념한다.
아멜리아가 그 비좁은 오두막에서 나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남자다.
정작 본인은 극구 부정하지만.
소중한 친구의 연애 기회를 채가는 몰염치한 짓 할 리 없다.
"그럴 순 없지."
애초에 여자 경험이 없는 시우와 남자 경험이 없는 아멜리아.
둘이 만나면 어떤 꼴이 될지 뻔했다.
특히 아멜리아라면 뻣뻣한 나뭇조각처럼 침대에 굳어 있을 게 뻔하고 시우는 허둥지둥 댈 것이다.
모처럼의 첫경험이 그렇다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자고로 여자란 조금 리드 받는 편이 마음도 편하고 호감이 가는 법.
그에게 아주 조금 정도는 여자 다루는 법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포상과 더불어 미리 교육해 주었다.
"으으으..."
기지개를 쭈욱 펴고 로브의 모자를 덮어썼다.
사실 신시우가 고통받는 것은 소피아의 책임도 없잖아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아멜리아를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거절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시우가 괴롭힘 당할 일도 없었겠지.
거기에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관심 있다는 소문도 퍼지지 않았을 것이며, 저 귀공자 같은 외모로 이런저런 마녀에게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본인은 노예 취급 자체를 탐탁지 않아 하지만 말이다.
"원래 엘리트는 까다롭지."
밤이 깊었다.
어차피 마녀는 굳이 잠이 들 필요가 없으니 시우에게 부탁받았던 일을 해야 했다.
경비원들에게 잡혀간 녀석들의 처우를 결정하고 시우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함구시켜야한다.
"이럴 땐 또 안 자도 되는 게 좋다니까."
소피아는 창틀 너머로 훌쩍 몸을 날렸다.
로브가 몸을 감싸고 몸에 깃털이 돋아나며 커다란 까마귀로 변한 소피아는 달빛이 빛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2.
노예에게는 특별히 휴가가 없다.
일주일에 딱 하루 있는 휴일에도 점심까지는 일해야 했으니 당연하다.
그랬던 시우가 지금은 침대용 지푸라기에 편하게 누워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채광창 사이로 보이는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다.
이것이 늦잠의 맛.
언제나 동이 트기 전, 혹은 통틀 녘에나 일어났던 시우에게는 눈물겨운 사치였다.
"이게 얼마 만에 게으름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처음 알았다.
노예 생활 중 처음으로 휴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
오후 늦게 일어난 아멜리아는 시우를 조수로 임명했고 보더 타운에서 밤늦게까지 돌아다닌 노고를 인정해 하루의 포상 휴가를 주었다.
믿겨 지겠는가?
그 아멜리아가 주는 휴가라니.
얼떨떨하긴 했지만 고약한 마음가짐을 조금이라도 고쳐먹은 듯하니 시우에게 있어선 다행이었다.
"어라?"
그때 저 멀리서 잔디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하도 그녀를 피해 다닌 탓에 이제는 걸음걸이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멜리아다.
"뭐야."
시우는 황급하게 옷을 걸쳐 입었다.
"아니, 휴가를 줬으면 좀 쉬게 해줄 것이지. 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구냐."
그래도 이렇게 누추하게 맞이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아멜리아에게 선물 받은 팬티가 너무 마음에 든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뿌듯할 지경이다.
갑자기 찾아온 아멜리아에 대한 못마땅함도 팬티를 보자 좀 누그러졌다.
"이런 게 노예근성인가?"
시우는 축사 문을 열고 아멜리아를 마중 나갔다.
숙소가 있는 곳에는 넓게 펼쳐진 초원뿐이니 아멜리아가 달리 올 이유가 없다.
실제로 5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온 적 없기도 하고.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양산을 쓰고 있는 아멜리아.
그녀는 여느 때처럼 도도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시우를 기다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부교수님."
옆구리로 파고든 태양 볕에 아멜리아의 금발이 반짝반짝 빛난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관에서 보았던 아멜리아의 맨몸이 생각나 고추가 움찔했다.
남자가 이렇게 슬픈 생물이다.
착한 생각을 반복하며 자꾸만 커지려는 물건을 진정시킨 시우.
