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멜리아의 친구가 빌려주었다고 하는 별장.
그 별장이 어디인지 도통 가늠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태생부터 고귀한 아멜리아가 보더 타운의 지리에 빠삭할 리는 없고 시우가 행인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 누구 하나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못했다.
거의 1시간 넘게 길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무척 신경 쓰인다.
"저기 구름버섯 빌리지 1-12가 도대체 어디인가요?"
"아이고, 초행길인 사람은 거기 못 찾지. 잘 들어 총각."
한참을 우왕좌왕하던 시우는 아까 닭꼬치를 팔던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친절한 아주머니는 상세하게 길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그다지 궁금하지 않던 사건까지 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그러니~ 동향 사람끼리 다 돕고 사는 거지."
아멜리아와 시우가 한참이나 헤맬 만 했다.
시우가 찾던 별장의 주소지는 원래 타운의 마녀들이 모여 살던 빌리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10년 전까지의 얘기이다.
지금 구름버섯 빌리지는 보더 타운의 북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숲이 되어 있었다.
한 마녀가 실험 중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수천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폭주 상태로 자라나면서 집들을 다 부숴버렸다나?
참고로 그 마녀는 '새싹의 반란'이라 명명된 이 사고 이후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게헨나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그 정보까지 전달했다.
"...그래서 그러데, 부교수님의 친우분이 혹시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닐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어진 지 3년밖에 안 됐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렇군요."
하긴 꼼꼼한 아멜리아가 그런 것도 확인하지 않았을 리 없지.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내고 선착장을 가로지른다.
현대로부터 게헨나로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선착장은 밤에도 쉬지 않고 배가 드나들었다.
공사장에서 쓰일 법한 야간투광조명이 곳곳에 배치되어 어두컴컴한 항구를 훤하게 밝히고 있었고, 노예들은 채찍에 두들겨 맞으며 끝이 보이지 않은 상하차를 하고 있었다.
낚싯배에서 건져 올려진 듯한 거대한 상어 아래서 경매가 벌어졌다.
바쁘게 달러 지폐를 세어 금괴와 교환하는 밀수꾼들도 보였다.
바다의 비릿함보다 지독한 땀내와 곳곳에서 풍겨오는 아편, 그리고 담배 냄새.
만약 시우가 시청 소속이 되지 못했더라면 이곳에서 멍자국을 어루만질 시간도 없이 수하물을 옮겨야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오싹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곳곳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마녀들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시스템임에도 그녀는 아무런 죄악감 없이 편승할 뿐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불쾌감이나 경멸 이전에 조금, 실망감을 느꼈다.
"나, 난 못해..! 난 못한다고...!"
그때 선착장 한 곳에서 노예 한 명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시우의 팬티보다 못한 바지만 걸치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옮기던 짐을 내팽개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추운 날씨 속에서 반나체로 있으면서도 그의 허리 옷단에는 땀이 말라붙은 자글자글한 소금으로 가득했다.
"이 새끼가 실성했나? 당장 안 일어나?"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건장한 체격의 노예 관리자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련의 소동이 아멜리아의 동선에 끼어있었기에 둘은 우뚝 멈춰 섰다.
"죽여! 시발 죽여! 그냥 죽이라고! 하루에 16시간을 어떻게 일해!"
흰 눈에 벌건 핏줄을 세우며 악을 지르기 시작한 중년남은 채찍에 얻어맞으면서도 강짜를 부렸다.
한참 채찍을 휘두르던 관리자는 아멜리아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딱 봐도 지체 높으신 마녀의 앞에서 자기가 관리하는 노예가 치태를 부르고 있으니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게헨나 시민들의 사고방식은 봉건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스릉
관리자는 마침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곡도를 꺼내 들었다.
"돼지같이 굼뜬 것도 꾸역꾸역 참고 봐줬더니 더는 안 되겠다!"
걸쭉한 가레를 탁 뱉고 중년인의 목으로 칼을 휘두려는 그때.
아멜리아가 나섰다.
"멈추세요."
"마녀님! 이런 놈은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는 것은 중년남도 마찬가지였다.
아멜리아를 발견한 중년남이 빽빽대기 시작한다.
"그 짝이 그 잘났다는 마녀요? 끄악!"
"이 새끼가!"
불경하게 마녀에게 입을 놀리려는 중년남의 머리를 관리자가 걷어찼다.
노예의 발언이 마녀 모독죄가 된다면 거기부터는 관리자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쯤 기절한 중년남을 관리자가 짓밟으려 할 때 다시 아멜리아가 끼어들었다.
"멈추라고 말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떼는 관리자.
게헨나의 생태를 이해하고 있는 관리자는 마녀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중년남이 그간의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왜 멀쩡히 잘살고 있는 사람을 잡아 오고 지랄이야!"
중년남은 바닥을 기며 증오스럽다는 듯이 아멜리아를 쏘아보았다.
"너희가 그렇게 위대해? 그렇게 잘났나! 그럼 죽여봐 시발! 당장 죽이라고!"
아멜리아의 눈썹이 꿈틀하자 시우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멜리아가 고약한 마녀라는 건 알지만 그녀가 누군갈 죽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진정해요."
"넌 또 뭐야!"
노역장의 업무가 마비된 가운데 시우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시우는 관리자를 제치고 상의를 북 찢어 중년남의 얼굴에 잔뜩 묻은 진흙을 닦아 주었다.
