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5화 (25/917)

#26

1.

접시 위에 짓눌린 머리가 지끈거린다.

시우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이 거한은 보이는 것처럼 괴물 같은 힘을 자랑했다.

아무리 고개를 들어보려고 해도 꼼짝도 할 수 없으니.

"으흐흐...."

"크으으...."

"좆밥새끼가 깝치기는."

표도르의 빈정거림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일단 무시한다.

중요한 문제는 지금 상황이 왜,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거기서부터다.

먼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가장 확실히 주어진 단서는 다음과 같다.

단서 하나, 표도르는 시우를 남총이라고 빈정거렸다.

시민들 대부분이 마녀들의 편의를 위해 필수적인 존재인 만큼 게헨나의 도시법은 일반 시민의 생존권과 재산권을 보장한다.

마녀가 피해를 끼치는 사람은 기껏해야 노예정도이므로 시민들이 마녀에게 품는 감상은 기껏해야 경외, 또는 공포, 또는 존경이다.

마치 봉건제 시대의 농노들이 귀족이나 왕족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표도르의 말투에선 시우뿐만이 아니라 마녀를 향한 혐오가 묻어나왔다.

단서 둘,  그는 나가 호의 선원이자 밀수꾼이다.

평생을 게헨나 안에 갇혀 사는 시민들과 달리 밀수꾼인 표도르는 현세와 게헨나를 오간다.

창공을 알지 못하고 새장 속에서 살아온 새와 새장 밖의 자유를 알고 있는 새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을 원망할까?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마녀에게 품는 원망의 근간은 노예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가?

아까 언급했듯 표도르는 시우를 남총이라 일컬으며 경멸했다.

하지만 단순히 경멸하는 것과 그것을 폭력으로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마녀가 총애하는 남총을 감정대로 쥐어박았다간 고스란히 후환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서는 그의 발언.

단서 하나, '미안해서 어쩌나? 니가 앞으로 저 마녀년을 보게 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바로 이 발언이다.

"야, 아까처럼 칭얼거려 봐."

-쾅! 쾅! 쾅!

"끅! 끅! 끅!"

표도르는 시우의 뒷머리채를 잡은 채 이마를 몇 번이고 테이블에 처박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음식물이 튀어 오르고 식기가 나동그라진다.

짓눌린 이마의 피부가 찢어져 시야 앞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이 남자는 정말로 죽일 생각이 없더라도 몸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시우의 손이 빛살 같이 움직인다.

열심히 갈고 닦았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지금 시우에겐 마력수가 없었다.

대신 시우는 테이블의 포크를 움켜쥐고 옆에 선 표도르의 허벅지에 힘껏 꽂았다.

생존본능에서 기인한 임기응변이었다.

"끄랏!"

두꺼운 청바지 원단을 날카로운 포크가 뚫어냈다.

그 밑에 부드러운 살과 근육을 관통하는 것은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효과는 훌륭했다.

갑작스런 통증에 표도르의 손이 머리채를 놓친 것이다.

어질거리는 현기증을 뒤로하고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거리를 벌린다.

"이 앙큼한 새끼 봐라."

표도르는 허벅지에 꽂혀 파르르 떨리는 포크를 단숨에 뽑아냈다.

정말 있는 힘껏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상처 자체는 생각보다 얕은 것 같다.

시우는 다른 테이블 위에서 고기를 써는 나이프를 쥐었다.

워낙에 두툼한 스테이크를 통째로 내주는지라 패밀리 레스토랑에 나오는 조잡한 식사용 칼이 아니다.

잘만 찌르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물건이다.

그걸 알고 있는 표도르도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그걸로 뭐, 배라도 쑤시게?"

잠깐 생각할 시간을 벌었으니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을 취해야 한다.

시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살면서 가장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아멜리아아아!!!!!!"

어찌나 커다란 소리였는지 표도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3초 뒤.

주점의 1층은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푸하하하하!"

"저 새끼 주인님 찾는 꼬라지 봐."

"장관이네, 진짜 크크크큭."

시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표도르와 다른 선원들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야, 그만 일로와 시발새끼야. 너도 포크로 눈깔 뽑아줄게."

"......."

10초, 15초, 20초, 30초.

