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4화 (24/917)

#25

1.

시우가 아멜리아를 데리러 나갔을 때 그녀는 이미 기다림에 지쳐 여관으로 걸어오던 길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이 여관도 불태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혼나겠지?

"왜 이렇게 늦은 건가요?"

"죄송합니다. 이미 예약되어 있다는 걸 사정사정하느라..."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던 아멜리아지만 사실 별장이 아닌 여관에서 하루를 묵게 된 원인이 본인에게 있다는 걸 아는지 크게 짜증을 내지는 앓았다.

이 정도로 사리분별할 능력은 있으면서 그간 왜 그렇게 못살게 굴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뭐해? 계속 마셔."

"으하하하!"

"아니 갑자기 놀랐잖아."

일전에 오딜과 술집에 들렀던 적이 있는 시우는 아멜리아가 여관에 들어설 때 사람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었다.

다 같이 조용해지고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겠지.

그러나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뭇 대담하다고 할까? 딱 봐도 마녀이자 귀족이 분명한 아멜리아를 보고도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대부분의 선원이 한 번쯤 힐끗거리며 아멜리아의 아름다운 외모를 훔쳐보긴 했지만 이내 말썽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었다.

한두 명 정도는 지그시 그녀의 몸매와 얼굴을 뜯어보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방은 이쪽이라고 합니다."

계단으로 아멜리아를 안내하는 시우.

그러나 아멜리아는 한구석에 비어있는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간단히 식사하죠."

아까까지 술잔을 열심히 닦고 있던 여관 주인은 아멜리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어슬렁어슬렁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리곤 특별히 비굴하게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고귀한 마녀님이 머무시기에는 너무 시끌벅적 한 것 같군요. 뱃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목소리도 커서 제가 조용히 시켜도 소용없습니다. 음식은 올려드릴 테니 객실로 올라가시죠."

시우는 깜짝 놀랐다.

여관 주인의 말은 괜히 여기서 분위기 흐리지 말고 위로 올라가라는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마녀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방자할 수 있다니 이 게헨나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잠자리에 음식 냄새가 풍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합당한 대금을 치를 테니 음식을 내오세요."

하지만 한 성깔 하는 아멜리아답게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여관 주인을 상대로 내려보는 눈빛을 취하며 반짝이는 금화 네 개를 꺼내놓는다.

여관 주인은 머리숱이 별로 없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멜리아가 설득 불가능한 타입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 듯싶다.

"이 돈이라면 창고에 있는 재료들을 싹싹 긁어모아도 거스름돈이 남을 겁니다. 하나만 주시죠. 어이 주방장! 스페셜 코스 하나! 힘 팍팍 넣어 금화 하나짜리다!"

여관주인은 금화 하나만을 챙겨가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주방에 외쳤다.

그나저나 스페셜 코스 하나라니.

변변한 메뉴판도 없는 것이 태반인 게헨나의 주점에서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확실히 이곳이 현대와 가까이 맞닿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장의 스페셜 코스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졌다.

우선 나이프를 대기도 전인데도 핏물과 육즙이 뚝뚝 흐르는 거대한 스테이크가 가장 눈에 띤다.

하지만 고기 요리는 그걸로 끝이었고 대신 타로 타운에서 보기 힘든 각종 해산물 요리가 나왔다.

왕새우와 조개관자를 모아 얼큰하게 끓인 감바스.

통째로 삶은 커다란 바닷가재에 생선머리 구이.

그 외에도 13가지가 넘는 음식들이 빈틈없이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맛있게 드십쇼."

손수 요리를 서빙한 주방장이 돌아가고 시우는 5년 만에 야식을 눈앞에 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부교수님!"

주변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거의 고함을 질러야 말이 전달된다.

아멜리아와 시우가 식사를 시작했을 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목 주목! 지금부터 호명된 선원은 즉시 출항 준비에 들어간다!"

여관 밖에서 걸어들어온 말쑥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종을 울리며 주의를 끌었다.

종이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읽으며 선원들을 호출했다.

