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1.
이런 밤에는 숲에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항구에서의 불빛도, 구름에 가린 달빛도.
빽빽하게 뻗은 참나무숲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멜리아의 옆에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장식불이 동동 떠다니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구름버섯 빌리지는 참으로 기이한 모습이다.
지구가 망하고 한 200년 정도가 지나면 이런 광경이 될까?
한 저택의 지붕을 뚫고 자란 나무, 가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 무너진 집의 잔해 사이에서 우뚝 서 있는 나무 등.
하나하나가 50M는 넘게 자란 상수리나무가 주택가에 곳곳에 범람해 있다.
돌멩이 대신 도토리가 채이는 길을 따라 도착한 곳.
이 어두컴컴한 (전)주택가에서 유일하게 불빛이 흘러나오는 별장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별장이지만 시우도 아멜리아도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침내 도착한 별장이 20M 정도 되는 나무 중턱에 걸려있었으니까.
이 사고는 10년 전, 저 별장이 지어진 건 3년밖에 안 됐다고 하니 일부러 저런 곳에 지은 것이겠지.
이색 호텔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지구에도 꽤 여러 개 있지 않은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이라던가, 알프스산맥이 보이는 언덕에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다던가, 수심 20M 아래 있는 방이라던가.
아마 그런 느낌으로 지은 별장 같았다.
"정말 여기가 맞나요?"
"보기엔 작아도 공간 마법이 걸려있을 거예요."
둘은 나란히 서서 공중에 매달린 트리하우스를 올려보았다.
이렇게 아래서 보니 정말 높은 곳에 걸려있다.
아멜리아는 땅을 가볍게 박차더니 천사처럼 날아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시우는 위에서 내려진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이 정도 높이의 사다리를 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상당히 간이 떨렸다.
그리고.
겨우겨우 올라갔을 때 시우가 발견한 것은 별장의 문을 연 채로 그대로 굳어있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나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급하게 아멜리아의 옆에 바짝 붙은 시우는 그녀와 똑같이 굳어버렸다.
"........"
"........"
공간 마법이 걸려있으리라는 아멜리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별장은 몹시 작았다.
두 사람이 함께 묵으면 어디에 있던 서로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국 시골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트리하우스는 허름한 외관에 비해 최신식이나 다름없는 설비를 지니고 있었다.
먼지 한톨 없이 깔끔하게 청소된 채 관리되고 있었으며 게헨나 특유의 고리타분한 실내장식을 고수하기보다는 현대의 호텔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구성이 인상적이다.
다만 그 구성이라는 부분에서, 조금 문제 되는 사항이 있었다.
에로틱한 분홍색의 불꽃이 타오르는 촛대와 단 하나만 놓여있는 거대한 침대.
침대 위 천장에는 침대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거울이 부착되어 있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침실과 욕실을 분리하는 것은 고작 반투명한 유리 벽 하나가 전부이다.
무엇을 더 말하랴.
그냥 딱 러브호텔이다.
아멜리아는 말을 잃었고, 시우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관리인, 입 다물어요."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아멜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빙글 돌더니 시우와 마주 선다.
"당신도 알겠지만 전 이 별장에 오는 게 처음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멜리아가 이렇게 당황할 리 없지.
아멜리아는 연신 머리카락을 꼬며 말했다.
"이건 제가 준비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준비를 부탁한 것도 아니에요. 완벽하게 상정 외의 일이었어요."
"아무런 오해 없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교수님."
한편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가 이렇게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귀중한 것이었다.
"알고 있다니 됐네요."
시우는 나란히 놓여있는 슬리퍼로 신발을 갈아신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2.
문을 닫자 괜히 더 야시꾸리한 기분이 든다.
아멜리아와 단둘밖에 없는 러브호텔에 들어온 것 같다.
혹시 이게 모두 아멜리아가 보내는 그린라이트가 아닐까?
일부러 포탈의 정기 점검일에 보더 타운으로 함께 향하고, 검은색의 야릇한 속옷을 입고, 오늘따라 괜히 잘해주고, 게다가 별장이라고 온 곳은 연인끼리 섹스하기 딱 좋은 분위기이다.
마녀의 체면이 있고 아멜리아는 특히나 그런 걸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대놓고 밤 시중을 들라는 말은 못 하고.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어필하는 것이 아닐까?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멜리아가 그런 수작을 부릴 리 없다.
그것도 고작 노예와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말이다.
-쏴아아아
바닥에 앉아 면벽 수련을 하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던 시우의 귓가에 물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멜리아가 씻고 있는 소리다.
마녀가 되면 많은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낙인을 받은 마녀는 '영체'가 되고 이 영체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신체이다.
늙어 죽지 않아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고, 싸지 않아도 되고, 자지 않아도 된다.
체온 조절을 위한 땀 정도는 나는 듯하지만 이 역시 마법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녀들은 진미를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대욕장에서 몸을 씻는다.
그녀들이 인간일 적 '기호'가 마녀가 되어서도 관성을 갖고 이어지는 것이겠지.
아멜리아가 구태여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윽고 샤워기의 물소리가 그치고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슬쩍 고개를 돌려 욕실을 가린 반투명 유리벽을 보았다.
머리를 올려묶은 아멜리아가 욕조에 앉아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관리인."
"넷!"
