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6화 (16/917)

#17

1.

지그재그 형태로 놓인 절벽의 길을 따라 걸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아멜리아의 둥근 뒤통수.

우산 안을 가득 채우는 향긋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체취에 섞여 가슴을 간질인다.

보수적인 것을 좋아하는 마녀들인 만큼 게헨나는 철저하게 중세적인 느낌을 풍기지만 보더 타운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밀수꾼들이 들여오는 현대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고 다른 타운과의 왕래가 차단된 만큼 현대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 많은 것이다.

당장 선착장에서 물류를 실어나르는 노역꾼들만 봐도 멜빵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시장 한구석에서 닭꼬치를 파는 조그마한 노점상 지붕은 공장에서나 쓰이는 파란 판넬이다.

그나저나 닭꼬치라...

닭꼬치는 시우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파도 함께 꽂아 숯불에 구워내는 일본식 닭꼬치는 특히나 좋아한다.

그렇다고 아멜리아의 시중을 드는 와중에 저걸 사러 갈 순 없으니 냄새로 만족하던 시우.

그런 시우에게 아멜리아가 말을 걸었다.

"관리인."

"네?"

"가서 두 개 사 오세요."

"정말입니까?"

"네."

이 나이 먹고 먹을 것에 이렇게 들떠도 되나 싶긴 해도 어쩔 수 없다.

하루종일 음식 같지도 않는 것만 먹는 삶을 살다 보면 제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라도 고기 한 조각에 울고 웃게 변할 것이다.

그녀에게 페니를 받아 노점상으로 달려갔다.

"두 개 주세요."

"네~"

사글사글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숯불로 달궈진 자갈 위에 꼬치를 올려놓았다.

치지직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노릇노릇 익어가기 시작하는 닭고기.

좋은 냄새가 솔솔 풍긴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 출신 이야?"

"네?"

그러고 보니 게헨나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이다.

닭꼬치에 정신이 팔려 눈치는 못 챘지만 아마도 한국인인 것 같았다.

"아, 한국이요."

"어머머, 그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노예?"

"일단은요."

동포를 만났다는 기쁨에 아주머니의 눈은 반가움에 빛났다.

"뒤에 계신 마녀님을 모시는 거니?"

"비슷하긴 한데 직속은 아니고 시청 소속입니다."

"그래~ 그래도 시청 소속인 게 어디야. 노역장 쪽으로 넘어가는 노예들은 엄청 고생한다니까."

"아하하..."

"고향 사람 만났으니까 기분이다. 하나 더 줄게."

"감사합니다."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눈 시우는 몸 건강히 조심하라는 아주머니의 덕담을 들으며 아멜리아에게 돌아갔다.

"부교수님, 감사합니다."

"왜 세 개죠?"

그동안 혼자 우산을 쓰고 있던 아멜리아는 닭꼬치를 넘겨받았다.

"마침 고향이 같으신 분이라 하나 더 주셨네요."

"....거리 한복판에 서서 먹을 수는 없으니 저쪽으로 가죠."

그녀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은 처마가 길게 늘어져 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우산을 접고 벽에 기대어 나란히 섰다.

시우는 아멜리아가 닭꼬치를 무는 것을 확인하고 양념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입에 물었다.

닭 껍질 밑으로 배어 있는 육즙과 기름, 달콤짭짤한 간장 베이스의 소스가 향긋한 숯불 향과 함께 요동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던 시우에게는 황홀한 음식이었다.

"관리인."

"네?"

"고향이 그립나요?"

오물오물 거리며 고기를 조용히 뜯어먹던 아멜리아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요즘 따라 이런 실없는 질문을 많이 듣는 것 같은 기분인데.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아니면 타카쇼의 말대로 이게 아멜리아 나름의 어프로치일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시우는 바싹 익은 파를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게헨나는 마녀를 위해 마녀가 아닌 모든 이를 착취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눈에 드러나는 핍박은 아니지만 개인의 자유를 거세시킨다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겠네요."

요즘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 이후도 이상하다.

대화라는 게 티키타카가 되어야 하는 건데 아멜리아는 몇 마디를 던지고 입을 꾹 다물곤 하는 것이다.

"........"

".......쩝쩝."

제법 크다고는 해도 그래 봐야 닭꼬치다.

시우가 2개를 먹어치워봤자 위에 기별 정도만 간다.

"저기...."

-콰광!

시우가 닭꼬치를 다 먹고 아멜리아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 순간.

빗물이 너무 무겁게 쌓였기 때문일까?

둘이 함께 비를 피하던 처마가 무너져내렸다.

반응할 새도 없는 찰나의 순간.

깜짝 놀라 동그랗게 입과 눈을 벌린 아멜리아의 얼굴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아멜리아의 머리 위를 가렸다.

무너져 내린 자재가 등과 머리 그리고 팔을 때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시우는 아멜리아를 감쌌다.

처마에 고여있던 물이 자재와 함께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다.

정수리에 정확히 썩은 나무토막이 떨어진 것 같다.

어찌나 아프고 어지러운지 시우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아."

귀엽게 숨을 집어삼키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시우는 눈을 떴다.

시우가 현기증을 이겨내고 정신을 차렸을 때의 상황.

벽치기를 하듯이 두 팔을 아멜리아 머리 옆으로 뻗고 있는 시우.

그의 그림자 아래 아멜리아가 쏙 들어가 있었다.

그 와중에 마녀에게 함부로 손대면 안된다는 것을 떠올린 것인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않은 것에 쓴웃음이 나온다.

"....어."

"........"

그건 그렇고 얼굴이 너무 가깝다.

