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
"내가 원하는 건 대단한 게 아니야. 이 좁은 세상 속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오직 그거뿐. 너도 노예라면 알 거 아니야?"
라리사는 여전히 권총을 겨눈 상태로 말했다.
그다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동기다.
당장 시우만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마법을 연구하고 있지 않던가?
"너에게 제안을 할게. 마녀를 우리 배에 실어주기만 하면 돼. 나가 호는 문의 시청에서 출입증을 발급받은 배야. 아무도 우리가 나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이후에는 이 일을 의뢰한 마녀의 비호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거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빙긋 웃음을 짓는 라리사.
"너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어. 다시 현세로 돌아가는 거야."
언뜻 달콤하게만 들리는 제안 속에서.
그제야 시우는 라리사가 아직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율방어 때문이군요."
"맞아."
라리사는 감출 것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떨었다.
자율방어.
마녀의 낙인이 15 위계 이상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특성 중 하나이다.
그 효과는 이름처럼 알기 쉽다.
불의의 공격에 대응하는 자율 방어 마법진.
외부에서 일정 이상의 충격, 또는 공격이 가해지면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방어진이 기동한다.
불시에 습격을 당해 낙인을 물려주지도 못하고 죽는 것을 방지하는 마법인 것이다.
이런 용도인 만큼 자율방어는 특히 수면, 혹은 기절 등으로 의식이 없을 때 효과가 강력해진다.
아멜리아는 지금 영문 모를 비약으로 인해 쿨쿨 자고 있다.
즉, 자율방어가 가장 높은 경계도를 지닌 채 작동하고 있는 타이밍.
"잠든 마녀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속담이 있어. 자율방어는 충격 이외에도 인간의 악의를 감지해. 적의를 가진 타인이 몸에 가볍게 손을 얹기만 해도 마법을 난사해버려. 정성껏 재웠는데 손도 쓸 수 없다니 정말 곤란해."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시우는 당장 총에 맞거나 표도르의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너는 이 마녀한테 호감을 품고 있으니까 자율방어가 작동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부탁할게. 배까지만 옮겨 줘."
시우는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든 아멜리아를 내려보았다.
몸을 웅크리고 아기처럼 잠들어있는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눈가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고약한 부교수 탓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야밤에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질 않나, 대뜸 엄청나게 큰 사슴의 뿔을 잘라오라 질 않나, 일이 끝나고 종일 해야 할 양의 잔업을 추가하지 않나.
아무튼 5년 동안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했다.
그런 아멜리아에게 적대감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저기,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이 마녀가 엄청 싫습니다. 제가 건드리면 자율방어가 활성화 될 거예요."
"가상한 거짓말이지만 안 통해. 이미 그렇게 바짝 붙어있는데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하잖아. 아까 나도 옮기려 해봤는데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다가가도 마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너와는 다르게 말이지."
"네?"
얼떨떨한 것은 시우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우와 아멜리아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
불과 조금 전에 아멜리아의 코앞에 손을 대 호흡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정 궁금하면 확인해 봐."
"위험합니다."
"신중한 건 좋은데 허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굳이 너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네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조금 시간은 지체되겠지만 밖에서 아무 시민이나 잡아와 그녀를 옮기게 할 수도 있어."
-철컥
"어서."
"........"
총구가 똑바로 시우의 머리를 겨눴다.
시우는 별수 없이 조심스럽게 아멜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빠지는 심박도 잠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시우는 안도했다.
부드러운 감촉.
그렇게 위세 높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던 아멜리아지만 손에 닿는 것은 조그마한 어깨뿐이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 가득 담겼다.
따뜻했다.
"그치?"
"너무 쉽게 말하는데요? 만약 그 생각이 틀렸으면 전 죽었잖아요."
라리사는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너는 착해빠진 순둥이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런 순둥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시던 마녀를 헤치려 든다? 그럴 리가 없어."
자신의 예상이 맞아들어갔다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 뒤를 이었다.
"좋은 계약이잖아? 너는 마녀를 우리에게 옮겨주고, 우리는 너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준다. 누구도 손해 볼 것 없어. 이제 들어 올려."
