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
아멜리아가 한참 목욕 중인 이 시간.
트리하우스 밖으로 쫒겨난 시우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 쓰다..."
어떤 의미로는 조금 충격이다.
매일같이 시우를 못살게 굴던 아멜리아,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친절.
솔직히 헷갈릴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나?
으슥한 밤에 업무가 끝나면 숙소로 찾아오라고 하다니.
그 말을 듣고 어떤 남자가 '아 나를 조수로 삼으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옆에서 깝쭉거리는 타카쇼의 부채질도 한몫 단단히 했다.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반했다느니, 딱 봐도 사춘기 계집애 같다느니.
어쩌면 시우 자신이 정말 그렇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청승맞은 빗소리와 함께 쪽팔림이 몰려왔다.
당사자 앞에서 '그때 나랑 섹스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라고 말해버렸으니 아멜리아가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아멜리아가 목욕을 끝내면 단둘이 이 별장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시우는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 지를 한참 고민했다.
사실 자다가 굴러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테라스에서 몸을 웅크리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도저히 그녀를 다시 볼 면목이 없었다.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옷은 안에서 전부 입고 나왔을 것이고 마녀의 목욕이 끝났다면 노예는 시중을 들어야 한다.
바깥바람을 쐬고 있었다는 건방진 변명은 아멜리아에게 통하지 않을 테니까.
"......."
아멜리아는 어느새 침대 위에 놓여있는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목욕을 끝내고 와서인지 복숭앗빛으로 상기되어있는 두 뺨.
그 위에 별빛 같은 눈동자에 고심이 서려 있었다.
시우도 아멜리아가 살펴보던 물건을 보았다.
그건 베이비돌 잠옷이었다.
시우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잠옷을 들어 올린 아멜리아의 행동 덕에 더욱 자세히 디자인이 보였다.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일단 씨스루다.
성인용품점에서 야한 커스튬으로 파는 싸구려 따위가 아니라 값비싼 비단으로 짜여진, 입는 순간 아래의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관능적인 씨스루.
아멜리아는 그것을 한참이나 뒤적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우야 그것이 단번에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잠옷'이란 걸 알아차렸지만 아멜리아는 달랐다.
아멜리아의 기준에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입어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천 쪼가리'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옷처럼 생겼으니까 그 용도가 궁금할 수밖에.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소피아의 수작임을 짐작하게 된 아멜리아는 곧 그 천쪼가리의 용도 역시 파악해냈다.
-찌익!
이윽고 단 한 번도 주인과 하나가 되지 못한 베이비돌 잠옷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그녀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쓸데 없는 짓...을...."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휘젓다가 어느샌가 그녀의 지척에 서 있는 시우를 발견했다.
그리고 두 조각난 잠옷을 손에 든 채로 우뚝 굳는다.
"아...."
아멜리아의 손에서 말릴 새도 없이 분홍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잠시만요!"
처음에는 그 불똥을 자신에게 처박으려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던 시우.
예상과는 달리 수 천도의 불꽃에 휘말려 타고 있는 것은 그녀의 손에 들렸던 잠옷이었다.
잿가루도 남지 않고 증발해버린 잠옷.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시치미를 뚝 떼는 아멜리아.
"방이 싸늘하네요."
그녀가 원하는 바를 파악했기에 시우도 짐짓 모른 척했다.
이 별장은 아멜리아의 친구의 것이고 그녀는 아마 남자를 아주 좋아하는 마녀일 것이다.
그래서 별장도 이렇게 러브호텔처럼 꾸며둔 것이고 저런 잠옷도 준비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러신가요? 지금 당장 벽난로에 불을 지피도록 하겠습니다."
이 별장 작은 주제에 있을 건 다 있다.
시우가 벽난로로 걸어간 그때.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벽난로 위에 환기를 통해 난 창문으로 검은 연기가 풀풀 솟고 있었다.
"뭐지?"
시우는 창을 열고 벽난로 위를 기어 올라가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트리하우스를 짊어진 거대한 상수리나무의 밑동에서 아까 베이비돌 잠옷을 화형에 처했던 분홍빛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저기, 아멜리아 님."