"뭐야 시발! 왜 갑자기 출항인데?"

"몰라, 선장이 지금 당장 가야 할 일이 생겼다잖아."

"막스, 벤, 티미. 야 저 새끼 깨워서 따라와."

"'왜 나야! 다른 놈 데려가!"

"달밤에 돌았나! 조타수가 뻗었는데 배를 어떻게 몰아!"

"니미 한 달 만에 밟는 육지구먼, 재수에 옴 붙었네."

제각기 즐겁게 떠들며 놀던 선원들이 갑자기 옷가지를 챙겨 들고 뛰쳐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험악한 욕설과 불평과는 달리 일사불란하게 사람을 추려 밖으로 튀어 나간 선원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지나간 후에 여관 1층에 남은 사람은 십여 명 정도였다.

시우가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아멜리아는 주변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호출당한 선원이 모두 밖으로 나갔을 때쯤.

아멜리아의 식사도 끝나있었다.

워낙에 소식을 하는 만큼 시우보다도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적막해진 술집.

그래도 취객 열 몇 명이면 제법 왁자지껄할 법도 한데 여관은 괜히 긴장감이 감돌 정도로 조용하다.

"어머, 마녀님. 또 뵙네요."

그때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라리사가 테이블로 걸어왔다.

아멜리아는 어디선가 꺼내든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바른 자세로 라리사를 올려보았다.

"무슨 일이죠?"

"특별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고..."

"식사 중이에요. 안 보이나요?"

사근사근 말을 걸던 라리사의 말문이 막힌다.

사실 아멜리아의 화법을 처음 보는 사람은 저런 반응이 정상이다.

붙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니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마침 제가 뒤풀이에 쓰려고 좋은 와인을 챙겨왔는데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선원들이 출항하게 되어서 함께 나눌 사람이 부족해져 버렸네요."

라리사는 깨끗한 와인잔 두 개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따고 와인을 개봉한다.

"현세에서 들여온 값비싼 술이니 마녀님의 입맛에도 맞으실 겁니다."

아멜리아는 라리사의 진의를 가늠하듯 그녀의 행동을 쭉 살폈다.

아멜리아는 귀족이고 라리사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접선소를 운영한다.

이유없는 호의는 아니라는 것.

"미안하지만 이런다고 제가 그쪽에게 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저 성의 표시죠."

-쪼르르륵

잔에 예쁘게 담기기 시작한 적색의 포도주.

음식 냄새에도 파묻히지 않는 향긋한 포도향이 코를 간질인다.

라리사는 아멜리아뿐만 아니라 시우의 앞에 놓인 잔에도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라리사는 그걸로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남은 병을 들고 주변 선원들에게도 한 잔씩 술을 따라주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상황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마녀란 경외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고 또 사람들이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위치이니 그럴 법도 하지.

아멜리아는 홀짝 와인을 마시고 쓱 인상을 찌푸렸다.

시우는 와인을 마시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굉장히 드라이한 와인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아멜리아가 싫어할 법하다.

"먼저 올라갈 테니 먹고 오세요."

아멜리아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한 모금 마신 포도주를 쓱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저도 곧 식사가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눈치 보며 먹을 필요 없어요. 이건 오늘 관리인이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에 대한 보상이니까요."

오늘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다.

"그리고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제 조수로 배속받는 건 어떻게 생각하죠?"

아직 그 제안이 남아있었구나.

아까의 말실수로 기회가 다 날아갔다고 생각했던 시우에겐 뜻밖의 두 번째 기회였다.

"지금처럼 편의를 보장해 줄 용의도 있어요."

과연 그래서였던가?

시우는 복잡했던 머리가 좀 트이는 것을 느꼈다.

아멜리아는 5년 전부터 현대에서 수학자 출신이었던 시우를 조수로 삼으려 했다.

시우는 그것을 밤시중 제안으로 착각했다.

마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노예상인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던 시우는 그것이 위험하다 지레짐작하고 거절했다.

감히 노예에게 거절당한 수모를 겪은 아멜리아는 그날 이후로 꾸준히 시우를 괴롭혀왔다.

