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
마녀, 그것도 남작 위인 아베느가가 개입하자 상황은 재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야심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으로의 해로는 봉쇄되었다.
튀어 온 경비병들은 이 일에 동원된 나가 호의 선원들을 모두 끌고 갔다.
끌려가던 와중 라리사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라 듣지 못했다.
커다란 사건이 지나갔다.
그러나 시우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피아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아멜리아의 젖꼭지를 빨았던 일은 불문에 부쳤다.
소피아가 이해하고 넘어가더라도 시우 본인이 너무 낯뜨거웠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아멜리아가 알게 될 경우 뒷감당이 너무 무섭기도 했고.
"흐음... 그렇구나."
좀 전의 소란으로 방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객실을 옮겼다.
아멜리아를 눕혀놓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은 소피아는 시우의 보고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은 참 이상하네.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도망치는 걸 먼저 떠올릴텐데."
"아닙니다."
"칭찬하는 거야. 솔직하게 기뻐해도 돼."
이게 기뻐할 일인가? 잠깐 고민하던 시우는 먼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저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 일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직접 심문하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이 일을 사주한 흑막은 추방자인 마녀다.
사실 라리사를 비롯한 나가 호의 선원들은 모두 잡어라는 의미.
"아멜리아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며? 아멜리아를 잠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금술에 정통한 추방자는 뻔해. '물병자리의 마녀'겠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하긴, 어차피 현세에 있는 마녀에게 시우가 간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장 시우는 게헨나를 나갈 수조차 없으니까.
"그리고 아멜리아는 크게 걱정할 거 없어. 내일 아침이면 조금 머리가 아프겠지만. 애초에 몸에 문제가 될 정도의 독이었더라면 자율방어가 해결했을 거야."
"그렇군요."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다.
아무리 아멜리아를 싫어한다지만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더라면 괜히 가슴이 찜찜할 것 같았다.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야겠지? 나는 아멜리아를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 네가 목숨을 걸고 기지를 발휘해 아멜리아를 지켜준 것에 대해선 보상을 해주고 싶어."
소피아는 팔을 뻗어 시우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멜론 반쪽은 족히 될 것 같은 모성의 상징이 그 겨를에 흔들리는 것이 옆 눈으로 보였다.
"뭘 원하니?"
달콤한 목소리.
그저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을 뿐인데도 전력을 다해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관능이 느껴져 시우는 조금 당황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주실 수 있나요?"
"음, 호기롭게 말해놓고 미안한걸? 그건 곤란한 부탁이야."
혹시나 싶어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소피아나 아멜리아 정도라면 시우를 밖으로 보내주는 것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일 텐데 말이다.
"네가 그걸 요구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네가 좀 더 아멜리아와 있어 주기를 원해."
차라리 도시의 법령을 들먹였으면 몰라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부연설명에 조금 아리송해진다.
"그렇다면 오늘 있던 일은 없던 일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피아의 반응은 재밌었다.
입과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시우가 라리사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을 때보다 깜짝 놀란다.
"관리인, 넌 마녀의 목숨을 구했어. 시민권 정도는 떼놓은 당상이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없던 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녀들은 마법에 빠삭하다.
소피아가 신경 쓰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만 더 자세히 파고들면 램프 안의 마력용량으로는 스카이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까지 들통날 것이다.
그럼 이 노예가 어디서 마력을 끌어왔는가?
이런 식으로 더 자세히 파고들면 어디까지 캐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땐 그냥 묻어버리는 게 최고다.
어차피 아멜리아의 조수로 들어가서 좀 더 양질의 마법 자료를 접하게 되면 마법진 완성도 앞당겨질 것이다.
소피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지만.
"좋아, 납치 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하고 싶단 말이지? 네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점을 포함해서?"
"네."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캐묻지 않는 점까지도 포함이야?"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억지에 가까운 부탁임에도 소피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그녀에게 따낸 점수가 컸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선원들을 연행한 이유도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야겠네. 알겠어, 해줄게."
"정말 감사합니다."
시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사건이 해결되자 바로 쓰러져서 잠이 들 것 같았다.
소피아가 표도르를 고등어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광경만 보지 않았다면 긴장이 풀려 쓰러졌을 것이다.
근데 이 여자 언제 가는 거지.
"?"
시선을 받은 소피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뿐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않았다.
"아직 하실 말씀이 남으셨나요?"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냐는 말은 꿀꺽 삼켰다.
아멜리아와 쌍둥이처럼 온건한 마녀들과 있어 자꾸 까먹는데 마녀는 원래 노예가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잘생겼네, 성격도 좋고 합격이야."
소피아의 혀가 낼름 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는 최근에 타카쇼를 휴일마다 집으로 불러들였었지.
스멀스멀 지금 상황에 대한 가닥이 잡혔다.
"나도 너한테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뭐든지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시우는 고개를 조아렸다.
바닥에 가서 무릎까지 꿇을까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아멜리아를 잘 챙겨줘. 겉으로는 툴툴거려서 그렇지 착한 애야."
"예?"