일반적인 불길이 아니다.
그녀의 마력이 피워낸 홍염은 탐욕스럽게 태울 것을 찾아 믿을 수 없는 기세로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고 있다.
"저희 큰일 난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죠?"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간다고..."
-화르륵!
아멜리아의 대답이 들려온 지 15초도 지나지 않아서 근사했던 트리 하우스는 마법의 불길에 휩쓸렸다.
2.
불꽃을 일으키는 마법은 아주 쉽다.
불, 바람, 땅, 물이라는 4원소의 하나이기 때문에 복잡한 형질변환을 거칠 필요 없이 하나의 패스만 있으면 쉽게 발현할 수 있다.
22 위계라는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아멜리아가 조절을 실수하기엔 너무나도 기초적인 마법이라는 의미였다.
화염 방사기라도 사용한 것처럼 맹렬하게 별장 안으로 밀려오던 불꽃은 아멜리아가 손끝을 튕기는 순간 없던 것처럼 소멸했다.
그러나 이미 화마가 할퀴고 간 별장은 폐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시우가 아멜리아의 마법으로 나란히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끼이이익 쿵!
그 짧은 시간 동안 중심부까지 숯이 되어버린 나무는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당연히 단란했던 별장도 태풍을 맞아 날아간 새 둥지처럼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다.
"부교수 님
"......."
"이제 어떻게 할까요?"
"......."
아멜리아와 시우는 자연재해에 휘말린 실향민처럼 몇 분이나 비를 맞으며 부러진 나무와 트리하우스를 보고 있었다.
"이런 천박한 집에서 하루를 보낼 순 없죠."
"그렇다고 집을 태워 버리십니까?"
"조용히 해요."
아무래도 아멜리아는 아까의 마법 실수를 은근슬쩍 덮고 넘어갈 생각인가보다.
시우도 먼저 잘못한 일이 마음에 걸렸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고 결국 둘 사이에는 적막한 정적만이 흘렀다.
-까악! 까악! 까악!
어디선가 구슬피 지저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렸왔다.
2.
시우라면 몰라도 아멜리아는 귀하신 몸.
새벽이슬과 부슬비 아래서 노숙할 리 없다.
결국 둘은 한참을 걸어 숲길을 벗어나 보더 타운의 선착장으로 되돌아왔다.
아까로부터 3시간은 족히 지나 시간은 자정을 넘겼지만 선착장은 아직도 짐을 나르는 노예로 붐볐다.
게헨나의 모든 물자를 담당하는 항구인 만큼 24시간 풀가동 되는 것이다.
"근처의 숙소를 알아보겠습니다."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우산을 들려준 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잠자리를 물색했다.
타로 타운이나 레노먼드 타운같은 내륙 도시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게헨나의 시민들은 사실상 농노나 다름이 없기에 여행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상의 이유로 다른 타운이나 빌리지에 들를 일이 생겨도 주점에 어느 정도 돈을 내고 빈방에서 묵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보더 타운은 사정이 다르다.
시도 때도 없이 현세와 게헨나를 오가는 선원과 선장이 많았고 현세에서 살다 잠시 게헨나에 들르는 마녀들도 많은지라 꽤 규모가 큰 숙박시설이 많았다.
문제는 그 많은 숙박시설이 다른 숙박객으로 꽉꽉 차 있다는 점.
가끔 하나씩 비는 경우는 있었지만 방 두 개가 비어있는 곳은 없었다.
온갖 여관을 다 뒤지다 마지막으로 시우가 찾은 여관은 누운 뱀 쉼터였다.
3층짜리 목조건물로 여느 여관이 그렇듯 1층은 주점으로 운영되며 2, 3층에 손님을 맞이하는 객실이 있었다.
"건배!"
그나저나 주점에 사람이 엄청 많다.
그을린 피부와 울퉁불퉁한 몸.
딱 봐도 뱃사람이다 싶은 차림의 남자들이 걸쭉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다.
"모두 주목! 다음으로는 우리 선장의 건배사가 있겠습니다!"
"우우우!! 술이나 마셔!"