위층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멜리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니들 진짜 미친놈들이구나."

시우가 다시는 아멜리아를 볼 수 없는 이유.

이 선원들은 다 같이 작당해서 아멜리아를 노리고 있다.

게다가 이미 반쯤 성공했거나 완벽하게 성공했다.

후환만 확실히 제거할 수 있다면 마녀의 총애를 받는 노예 따위 아무렇게나 대할 법하지.

이유는 모른다.

방법도 모른다.

이렇게 추론한 뒤에도 너무나도 현실감각이 결여된 추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멜리아는 마녀다.

그것도 22 위계의 메리골드 남작.

현대의 최첨단 전략 병기조차 가볍게 농락할 수 있는 대 마녀인 것이다.

고작 이 정도의 인원수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시우의 외침에 아무런 응답이 없다.

즉, 그들은 아멜리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가장 유력한 방법은,

라리사가 가져다준 와인.

"그쯤 해, 표도르. 어린애 상대로 뭐하는 거야?"

표도르가 슬금슬금 시우에게 다가갈 때 시우의 추론에 확신을 더해줄 인물이 등장했다.

푸른뱀 접선소의 주인이자 나가 호의 일원.

라리사가 걸어들어온 것이다.

"끼어들지 말고 빠져. 저 새끼가 내 허벅지에 바람구멍 내놨다고."

"너도 가서 출항 준비나 해. 시답잖은 장난이나 칠 시간 없어."

"라리사, 아까부터 저 애송이를 싸고도는데..."

-철컥

표도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엉덩이골 사이에 무엇인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어이, 장난이지?"

라리사가 품에서 꺼내 든 것은 첩보영화에나 나올 법한 토카레프였다.

그녀는 그것을 표도르의 엉덩이 사이, 불알에 겨누고 있었다.

"나랑 여기서 구슬치기할래? 아니면 닥치고 가서 준비할래? 토카레프는 안전장치 없는 거 알지? 이대로 방아쇠 당기면 빵! 이야."

"야야! 시발 알겠어! 하여간 걸레 같은 년! 시발 곱상하게 생긴 새끼만 보면 사족을 못 써요."

"니들 같은 털복숭이 사이에서만 굴러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을 해봐.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뽀송뽀송한 남잔데. 그리고 죽이면 안 되는 것도 알잖아."

"누가 죽인대? 고분고분해지게 혼쭐만 내주자고."

"말대꾸 한 거지?"

"안 했어! 안 했어! 그거 치워!"

표도르는 질린 표정으로 포크를 던져놓고는 남은 선원들을 인솔했다.

"야! 니들도 어서 움직여!"

이내 가게 1층에는 라리사와 시우만이 남게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리사의 권총이 이번에는 시우의 가슴을 향했다.

영화 같은 곳에서 조그마한 권총 끝만 겨눠도 왜 꼼짝을 못하나 했는데.

이런 중압감 때문이었구나.

저 조그마한 구멍이 이쪽을 향하고 있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힌다.

"신시우랬나?"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한 마디 정도는 립서비스로 해줘도 괜찮은데. 아까 나도 해줬잖아."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누님이었네요."

시우의 원망 어린 말에 라리사는 그저 씩 웃었다.

"아직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지?"

"아멜리아 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궁금하면 객실로 가봐. 내 앞에 서.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아, 그 전에 그 귀여운 칼은 내려놓자."

칼을 내려놓았다.

시우는 전직 특수부대 대원도 아니고 은퇴한 첩보 요원도 아니다.

조잡한 칼 한 자루로 권총에 대항할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보더 타운 쯤되면 호신용으로 권총을 들고 다니는구나.

아드레날린의 과분비 탓인지 살짝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돈 라리사는 시우를 숙소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몰았다.

"대충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궁금한데. 말해 줄래? 나도 이야기하는 수고가 덜 것 같아서."

계단을 오르며 답한다.

"이 일에 동참한 사람은 당신을 포함한 아까 호출되지 않은 선원들. 아멜리아 님은 현재 의식이 없다. 그 수단은 와인에 탄 독 또는 의식을 잃게 하는 무언가."

"그게 다야?"

"....공모자는 아마도 게헨나 외부의 마녀."