"아저씨 그러다가 죽어요 진짜. 좀만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관리자는 시우의 어이없는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아멜리아 때문이었다.
중년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시우의 가슴팍을 밀쳤다.
"너 남총이냐? 마녀랑 딱 달라붙어 있는 꼴을 보니 알 만하다.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역겨워. 우릴 이렇게 만든 놈들이 누군지는 알아? 저 썅년들이야! 니가 친일파랑 다를 게 뭐야?"
얼굴에 침만 얻어맞고 뒤로 밀쳐진 시우.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는 눈썹을 찡그린 채 앞으로 나섰다.
라일락 향기가 풍겼다.
나루터에 눌어붙은 말라비틀어진 해초를 제외하면 한 그루의 꽃나무도 찾아볼 수 없는 항구에서,
화원에 들어온 것 같은 꽃향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생선이 썩는 악취도,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쿱쿱함 땀 냄새도, 바다 비린내와 뒤섞인 진흙 냄새도 모두 없던 것처럼 덮어졌다.
꿈에서나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고혹적인 라일락 향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녀의 자성마법.
아멜리아 메리골드를 '향수의 마녀'라고 불리게 만든 마법이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사람들.
관리자조차 칼을 내팽개치고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 드리죠."
아멜리아의 손이 느긋하게 중년남을 가리키려는 순간.
그 손목을 시우가 와락 붙잡았다.
"....아?"
하늘색 눈의 눈동자가 새파란 마력 반사광으로 달아오르던 아멜리아는 딸꾹질을 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노예가 허가 없이 마녀의 몸에 손을 댄다.
이것은 극형감이다.
그러나 경악의 기색도 잠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아멜리아가 묻는다.
"이게 무슨 짓이죠?"
"마녀님은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노예에게 모욕을 당했어요. 본인도 죽음을 원하는 거 같으니 합당한 처사죠."
틀렸다.
아멜리아는 뼛속부터 순혈인 마녀다.
그녀에게 이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설파한다 한들 제대로 들을 리가 없는 것이다.
"맞죠, 그게 맞죠. 그런데 아멜리아 부교수님."
시우는 아멜리아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결코 팔을 뻗지 못하도록.
아멜리아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부교수님이 저 노예를 죽인다면, 전 절대 교수님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건 결의로 내뱉기엔 우습기 짝이 없는 대사였다.
그 어떤 노예가 마녀에게 용서하니 마니를 지껄이겠는가?
그 모순을 시우도 알고 있었다.
"......."
아멜리아는 한참이나 시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시우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한참의 눈 씨름 끝에 아멜리아의 보석 같은 눈동자를 빛내던 반사광이 가셨다.
마력을 거둔 것이다.
비강을 가득 채우던 향긋한 라일락 향기 대신 원래 보더 타운에서 나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제야 시우는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방금까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사람들은 모두 우뚝 굳어 있었다.
마치 단체로 행위 예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좋은 꽃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잠깐 동안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웅성거리는 사람들.
아멜리아는 시우를 지나쳐 땅에 떨어진 칼을 주섬주섬 챙기는 관리자에게 다가갔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제 3 정박지 물류하역 담당자 잭입니다!"
관리자는 큰 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 노예의 출신을 알아보고 적절한 곳에 재배치해주세요. 꼴을 보아하니 여기 두었다간 며칠 안 가 죽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씩씩하게 대답한 관리자.
노예가 마녀를 대놓고 모욕하고 욕설을 지껄인 것에 비하면 몹시 관대한 처사였다.
잠시 후 언제 화를 내고 있었냐는 듯 멍하니 서 있던 중년남이 멀어지는 아멜리아의 뒤통수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왜? 죽이라니까? 못 죽이겠냐 엉?"
아멜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관리자가 입을 틀어막는 소리와 함께 중년남의 고함이 잦아들고 시우는 아멜리아 옆에 쓱 붙어섰다.
"부교수님, 감사합니다."
시우는 기뻤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멜리아가 아주 썩어빠진 근본의 마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까지 느껴졌다.
"착각 마세요. 관리인의 말을 듣고 결정을 바꾼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아멜리아.
그래.
차라리 이렇게 싹수없고 냉랭하게 굴어도 손을 더럽히지 않는 모습이 아멜리아에겐 더 어울린다.
저 멀리 보이던 상수리 숲의 오솔길에 발을 들이기 직전.
아멜리아는 시를 읊듯 말했다.
"마녀답게, 그리고 귀족답게 살아라."
"예?"
"그게 스승님이 제게 남기신 유언이었어요. 언제나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죠."
시우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멜리아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건 5년간 처음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녀답게 살라는 말씀의 의미는 알고 있어요. 지금처럼 살아가면 되는 거겠죠."
시우는 누구보다 마녀다운 아멜리아의 옆얼굴을 보았다.
오만하고 냉랭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번민의 그림자를 엿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귀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언제나 예쁜 인형처럼(단 매우 무서운 저주를 받은)만 보였던 아멜리아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시우는 말했다.
"조금 전 아멜리아 님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귀족다웠습니다."
잠깐 무방비해졌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원래의 것으로 돌아간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고집스러운 표정 변화였다.
"관리인이 뭘 안다고 말하는 거죠?"
톡 쏘아붙이는 아멜리아.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시우는 그저 슬쩍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