쏟아지는 웃음과 야유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시우는 바 카운터에 서 있는 여관 주인에게 빈방의 여부를 물었다.
"혹시 남는 방이 있을까요?"
여관 주인이라기엔 험상궂게 생긴 남자다.
시가를 질겅거리며 잔을 닦던 그는 시우의 몰골을 쓱 훑어보더니 답했다.
"방은 남았는데 손님은 못 받아."
"제가 노예라서 그런 거라면..."
"그게 아니라, 오늘 이 여관은 나가 호의 선원들이 통째로 빌렸어."
큰일이다.
이 여관이 마지막인데.
곤란해하던 찰나 바 카운터의 옆에 전혀 뜻밖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점장, 너무 팍팍하게 구는 거 아니야?"
오늘 점심쯤 접선소에서 시우의 물건을 열심히 빨아주었던 라리사였다.
술에 기분 좋게 취한 듯한 그녀는 답지 않게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희끼리 질펀하게 놀겠다면서."
"그래도 갈 곳 없어서 곤란해 보이는 사람한테 잠자리를 빌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러면야 뭐. 나야 좋지."
어깨를 으쓱한 여관 주인은 열심히 닦던 잔을 내려놓았다.
"2인실 기준 아침을 포함한 하루 숙박비 인당 1실링이야. 방은 많이 남으니까 아무데나 골라잡아."
"감사합니다!"
성공적으로 잘 곳을 마련한 시우는 라리사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덕분에 잠자리를 구했습니다."
그의 예의 바른 인사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라리사.
어째 재롱떠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구나? 내 가슴 사이에 끼워 넣고 싶었어?"
은근히 가슴골을 모으며 배시시 웃는 라리사.
그 풍만한 골짜기 사이로 늘어진 목걸이가 부러워지는 광경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라리사 님이 여기에 계신지도 몰랐어요."
"어머, 내가 나가 호의 홍일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푸른뱀 접선소에 물건을 대주는 배가 나가 호잖아."
듣자하니 그런 오해를 살 법도 했다.
아마 달콤한 기약을 들은 시우가 하루도 못 참고 그녀가 있을 이 여관으로 후다닥 달려온 것으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정말 아니에요. 지금도 밖에서 마녀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마녀가? 아까 그분?"
라리사의 눈빛이 일순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원래대로 생글생글 요염한 미소를 띤다.
"어차피 마녀님도 주무시러 온 거잖아? 밤에 시간이 비면 내 방으로 와."
자꾸 이렇게 늦어지면 곤란한데.
턱밑을 간질이는 라리사의 손길에 시우가 문쪽을 힐끗거릴 때 구원투수가 등판했다.
"라리사 또 남자 꼬시기냐. 그러지 말고 나한테 오라니까. 이런 비실비실한 애송이가 뭔 매력이 있다고 그래."
걸걸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든 남자는 근육의 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구였다.
진지하게 고릴라와 레슬링해도 반반 싸움을 갈 것 같은 외형이다.
"싫어, 표도르. 너는 너무 멍청해 보여. 너 같은 남자들이 침대 위에서도 힘만 쓰면 단 줄 안다니까?"
"자지 박히면 앙앙거릴 년이 주둥이 나불거리긴."
"글쎄? 너야말로 계집애처럼 울면서 3분 만에 싸지 않을까?"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는 라리사의 모습이 마음에 든 듯이 헛웃음을 짓는 표로드.
갑자기 19금에서 29금으로 장르가 바뀌어버린 대화의 틈바구니에서 조심히 빠져나오던 시우의 어깨를 표도르가 턱 잡았다.
"야, 애송이. 허튼 생각 말고 잠이나 자라. 허리 접혀서 반병신 되기 싫으면."
"하지마 병신아! 왜 애를 겁을 주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그가 시우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만으로 머리가 울릴 정도의 충격이 전해져왔다.
시우는 애써 고릴라를 무시하고 라리사에게 인사를 전했다.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리사 님."
"고마워 할 거 없어. 이따 술이나 한 잔 하자."
"시간이 나면 꼭 갈게요."
손을 흔들어주는 라리사의 모습을 뒤로하고 시우는 아멜리아를 데리러 여관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