거기까지 들은 라리사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대단하네! 셜록 홈즈 같아! 마녀가 개입했다는 사실까진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그 술은 시우와 라리사를 비롯해 모두가 나눠 마셨다.

하지만 효과를 본 것은 아멜리아뿐.

아마도 체내의 마력에 반응해 작용하는 독.

그 아멜리아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걸려든 덫이라면 그 방법은 고 위계의 마법뿐이다.

게다가 마녀를 상대로 이런 소란을 일으켜 놓고 무사하리라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당연히 대응책이나 뒷배가 있을 것이다.

" '추방자'인가요?"

"그것도 정답."

라리사는 손뼉을 짝 치며 답했다.

모든 마녀가 게헨나 안에서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아멜리아나 쌍둥이처럼 게헨나 안에서 사는 마녀의 비중은 기껏해야 전체의 절반 정도이다.

나머지 절반은 현대에 터를 잡고 살아가며 그 부류는 정확히 두 가지다.

하나는 게헨나보다 현대가 편해서, 혹은 그 외 개인적인 사정 또는 용무로 스스로 원해서 현대에 머무는 마녀.

다른 하나는 불문율을 어겨 시민권을 몰수당해 게헨나에 들어올 수 없는 마녀 즉, 추방자이다.

자세한 사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악행을 저지른 자도 있다.

다른 마녀의 견습 마녀를 헤친 자.

너무 무리한 마법 실험을 강행해 지나치게 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킨 자.

또는.

"낙인을 빼앗을 생각인 거군요."

마법의 위계를 올리기 위해 다른 마녀를 죽이고 낙인을 빼앗은 약탈자.

"정답! 얼굴만 반지르르한 줄 알았더니 눈치가 빠르네. 머리도 좋고. 오른쪽 세 번째 방이야 열어."

시우는 객실의 손잡이를 열고 들어갔다.

거기엔 아멜리아가 있었다.

침대에 누우려는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채 쓰러져 있다.

뒤에서 라리사가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황급하게 그녀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그만! 몸에 손이라도 댔다간 그대로 쏠거야."

라리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시우를 제지했다.

"상태 정도는 확인하게 해줘요!"

"손을 대지 않고 하도록 해."

시우는 라리사를 한번 노려보고 아멜리아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렇게 밉살맞던 아멜리아지만 저렇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코오...."

일단 숨은 쉰다.

그러나 흔들어서 깨어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호흡이 가늘고 길다.

"갑자기 뛰어나가서 쏠 뻔했잖아.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조심해."

침착하게 상황을 재정리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시우를 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일한 목격자인 시우를 살려두어 보더 타운의 문을 나가자마자 추적이 붙는 것보다는 살인멸구하는 편이 깔끔하다.

"왜 쏘지 않는 거죠?"

"그런 것도 불만이야?"

라리사는 그녀를 계속 노려보는 시우의 눈빛에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동병상련이지. 너도 멋대로 잡혀 와서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잖아. 모든 건 네 생각대로야. 나와 표도르를 비롯해 몇몇 선원들은 게헨나 밖의 마녀와 계약했어.

적당한 마녀 하나를 납치해서 준다면 현세에서 살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제안을 받고 말이지."

라리사는 권총을 내려놓았다.

물론 시우가 달려들려는 순간 얼마든지 쏠 수 있는 거리는 유지했지만.

"오랫동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 좋게 오늘밤에 수확을 얻었지 뭐야? 하필이면 우리가 가게를 빌린 사이에 노예 하나만 딸랑 데리고 온 마녀 귀족이 나타났으니까."

어쩐지 움직임이 너무 일사불란하다 했다.

아멜리아는 입을 벌리고 있는 식충 식물에 들어온 나비인 셈이다.

"사실 이곳 생활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나는 꽤 돈이 넉넉한 편이고 보더 타운의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큼 풍족해."

시우는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는 거죠?"

마녀를 납치하는 행동에 리스크가 없을리 없다.

실패하거나 중도에 걸리게 되면 이일에 동참한 자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리사는 답했다.

어쩐지 쓸쓸한 대답이었다.

"게헨나에서 금화 천 파운드가 있어도. 자유는 살 수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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