라리사의 재촉에 시우는 아멜리아의 무릎과 등 아래 손을 넣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잠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상태인데도 무척 가벼웠다.
그토록 기다리고 준비했던 탈출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
밉살맞은 아멜리아를 죽여 직접 손을 더럽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를 넘겨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누구도 손해 볼 게 없다고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아멜리아는요?"
"그 마녀는 자기 죗값을 치르는 거지. 오만방자하게 굴던 마녀가 제물로 오르는 거야."
"낙인을 빼앗긴 마녀는 죽는다는 거 알고 계시죠?"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라리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이게 틀렸다고? 잘못된 게 있다면 이 도시의 존재 자체겠지. 너도 알 것 아니야? 노예로 부림 받으면서 자유를 빼앗겨왔잖아! 나는 그걸 되찾으려는 것뿐이야!"
권총은 여전히 시우를 향하고 있다.
여기서 더욱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반면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손쉽게 넘길 방법도 있었다.
그저 라리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아멜리아를 팔아 넘기고 영원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뒤 마땅히 누려야 했던 권리를 누리면 된다.
"........."
시우는 아멜리아가 밉다.
하지만 그간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그녀가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지마."
각오가 선 시우의 모습에 라리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적당히 순응해. 여기서 고집부려봐야 너한테 남는 게 뭔데?"
순응이라.
참 좋은 말이다.
처음부터 타카쇼처럼 순응했더라면 좀 더 여유로운 노예 생활을 즐길 수 있었겠지.
아멜리아의 치졸한 앙갚음에 순응했더라면 그녀와 깊게 얽히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에 순응했더라면 시우가 마법을 연구했을 일도 없었다.
이제 남은 일은 라리사를 설득하는 일이다.
"남의 목숨을 팔아 자유를 얻는 방식은 틀렸어요. 동참할 수 없습니다."
꽉 입을 깨문 라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모처럼의 호의가 거절당한 굴욕 탓이 아니었다.
완전히 뿌리부터 악인이 아닌 이상에야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시우는 그녀의 망설임을 읽고 말을 덧붙였다.
아까부터 마음에 라리사의 말중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게다가 이건 너무 위험해요. 마녀들 넘기는 대신 자유를 주겠다고 한 마녀는 결국 추방자잖아요?"
더군다나 이런 짓을 한다면 추방자 중에서도 사악한 마녀일 것이다.
그런 마녀와의 약속이 과연 지켜질까?
"이건 저 뿐만이 아니라 누님이랑 선원들에게도 위험한 거래에요. 너무 리스크가 큰..."
"그래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시우가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을 라리사라고 모를 리 없다.
"난 널 쏘고 싶지 않아. 빨리 옮겨. 그렇게 추방자가 무서우면 우리끼리라도 나갈 테니까."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 계단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표도르를 위시로 3명의 선원이 올라온 것이다.
"야, 어떻게 됐어?"
"........"
라리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표도르의 두툼한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을 흘린다.
"그러게 그냥 근처 시민한테 맡기자니까 왜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게 하냐고. 티미! 가서 아무나 한 명 데려와!"
한 명이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표도르는 성킁성큼 시우에게 다가갔다.
"모시는 마녀님을 팔아 넘길 수 없다 이거지? 눈물겹네 눈물겨워."
시우는 아멜리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여관의 객실은 좁다.
몇 걸음을 뒤로 걷기도 전에 벽에 등이 닿았다.
맞닿은 벽, 머리 바로 옆에는 램프 속의 등불이 일렁거린다.
"널 어떻게 박살을 내줄까?"
잔인한 웃음을 짓는 표도르 등 뒤로 라리사의 만류가 끼어든다.
"일이 끝나면 묶어 둬. 괜히 괴롭힐 이유는 없잖아."
"무슨 병신 같은 소리야. 저 창놈이 뒷꽁무니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알고. 그건 그렇고 그 전에 재미나 좀 보자고."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표도르의 숨에서는 역겨울 정도의 악취가 느껴졌다.
아멜리아를 훑어보는 충혈된 눈에서 온갖 음흉한 악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 애송아, 이년 옷 벗겨. 따먹는 건 못해도 마녀 보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겠으니까."