그러나 소피아가 입에 담은 것은 시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대뜸 밤시중이라도 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일개 노예인 제가 어찌 부교수님을..."
"괴롭히기만 하는 성격 나쁜 마녀라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닙니다."
"하긴 너로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더 고맙네. 아멜리아를 미워하지 않아 줘서."
갑자기 이해한다는 말 같은 것이 나와 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굳이 티를 내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유도신문일 가능성도 전혀 없진 않고.
"외롭고, 쓸쓸하고, 어리숙하지. 다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야.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누구...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멜리아가."
설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음에도 분위기로 전달된 것 같다.
소피아는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었다.
"오늘만 해도 봐봐 여관에서 술 한잔 잘못 먹고 픽 뻗어버렸잖아. 깐깐한 척하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엄청 서투르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몰라."
계속 이어갈 줄 알았던 소피아의 아멜리아 옹호론은 갑자기 끊어졌다.
"근데 너무 많이 말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훗날의 즐거움으로 넘길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멜리아 님을 정성껏 보필하겠습니다."
시우는 모법 답안을 끝으로 방을 나서려 했다.
"신시우 관리인."
문고리를 잡고 짧게나마 쪽잠을 자려는 순간 소피아가 다시 시우를 불러세웠다.
"오늘 선택은 현명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뒤의 일."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촛불의 잔광처럼 반짝이는 소피아의 호박색 눈동자는 어딘가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으니까.
"만약 아멜리아를 넘기고 현세로 나갔다면 넌 죽었을 거야."
언제나 여유롭던 소피아의 스산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물병자리의 마녀'는 인간을 실험재료로 갈아 넣는 걸로 유명하거든. 아마 아멜리아를 넘겨받는 자리에서 겸사겸사 선원들도 물병에 담았겠지."
얄궂게도 시우가 나가 호의 선원들을 살려준 셈이다.
"설령 그렇지 않아도 아멜리아를 팔아넘긴 널 내가 용서했을까?"
저도 모르게 사망 플래그를 두 개나 넘기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시우에게 소피아는 싱긋 웃었다.
"아무튼, 이제 가서 쉬어. 너무 오래 붙잡았네."
2.
시우는 인사를 끝내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옆 객실에 들어갔다.
막상 오늘 묵기로 했던 나가 호 선원들이 잡혀가면서 객실이 죄다 텅텅 비어 있었기에 아무 곳이나 골라잡으면 됐다.
대충 4시 정도이려나?
아멜리아가 언제쯤 일어날지가 관건이겠지만 많이는 못 잔다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아도 당최 잠이 오지 않는다.
워낙 위험한 상황을 오가느라 심장이 진정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정작 머리에 맴도는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바로 왜 아멜리아의 자율방어가 시우에겐 작동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제.
무려 15 위계 이상이 되어서야 생성된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자율방어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마법이다.
어지간한 독은 몸에 들어오자마자 해독해버리고 설령 지뢰를 밟는다 해도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자율방어의 특별한 점은 발동 조건의 유연성에 있었다.
물리적인 충격과는 달리 형체도 없는 '악의'를 읽어서 발동하는가 하면 '악의가 없음'이라는 판정을 내려 발동을 유보하기도 한다.
시우는 아멜리아가 밉고 싫다.
예쁘긴 하지만 짜증나고 고지식하고 숨 막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악감정이 아닌가?
왜 발동을 안 한 거지?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우는 분명 자고 있는 아멜리아의 옷을 벗겼다.
그것도 성욕을 위해서라는 감정에 기인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녀의 가슴을 빨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자율방어는 발동하지 않았다.
"왜지?"
이것이 시우를 가장 혼란스럽게 했다.
자율방어의 유연성은 비단 타인의 감정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낙인을 소유한 당사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발동 조건이 조정된다.
아무리 악의가 없더라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자율방어가 작동하는 식이다.
잠든 마녀는 건들지 말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아멜리아가 시우가 가슴을 빠는 것에 그다지 큰 불쾌함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
그럴 리가 있나.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시우가 몸을 뒤척이던 와중 삐걱하고 문이 열렸다.
식겁해서 몸을 일으키는 시우.
죽음을 넘나드는 하루를 보내고 나니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모양이다.
문을 연 것은 램프를 들고 있는 소피아였다.
"수석교수님, 어쩐 일로?"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피아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아직 충분히 보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닙니다, 이번 일을 조용히 덮어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건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개인적인 선물."
소피아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까마귀처럼 검은 로브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는 슬쩍 옷깃을 벌려 보인다.
은은한 마력램프의 조명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은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모성애의 상징.
즉, 가슴이었다.
"아멜리아로 이렇고 저런 짓도 했는데 그냥 자는 건 남자로서 괴롭지?"
시우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가슴만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잠깐.
아멜리아로 이렇고 저런 짓?
"내가 편하게 해줄게."
소피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램프 안에 있는 마력으로는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스카이보드를 발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한 발 쭈욱 빼고, 편하게 자는 거야."
소피아는 습관처럼 날름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