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2화 (22/917)

#23

1.

아멜리아는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숙소까지 오는 길 내내 까악까악 요란스럽게 울어대던 소피아도 따라 들어왔다.

평상시라면 시끄럽다며 마법으로 입을 막았겠지만 지금의 아멜리아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뭐지?

왜지?

어째서지?

이 세 가지 의문만이 맹렬한 로테이션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곧장 욕실로 직행한 아멜리아는 마법으로 구현한 샤워기를 틀고 머리부터 물을 뒤집어썼다.

소피아의 까마귀는 부리를 사용해 세면대에 물을 받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목욕을 즐겼다.

"아멜리아, 화났어?"

아멜리아는 아직 남자를 모른다.

성관계 따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다.

애초에 성욕이란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아멜리아였으니까.

노예를 숙소로 불러들인다 해서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기껏 늦은 시간 불러들였으니 차나 한잔 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세라도 가르쳐줄 생각이었건만.

설마하니 초대에조차 응하지 않다니.

아멜리아는 마녀고 상대 남성은 노예였다.

이런 까마득한 신분의 격차를 두고도 유혹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화 안 났어요."

"엄청 화난 목소린데."

"아베느가, 정말 화 안 났다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인 거죠?"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씻고 갈게. 까마귀는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거 알지?"

태연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까마귀를 보니 더욱 부아가 치민 아멜리아.

조금 전의 치태를 목격한 사람이 하필 소피아라는게 열불이 났다.

소피아는 위로랍시고 되지도 않는 말을 나불거렸다.

"아마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기가 죽어버린 게 아닐까?"

"입이라도 다물어주면 안 될까요?"

"응."

얄밉게 입을 꾹 다무는 소피아를 보고 아멜리아는 부들부들 떨었다.

소피가 연구동에 와서 졸라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주먹을 불끈 움켜쥔 아멜리아.

마음 같아선 저 까마귀의 목을 꽉꽉 졸라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체통 없는 행동, 할 수 있을 리 없다.

"어째서...."

아멜리아는 혼란스러운 듯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한참을 물장구치며 놀던 까마귀는 아멜리아를 지그시 보았다.

소피아는 아멜리아보다 20년 정도 먼저 마녀가 되었다.

선대 아베느가와 메리골드는 막역한 사이였고 소피아는 마녀의 낙인을 물려받자마자 빠른 속도로 선대의 지식을 흡수했기 떄문에 꼬꼬마 견습마녀였던 아멜리아에게 이런저런 마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만큼 이런저런 일로 얽힐 일이 많았던 아멜리아는 소피아에게 있어 여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아멜리아는 그런 취급을 극구 거부하지만 말이다.

하루하루 목숨을 거는 것처럼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고 다른 재밌는 것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아멜리아의 모습.

소피아가 이런저런 일탈을 제안하는 것도 아멜리아에게 마법 이외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으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멜리아의 모습을 보니 오늘은 망한 것 같다.

설마하니 그 노예가 마녀의, 그것도 아멜리아의 밤시중 제안을 거절할 줄이야.

그 노예의 자세한 속내는 모르지만 아멜리아는 거절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멜리아."

"왜요!"

"너무 상심하지 마."

끙끙거리던 아멜리아는 씩씩거리며 소피아를 쏘아보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아멜리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분을 주체못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녀가 마녀가 된 이후로는 처음 보는 모습이다.

"왜 하필이면 절 꼬드겨가지곤..."

소피아가 보기에 아멜리아는 아직 사춘기도 겪지 않은 온실 속의 화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 바르고 기품있고 정숙하던 스승님의 모습을 잘 흉내내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 성숙한 자아를 지니지 못했다.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선대 메리골드가 죽고 나서 아멜리아가 낙인을 물려받았다.

베이비 시터 비스름한 역할을 했던 소피아는 이후 현세로 여행을 떠났다.

아주 긴 여행이었다.

새장 같은 게헨나를 벗어나 긴 세월 동안 경험을 축적하고, 넓은 세상 속에서 역사가 흐르는 모습을 목도하며 창조의 마녀가 낳은 괴물  '호문쿨루스'를 죽여왔다.

비록 마법의 위계는 한 단계도 높이지 못했지만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긴 여행 이후.

140년 만에 게헨나를 다시 찾은 소피아는 곧장 아멜리아를 찾았다.

'오랜만이네요, 아베느가.'

다시 만난 아멜리아는 훨씬 더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

마치 인형 같았다.

소피아가 아멜리아와 재회한 곳은 아멜리아가 선대

메리골드와 함께 살던 숲속의 오두막집.

예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는 오두막집에서는 선대 메리골드를 향한 아멜리아의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 오두막집에서 아멜리아는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연히 마녀가 마법을 연구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지나치게 마법에'만' 몰두했다.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그 누구와 대화도 나누지 않고.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모든 것을 마법을 위해 불태우고 있었다.