시우가 최대한 혀를 뻗으면 그녀의 둥근 이마를 핥을 수 있는 거리였다.

입은 다물었지만 여전히 휘둥그레진 아멜리아의 눈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색색 숨을 뱉는 그녀의 입술까지도 너무 잘 보였다.

상황이나 구도나 진부한 러브 코미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다.

시우도 아멜리아도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멜리아였다.

"관리인, 너무 가까워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 이대로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던 건 아니고...."

횡설수설하며 휙 상체를 뒤로 젖힌 시우는 다시 침을 삼켰다.

시우가 떨어지는 나뭇조각들을 막아줄 순 있었지만 잔뜩 고여있던 물까지 전부 막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아멜리아의 옷이 양동이라도 부은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엄...."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멜리아의 드레스는 몹시 얇고 색이 옅었다.

거기에 빗물이 끼얹어지자 옷감이 찰싹 몸에 달라붙어 은은한 몸의 굴곡을 드러냈다.

그리고 반투명해진 드레스 뒤로 보이는 브래지어.

한 손으로 덮으면 딱 쥐기 좋을 정도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감싸던 검은색 브래지어가 씨스루라도 입은 양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

아멜리아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시우를 보고 천천히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그리고 렉이 걸린 컴퓨터처럼 꽁꽁 굳어버린다.

"관리인."

그녀의 부름에 시우는 주춤주춤 뒤를 돌았다.

과연 아멜리아.

이 지경이 되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찰나의 착각이었다.

자세히 보면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창백해 보이는 뺨도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라 있고 말이다.

"다친 곳은 없나요?"

아멜리아는 슬쩍 팔을 들어 몸을 가리며 시우의 안위를 묻는다.

평소 고약하게만 굴던 아멜리아가 고작 노예의 몸 상태를 걱정하다니.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서인지 저런 상식적인 행동에조차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됐네요. 오늘의 실수는 없던 일로 눈감아주겠어요."

만약 이 세계관이 러브코메디 세계관이었더라면 옷을 말리고 빗물을 씻는다는 핑계로 모텔로 직행.

풋풋하거나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게헨나의 마녀의 도시였다.

-딱!

아멜리아가 손끝을 튕김과 동시에 시우와 아멜리아의 몸에 있던 모든 빗물이 말끔히 증발했다.

코앞에서 보기 민망했던 아멜리아의 드레스도 방금 건조기에서 꺼낸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변했다.

고여있던 빗물에서 풍기던 흙냄새는 사라지고 대신 은은한 박하향이 코를 맴돈다.

"이제 가죠."

아멜리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기품있는 걸음새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런웨이를 걷는 것처럼 우아하다.

"저기, 부교수님."

"괜찮아요, 고작 빗물에 젖어서 옷이 슬쩍 비쳤던 것뿐이에요. 그 외에 불미스러운 일은 문제 삼지 않겠어요."

유독 빠른 아멜리아의 말투는 그녀가 조금 민망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네, 그건 정말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근데..."

"그럼 뭐가 문제죠?"

"푸른뱀 접선소는 반대 방향인데요?"

"......."

여느 때와 같이 도도하고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아멜리아.

그녀는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히 말했다.

"저는 아멜리아 메리골드에요. 그런 간단한 사실도 모를 것 같나요? 그저 선착장을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최대한 태연하게 넘기려 하지만 아무래도 아멜리아는 굉장히 민망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꽤 신선했고 무엇보다.

조금 귀엽게 보인다.

설마 그 아멜리아에게 이런 감상을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모처럼 몸을 던져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잔해를 받아낸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괜한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시우는 우산을 펼쳐 들고 아멜리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괜스레 아까의 장면이 눈에 떠올랐다.

상당히 의외였다.

아멜리아가 그런 선정적인 속옷을 입는 타입이었을 줄이야.

가슴의 절반을 겨우 덮을 정도로 아슬아슬하던 브래지어가 자꾸만 생각났다.

2.

접선소란 밀수꾼들이 현대에서 공수해온 물품을 판매하는 도소매점을 의미했다.

어떤 접선소는 시우처럼 납치당한 노예만을 취급하고, 어떤 접선소는 곡식만을 취급한다.

그중에서 푸른뱀 접선소는 마녀를 대상으로 팔려나갈

고급 물품들을 파는 곳이었다.

참고로 굉장히 카리스마 넘치고 섹시한 누님이 점장인 곳이기도 하다.

"어서 오세요."

물건이 상자째로 한가득 쌓여있는 좁은 접선소.

고급 모피와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박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각종 가구가 랩으로 돌돌 말린 채 진열되어 있다.

낡고 녹슨 기름 램프가 비추기에는 너무나도 비싸 보이는 물품들이었다.

"오랜만에 오네."

"몇 번 안 왔는데. 기억하시네요."

"난 귀여운 남자는 절대 안 까먹거든."

매대에 앉아 전자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던 여주인은 시우를 보고 가볍게 윙크를 했다.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이라.

현대에 있었을 때 자주 입던 옷이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여주인은 시우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아멜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고귀하신 마녀님께서 이 허름한 곳까지는 어인 일로 행차하셨나요?"

눈앞의 상대가 마녀임을 알고도 이런 행동을 태연히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바보이거나 담이 매우 좋은 사람이거나.

아마 이 누님은 후자에 속하겠지.

한편 어째서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멜리아는 시우와 여주인을 슬쩍 번갈아 보았다.

"관리인, 아까 일의 답례에요. 원하는 걸 골라오세요."

"감사합니다!"

정말이냐 되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처럼 좋은 일을 했으니 아멜리아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뽕을 뽑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아멜리아와 시우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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