최근 들어 유달리 잘해주기 시작한 이유는 다시 조수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깔끔하게 정리가 됐네.

시우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제 1년만 더 참으면 된다.

아멜리아의 전속 조수가 된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보다는 일감이 줄겠지.

그러면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이 게헨나를 벗어날 마법을 더 빨리 완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하나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인 것이다.

시우의 대답을 들은 아멜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비록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내일 보도록 하죠."

아멜리아는 객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그가 끝까지 식사를 계속하게 해준 것도 나름의 호의일 것이다.

일단 노예인 만큼 이런 음식을 입에 담을 일이 그닥 없고 무엇보다 해산물은 내륙에서 특히나 먹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건 좀 고맙네."

아멜리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시우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어이 애송이."

막 랍스타 껍질을 포크로 쑤시기 시작할 때.

테이블 앞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익숙한 목소리다 싶더니 아까 괜한 시비를 걸던 근육 거구남 표도르였다.

"무슨 일이세요?"

그는 아멜리아가 남기고 간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너 남총이었구나?"

남총 남총 그놈의 남총.

아멜리아와 섹스는커녕 손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닌데요."

시우는 랍스터 살을 퍼먹으며 퉁명스레 답했다.

뭔가 거북한 남자다. 최대한 빨리 먹을 것만 먹어치우고 위로 올라가자고 결심한 시우.

하지만 이내 그 선택을 후회했다.

저 진화 덜 된 고릴라 같은 남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식사를 끝냈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잖아. 거 시발 부럽네. 누구는 창녀를 궁둥이 두드리는 동안 누구는 마녀 보지나 쪽쪽 빨고 있고."

뱃사람 중에 거칠고 무식한 사람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밖에서는 엘리트 취급받던 시우는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인종이었다.

머리통만한 저 주먹에 맞으면 얼굴이 뭉개지겠지만 시우도 결코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다.

그나마 군생활과 노예 생활을 거치며 많이 유순해진 편이었다.

"거 그럼 창녀 엉덩이나 마저 두드리러 가지. 왜 남의 밥상머리에 앉아서 입맛을 떨굽니까?"

이만한 체격차다.

설마하니 말대꾸가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표도르의 표정이 멍청해진다.

그것도 순간이었다.

그는 알만하다는 비웃음을 지으며 다시 더러운 음담패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마녀님한테 귀염받는 남총 새끼한테 질척한 이야기나 들으러 왔지."

표도르는 의자를 쓱쓱 끌고 오더니 시우의 어깨를 툭툭쳤다.

"어이 애송아, 얘기 좀 해줘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아까 색끈한 마녀님 침대 위에서는 어때? 좀 어려 보이던데 거시기에 털은 났냐?"

"진짜 이게 미쳤나."

시우는 어이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마녀다.

만약 시우가 정말 남총이라면 그녀에게 이 일을 일러바칠 수도 있다.

뭘 믿고 이렇게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해 있는 걸까?

"젖꼭지는 무슨 색이냐? 응? 왜 자꾸 입을 꼭 다물고 그래. 시발 좋은 게 좋은 건데."

아멜리아에 대해 온갖 음흉한 성희롱을 지껄이는 이 남자를 보니 기분도 나빠지고 동시에 입맛도 떨어졌다.

더는 큰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시우는 어깨에 둘린 팔을 치우고 식사를 끝냈다.

"말조심 좀 합시다. 저분이 누군지는 알아요?"

"크하하하!"

-쾅!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정신을 차리자 시우는 랍스타가 담겨있던 접시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표도르의 팔이 시우의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은 것이다.

"알 게 뭐야 창놈 새끼야."

귀에서 들려오는 이명.

볼에 박혀 든 랍스타의 껍질, 소스가 콧구멍으로 들어갔는지 시큰시큰 코가 맵다.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 수도 없는 가운데 더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르르 달려가서 꼰지르려 한 모양인데. 미안해서 어쩌나."

웃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 비열한 목소리가.

"니가 앞으로 저 마녀년을 보게 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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