아멜리아는 그가 헉헉거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내일 전속 노예로 인계할 거예요. 조수로서 해야 할 일들을 배우기 시작할 거고요. 오늘은 숙소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해서 찾아왔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 따라오세요."
하긴 여기서 연구동까지는 30분 거리가 넘는다.
전속 노예라면 좀 더 바짝 달라 붙어 있을 법도 하다.
"그보다 꽤 근사한 곳에서 살았네요."
근사한 곳? 다른 노예들 숙소는 어떻길래.
아멜리아는 푸른 언덕에 두둥실 떠 있는 축사를 보며 말했다.
하긴 저것도 밖에서 보면 꽤 멀쩡한 건물 같아 보이긴 한다.
사람 살라고 만든 곳이 아니라서 그렇지.
"네, 뭐 좋습니다."
시우의 애매한 반응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아멜리아.
"그럼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짐을 옮기려면 숙소로 가야죠."
뭘 뻔한 걸 묻느냐는 듯이 눈을 끔뻑인 아멜리아는 시우를 지나쳐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력수랑 전마지, 마법진 초안이 저 집 안에 있긴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어차피 짚더미 안에 있는 상자에 쑤셔 두었고 아멜리아가 굳이 그 안을 볼 일이 없으니까.
숙소를 옮기고 밤에 한번 더 오긴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축사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허름한 곳이라 조금 부끄럽네요."
문에 가려졌던 축사 내부가 드러나면서 무표정했던 아멜리아의 눈이 점점 커진다.
"최대한 빨리 정리할 테니 기다려 주세요."
어차피 챙겨갈 것도 별로 없다.
시우는 짚더미로 가서 상자를 짚으로 잘 덮는 한편 거의 반쯤 썩어 문드러진 장롱에서 옷과 속옷을 꺼냈다.
"........"
아멜리아는 문 앞에 망부석처럼 멈춰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아멜리아 님, 다 챙겼습니다."
시우의 부름에 아멜리아는 퍼득 정신을 차렸다.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묻는다.
평상시 아멜리아보다 어딘가 주눅 든 목소리였다.
"여기서 사는 게 맞나요? 정말?"
"네."
"5년 동안?"
"원래는 다른 숙소였는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여기로 숙소가 옮겨졌습니다. 기존 숙소를 재건축한다는통보를 받아서요."
"........"
시우의 간결한 설명에도 아멜리아는 묵묵부답이었다.
긴 눈썹을 깜빡이며 조용히 있을 뿐.
또 이러네.
아멜리아와 대화를 하다보면 이렇게 맥락없이 대화가 끊기는일이 많았다.
"이번 숙소는 조금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네요."
급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막기 위해 가벼운 농담조의 말을 건네자 아멜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곳에서 사는 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나?
하긴 시우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하물며 곱게 자란 아가씨야 컬처쇼크를 받을만하지.
대충 이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할 때.
별안간 아멜리아가 시우의 옷 소매를 잡았다.
"저기...."
그녀의 고운 손에 걸린 옷자락이 쭉 당겨지는 느낌이 난다.
근처의 나쁜 냄새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향기가 그녀로부터 넘실넘실 넘어온다.
"관리인,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시죠. 듣고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시우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벌리자마자 뭔가 턱 걸린 듯이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부교수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하던 아멜리아는 시우의 소매를 놓았다.
소리가 되지 못한 한숨이 슬쩍 새어 나온다.
"이제부터 신시우 관리인은 제 전속 노예이니 이런 품위 없는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어요. "
"그, 그나마 깨끗한 옷인데..."
"그건 나중에 옮기고 일단 따라오세요."
아멜리아는 축사를 빠져나가더니 성큼성큼 앞서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그래도 옷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요즘 입을 옷이 떨어져 가기도 했고.
시우는 보따리를 짚더미에 던져놓고 아멜리아의 뒤를 쫓았다.
2.
아멜리아는 마음이 불편했다.
속이 편치 못했다.
아주 아주 아주 옛날에 상한 치즈를 먹고 배탈이 났던 것처럼 속 어딘가가 뒤엉킨 듯이 거북하다.