욕실에 웅웅거리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설마 들켰나 싶어 큰 소리로 답했다.
다행히 들킨 건 아닌 것 같았다.
"와인샐러에서 잔과 와인을 가져오세요. 오늘 사 온 담배도요."
그런 게 있던가? 하고 둘러보던 시우의 눈에 방구석에 박혀있는 조그마한 와인셸러가 보인다.
정신이 없던 시우와는 달리 아멜리아는 용케도 저 그림자에 있던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아멜리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뜰하게 재떨이까지 챙긴 시우.
아멜리아를 보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욕실 앞 유리문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준비됐습니다."
"가지고 들어오세요."
그러나 아멜리아의 지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실에 들어오라는 명령이 추가로 떨어진 것이다.
"그, 그럴 수 없습니다!"
침착해야 한다.
이건 아멜리아의 함정이다.
만약 여기서 좋다꾸나 하고 들어가서 그녀의 맨살을 보게 되면 분명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예 주제에 마녀의 몸을 보려고 기대에 들떴다니. 관리인에게는 거세형이 어울리겠어요'라는 말을 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두번 말 안해요. 들어오세요."
아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우는 심호흡했다.
바닥만 보고 들어가서 와인만 건네주고 보면 된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욕실 문을 연 시우.
자욱한 수증기가 욕실 안에 너울거리는 촛불을 번지게 하고 있다.
향긋한 장미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시우가 본 것은 욕실 바닥 바구니 안에 담겨있는 아멜리아의 옷과 속옷.
지극히 어른스럽고 가리는 면적이 적은 속옷이 잘 개어진 채 바구니 속에서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럴 것 없어요. 어차피 거품이 있으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조심조심 고개를 든 시우.
그녀의 말대로 욕조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가득 거품이 몽실대고 있었다.
따라서 시우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멜리아의 고운 어깨선.
머리카락이 젖지 않도록 올려묶은 탓에 보이는 사슴 같은 목선뿐이었다.
"담배 먼저."
시우는 담배팩에서 한 개비를 꺼내 그녀의 입술 사이에 물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그녀에게서 담배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데, 그것도 마법의 일종일까?
"와인."
아멜리아가 들고 있는 잔에 시우는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여 와인을 따랐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와인으로 입을 적셨다.
거품으로 가려져 있다고는 해도 꽤 노출도가 높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골과 조금도 가려지지 않은 하얀 팔, 그리고 겨드랑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으니까.
"관리인."
"네, 듣고 있습니다."
"관리인도 하나 펴요."
"네."
시우는 재깍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꾸 폭풍같이 올라오려는 성욕을 막으려면 꽤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네요?"
"부교수님도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까요."
거기서 아멜리아가 중년남을 죽였더라면 그나마 있던 미운정도 다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밖에서 꽤 유능한 수학자였다고 알고 있어요.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수학자 꿈나무였지만.
그보다 아멜리아가 노예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알고 있는 것이 의외였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것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연구자료를 정리하고 관리해 줄 조교가 필요해요."
"네."
"5년 전에 제안했던 것처럼 제 전속으로 오라는 말이에요."
"네?"
시우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머리 사이를 전기가 스쳐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5년 전이면 아멜리아가 밤 시중을 부탁했던 때 아닌가?
그때 전속 노예를 제안했었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인가?
"부교수님.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다면요."
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5년 전에 저에게 밤시중을 들라고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기억 속 아멜리아는 분명 일이 끝난 시우에게 다가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러나 애초에 수학밖에 모르는 동정이었던 데다가 노예상에게 마녀의 무서운 점을 잔뜩 들어왔던 시우는 지레 겁먹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이후 아멜리아는 그것에 분개하며 집요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노예를 괴롭혔다.
이게 시우의 기억이다.
"과연, 실례되는 질문은 맞네요."
아멜리아는 불쾌한 듯이 이마를 찌푸리더니 술을 홀짝였다.
"저는 그날 일이 끝나면 침소로 오라고 말했죠. 하지만 밤시중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낸 적 없어요."
"왜 굳이 침소로..."
"얼마나 쓸만한지 테스트를 해봐야 했고 연구동보다 그쪽이 훨씬 가까우니까요. 그러면 관리인, 그간 저를 아무 남자나 침소에 들이는 헤픈 여자로 여겼던 건가요?"
냉랭한 아멜리아의 목소리.
약간 얼버무리는 느낌이 나긴 하지만 그걸 따질 정도로 간이 크진 않다.
"죄, 죄송합니다."
시우는 머리 숙여 사과했다.
전제 자체가 단단히 꼬여있었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다.
아멜리아가 다른 남자를 침소로 끌어들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녀는 마법 외에는 관심이 없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마녀니까.
그런 아멜리아가 하필 처음 본 노예를 침대로 끌어들일 생각을 한다?
그것도 갑자기 사랑에 빠져서?
애초에 도끼병에 단단히 빠져있다.
타카쇼가 옆에서 부채질하기도 했지만 명백한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 하긴 수컷이란 것들이 하는 생각이 모두 그렇죠."
한겨울 삭풍보다 날카로운 아멜리아의 분노가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시우의 등을 헤집었다.
아까의 콩닥거림은 없어졌다.
이제는 어떻게 그녀의 비위를 맞춰 기분을 풀지 생각해야 할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