소피아는 마법을 향한 아멜리아의 집착이 단순히 탐구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사람을 사귀는 것이 서툴렀던 아멜리아다.

부모나 다름없던 스승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가장 마음을 열었던 소피아조차 현세로 떠났다.

홀로 남은 아멜리아가 슬픔과 외로움을 승화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견습마녀시절 그토록 자신 없어 하던 마법이었다.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마녀로서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던 아멜리아가 불과 140년 만에 2개의 위계를 올릴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왜 우는 거죠?'

소피아는 스승님이 물려준 마녀복을 걸친 채 한 무더기의 종잇장에 파묻혀 있던 아멜리아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접촉이 불쾌하다는 듯이 소피아를 밀어냈지만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차라리 현세에 아멜리아를 데려갔더라면 어땠을까?

신비롭고 새로운 세상에 정신 팔려 있을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아멜리아를 위해 게헨나로 돌아왔더라면 어땠을까?

너무나도 커다란 후회가 남았다.

'여기서만 이러지 말고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가자.'

'어째서요? 저는 이곳이 좋아요.'

제안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소피아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멜리아를 억지로 끌어내어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부교수로 추천한 것이 소피아다.

'그곳에 가면 마법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길지도 몰라.'

'관심 없어요.'

물론 처음에 아멜리아는 거절했다.

여태껏 그녀의 삶을 바쳐온 보금자리를, 그것도 스승님과의 추억이 쌓인 장소를 쉽게 벗어날 리 없다.

'아멜리아, 이건 키퓌시에서 사 온 케이크야.'

'이건 플로라 양장점에서 맞춘 드레스. 어때? 너한테 딱 어울리지?'

'이건 담배라는 건데 가끔 머리가 아플 때 피우면 좋아.'

게헨나의 이름 없는 숲에 처박힌 아멜리아를 꺼내오기 위해 온갖 신문물로 유혹했다.

달콤한 디저트, 예쁜 옷, 심지어 담배까지.

물론 아멜리아가 소피아가 내세운 속물적인 이유로 소피아를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구애에 가까운 소피아의 설득 끝에 아멜리아는 마지못해 아카데미의 부교수로 취임했다.

'아멜리아, 풍요제에 같이 가지 않을래?'

'관심 없어요.'

'현세에 나가볼 생각 없어? 정말 깜짝 놀랄텐데.'

'스승님도 평생을 게헨나에서 보내셨어요. 제가 구태여 나갈 필욘 없죠.'

평생 마법만을 바라봤으니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삶의 양식이 단번에 뒤바뀔 리 없다.

'바쁘니까, 가세요.'

아멜리아는 오두막을 나와서도 마법에만 몰두하려 했다.

소피아가 사사건건 방해하며 이런저런 곳에 끌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아마 낙인을 물려줄 때가 될 때까지 저 짓을 반복했겠지.

그로부터 겨우 5년이 지났다.

추억과 그리움 속에 매몰되어 혼자만의 세상을 살아온 아멜리아가 완전히 성숙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존경하는 스승님처럼 고아한 마녀의 모습을 연기하곤 했지만 그런 노력은 너무나도 얇은 도금에 불과했다.

아멜리아는 쉽게 토라졌고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려댔으며 또 가끔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 허둥지둥하곤 했다.

"감히... 노예 주제에..."

소피아가 보기엔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종이 인형처럼 생기 없어 보이던 그때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 분을 삭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원래 사람이라는 건 기뻐하고, 화내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법이라는 걸.

소피아는 이미 밖에서 배웠으니까.

"용서할 수 없어요. 제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짓던 소피아는 아멜리아의 독백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속마음을 거의 말하지 않는 아멜리아가 이렇게 격정적인 혼잣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꽤 자극이 컸던 모양이다.

이제 슬슬 달래주도록 하자.

소피아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때.

"노예 주제에, 노예 주제에, 노예 주제에..."

"아멜리아?"

"이건 있을 수 없는 모독이에요."

"어라? 이게 아닌데?"

아멜리아는 어두운 아우라를 풀풀 풍기며 복수심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멜리아는 아직 미숙하다.

일정 이상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을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노예에게 거절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고지식한 게헨나의 신분 사회의 계급론에 투영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무시무시했다.

"주제를 모르는 노예에게 자신의 분수를 확인시켜주도록 하죠."

원래 조류에게는 땀샘이 없지만 소피아는 의체로 부리고 있는 까마귀의 몸에서 땀이 뻘뻘 나고 있음을 느꼈다.

아까 그 노예의 고생길이 훤하게 열리는 것이 보였다.

가뜩이나 노예로 잡아 온 것도 미안한데 이런 트러블까지만들어 버리다니.

"미안하네 좀."

소피아는 아무 말도 없이 세면대에서 총총 걸어 나왔다.

아멜리아는 태생이 모질지 못해 노예에게 직접적으로 해코지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그리 크게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되겠지.

"본때를 보여주겠어요!"

울분의 찬 아멜리아의 혼잣말을 끝으로 조용히 욕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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