표도르는 자율방어 때문에 아멜리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지만 시우는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우가 아멜리아의 옷을 벗기게 하려는 것이다.
시우는 곁눈질로 머리 바로 옆에 있는 램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천운이었다.
그의 쓸데없는 욕망에서 이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았다.
"오일램프와 마력램프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시우는 한 손으로 아멜리아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그리고 머리 바로 옆 벽에 걸려있던 등불의 밑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게헨나 곳곳에서 조명을 위해 사용되는 마법은 '장식불'. 불꽃의 열기를 최소화하는 대신 빛을 더 밝게 하는 1 위계의 원소 연금 마법이야."
등불이 담긴 램프는 보통 유리 재질.
안에 들어있는 것이 진짜 불이라면 열기가 전해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시우가 손을 댄 램프에서는 아무런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뜨겁지 않을 걸 보니. 장식불을 사용한 램프네."
"이새끼 죽을 때가 되니까 돌았나?"
시우는 램프를 비틀어 열어 안에 손을 넣었다.
마력램프는 외관상으로는 오일램프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료의 성질은 분명히 다르다.
"마력 램프 안에 들어있는 오일에는 연금술로 혼합한 마력수가 조금 섞여 있어."
"그게 뭐 어쨌다고?"
비록 불순물이 가득하고 마법실험에는 써먹지 못할 정도로 거친 마력이지만 이미 발현된 마법에 간단한 간섭기에는 충분했다.
"피어라."
시우는 오일 안에 섞여있는 마력수를 강제로 활성화했다.
그의 손바닥에 놓여있던 '장식불'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화르르르륵!
구조를 해석하고 풀어나간다.
안정장치를 제거하고 오버클럭시킨 불길을 모아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격렬하게 타오르던 염화의 혓바닥은 마치 뱀처럼 시우의 주변을 휘감는다.
모든 통제는 그의 손바닥 안에 놓였다.
어려울 것 없었다.
고작해야 1위계의 마법이니까.
"뭐, 뭐야?"
"어떻게 노예가 마법을...!"
라리사와 표도르, 그리고 이름 모를 선원 한 명은 경악했다.
손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일렁이는 불꽃이 다시 한 번 격동한다.
일반적인 불의 형태가 아니다.
마력을 간섭당한 장식불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벽이 되어 시우와 선원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물러서!"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 오일에 첨가된 마력수는 너무나도 양이 적었다.
그저 은은하게 방을 밝히는 정도라면 한 달은 족히 사용하겠지만 이렇게 격렬한 불꽃을 일으키는 건 길어야 30초 남짓이다.
따라서 우선 겉보기에 그럴듯한 불의 장벽을 만들어 전의를 꺾고 상대의 시야를 차단했다.
사실 지금 불의 온도는 고작 70도 남짓이다.
두께가 두꺼운 것도 아니니 마음먹고 넘어오려면 넘어올 수 있다.
즉, 블러프에 불과하다는 의미.
"뭐해! 라리사 쏴버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 앞에서 지옥불처럼 너울거리는 화염의 위용은 대단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선원 중 한 명은 이미 부리나케 줄행랑을 쳐버렸으니까.
그러나 표도르와 라리사는 달랐다.
여기서 마녀를 포획하지 못하고 그 노예마저 놓쳐버린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녀가 맞으면 어떡해?"
"어차피 이대로 놓치면 다 죽은 목숨이야 이 미친년아!"
표도르가 권총을 빼앗으려하고 라리사가 그것을 막는 동안 시우는 다음 타개책을 찾아냈다.
다음 마법을 위해선 이 블러프가 유효한 동안 마력을 보충해야 한다.
아멜리아의 수업이 이럴 때 도움이 됐다.
남성은 여성과는 다르게 마력을 저장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과 달리 미약한 마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방법은 성적 흥분을 느끼거나 사정할 때.
미약한 마력이라 해도 이 램프에 담긴 모기 눈물만한 마력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다.
새로 마법을 생성해내면 또 다른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
시우는 시선을 내렸다.
거기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맞춰 조그맣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멜리아의 아담한 가슴이 보였다.
시우는 지체하지 않고 아멜리아의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