이게 모두 신시우 관리인의 숙소를 보고 나서 생긴 일이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소피아 앞에서 밤시중 제안을 대놓고 거절한 이후.
다음날 아멜리아가 씩씩거리며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아카데미의 행정실이었다.
아멜리아는 아주 차분한 말씨로 명령했다.
시우에게 가장 안 좋은 숙소를 주라고 말이다.
감히 노예 주제에 마녀의 명령을 거절하다니.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다니.
당장 그 자리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멜리아는 밤새 한 글자의 마법식도 계산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합당한 처벌인지에 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떠올리지 않았다.
이렇게 강렬한,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에 젖어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잠자리가 불편한 것이 얼마나 큰 괴로움인지를 알고 있던 아멜리아로서는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시행했다.
이후 까마득히 잊고지내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전속노예가 된 시우의 숙소를 연구동 가까이로 옮겨야 한다고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일 년 열두 달.
절대로 시들지 않게 마법으로 변형된 잔디.
그의 숙소는 상쾌한 바람에 긴 잔디가 물결치는 일등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햇볕도 부족함 없이 들고 무엇보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아카데미의 풍광이 훌륭하다.
멀리서 그의 숙소를 보았을 때 아멜리아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말았다.
분명 가장 안 좋은 숙소를 배정하라 명했을 텐데 이렇게 좋은 입지에 있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라니.
특별히 이제 와서 분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의 일 처리에 살짝 의구심을 품는 정도는 되었다.
양산을 쓰고 걷고 있자 저 멀리 문이 열리더니 시우가 달려 나온다.
"어쩐 일이십니까, 부교수님."
헐레벌떡 달려 나온 그에게 용건을 전한 뒤 아멜리아는 구태여 그의 숙소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굳이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가 어떤 곳에서 생활에 왔는지, 자신의 앙갚음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새삼스러운 감정이었다.
"허름한 곳이라 조금 부끄럽네요."
그의 어색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문이 열렸을 때 아멜리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닥은 눅눅한 진흙이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천장은 다 썩고 헤져서 하늘이 보이는 곳이 몇 군데나 있었고 나무 상자와 지푸라기들이 가구랍시고 굴러다닌다.
분명 안 좋은 숙소를 배정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명령을 예상한 '가장 허름한 숙소'는 타로 타운의 가정집 정도였다.
아카데미의 시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니 최저치라 한들 이 정도의 갭이 존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시우가 사는 숙소는 아무리 봐도 인간이 살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갑자기 시큰거리는 가슴에 아멜리아는 눈쌀을 찌푸렸다.
심장이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
이런 기분은 이상하다.
"여기서 사는 게 맞나요? 정말?"
"네."
"5년 동안?"
"원래는 다른 숙소였는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여기로 숙소가 옮겨졌습니다. 그쪽 건물을 재건축한다고 하더라고요."
"........"
혹시나 싶어 확인했지만 여실히 드러나는 업보.
불편해진 마음.
왜 이런 감정이 들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시우는 농담조로 말한다.
"이번 숙소는 조금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네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농담을 던지며 먼저 숙소를 나가려는 듯한 시우.
아멜리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저기...."
아멜리아는 귀족이고 그는 일개 노예다.
그럼에도 이 일에 관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테지.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납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인,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시죠. 듣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입을 연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사과의 말을 담으려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어떤 어조로, 어떤 말투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몸짓으로, 어떤 호흡으로 말하면 좋을까?
아주 복잡한 마법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마디 사과를 건네면 되는 것임에도 머릿속이 콱 막힌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부교수님?"
그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느끼자 아멜리아는 엉겁결에 아무 말이나 뱉었다.
머리를 거쳤다기보다는 일단 단어를 짜낸 느낌이다.
"이제부터 신시우 관리인은 제 전속 노예이니 이런 품위 없는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어요. "
"그, 그나마 깨끗한 옷인데..."
"그건 나중에 옮기고 일단 따라오세요."
이게 아닌데.
아멜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먼저 축사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된 거 그에게 옷이나 한 벌 사주는 거다.
저번에 실수했던 만큼, 어렴풋이 피어난 죄책감이 씻겨나갈 정도로만.
딱 그 정도만 잘해주자.
아멜리아는 그렇게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