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
기상하자마자 가벼운 스트레칭.
잠자리가 불편한 만큼 일어나자마자 제대로 몸을 풀지 않으면 온종일 고역이다.
시우는 느긋하게 15분 정도 몸을 풀었다.
아멜리아의 호출 덕에 간만에 늦잠을 잔 건 좋지만 까다로운 그녀와 단둘이 쇼핑을 하는 것은 솔직히 살 떨리는 일이다.
"아, 맞다."
허리를 풀던 시우는 뒤늦게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어제 아멜리아의 태도가 너무 의미심장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타로 타운 가야 하는데."
아멜리아와 약속을 잡은 것은 전날.
따라서 오딜과 오데트에게 아무런 언질을 줄 수 없었다.
쌍둥이는 여느 때처럼 타로 타운의 저택에 숨어 들어가 오지도 않는 시우를 기다리겠지.
"큰일 났네..."
잔뜩 기대하고 있는 쌍둥이를 바람맞혔다간 뒷감당이 꽤 힘들 텐데.
그렇다고 아멜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타로 타운을 들를 수도 없다.
"뭐, 잘 설명하면 이해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며칠간 오딜과 꽤 친해졌다는 것이다.
친근한 듯 굴지만 묘하게 거리감이 있는 오데트와는 다르게 오딜은 제법 시우를 사람 대 사람으로 봐주었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어느 정도 성취에 도달한 인간에 대한 존중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로만 하는 협박도 이젠 아주 잦아들었고 말이다.
시우는 옷을 걸치고 축사 밖을 나섰다.
2.
'보더 타운'에 대해 설명하려면 마녀의 도시 게헨나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마녀들이 숨어들 곳은 점점 좁아졌다.
과학은 발전함에 따라 신비를 밀어낸다고 했던가.
예전에는 예언가, 점술가, 마법사, 신관, 제사장, 샤먼, 연금술사, 약사 등등 다양한 직업으로 당대 사회에 녹아들었던 마녀들은 점점 좁아지는 입지를 느꼈다.
신비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4세기 무렵부터 위대한 마법을 지닌 대마녀들은 마녀를 위한 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게 된 오지.
오랜 세월이 지나 잊힌 도시 등을 누더기처럼 끌어모아 대규모 결계를 짜낸 것이다.
이것이 이 세계에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간, 관측할 수 있지만 관측할 수 없는 공간,
'이면세계' 게헨나가 탄생한 비화다.
"이번엔 늦지 않았네요."
화려한 분수대.
반짝이며 흩날리는 물방울 옆에서 아멜리아는 화보 모델처럼 서 있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렇게 냄새가 풀풀 나는데도 전혀 역하지 않은 아멜리아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향수였다.
판타지 시대 공주님이라도 된 것처럼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멜리아.
어떤 옷을 걸쳐도 아름다운 그녀지만 오늘따라 더욱 화려하다.
큐빅 따위가 아닐게 분명한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왔으니까.
당장 사교회에 나가 춤을 춰도 흠잡을 수 없을 것이다.
보더 타운에 가는데 그렇게까지 차려입습니까?
라는 말을 꾹 삼킨 시우.
대신 약간의 립서비스를 했다.
"오늘따라 고귀해 보이십니다."
"그래요?"
타카쇼에 말에 따르면 예쁘다는 칭찬 마다하는 여자 없다더라.
시우는 어색하게 칭찬의 운을 뗐다.
웬일인지 별다른 말 없이 쓱 쳐다보는 아멜리아.
평소였더라면 '당신에게 인정받아야만 제가 고귀해지는 건가요?' 같은 말을 했을 텐데.
"네, 특히 그 갑갑해 보이는 로브가 없어서요."
최대한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는데 어떻게 전달됐으려나.
예상과는 다르게 아멜리아의 아미가 살포시 찌푸려졌다.
시우의 스카우터에 의하면 저것은 아멜리아가 불쾌감 75를 느꼈을 때 짓는 표정이다.
단번에 불쾌함 75를 찍다니.
신기록 경신이었다.
"죄송하네요. 스승님이 남기신 유품이 답답해 보여서."
아, 맞다 시발.
칭찬하는데 정신 팔려서 뻔히 알고 있던 사실을 놓쳤다.
당황한 시우가 뭐라도 말하려 허둥지둥거리기 전에 아멜리아가 선수를 쳤다.
"됐어요, 관리인에게 잘 보이려고 차려입고 온 것도 아니고. 절대."
그녀는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휙 등을 돌려 서쪽 교사로 향했다.
곱게 땋은 금발이 말꼬리처럼 좌우로 찰랑였다.
역시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
시우는 통한의 실수를 자책하며 조용히 아멜리아의 뒤를 따랐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야금야금 토지를 모아와 도시를 증축한 탓에 게헨나는 제법 넓다.
정확한 넓이는 모르지만 제주도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게헨나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카데미에서 게헨나의 끝자락에 있는 보더 타운까지 가려면 마차로 족히 하루는 꼬박 달려야 할 것이다.
마녀들은 이런 귀찮음을 없애기 위해 게헨나를 오가는 포탈을 설치했다.
보더 타운에 있는 '문'을 응용한 마법 장치였다.
"안녕하세요. 아멜리아 부교수 님."
"보더 타운까지 왕복 티켓, 둘이요."
안경을 쓴 접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연구원 겸 포탈 관리 접수원을 담당하는 그녀는 상당히 어린 마녀다.
마녀에게 있어 어리다는 표현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낙인을 물려받고 실제로 마녀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접수원의 태도는 황녀를 만난 평민처럼 깍듯했다.
인사를 끝낸 접수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시우를 본다.
"같이 가시는 건가요?"
"그래요."
사실 이례적이긴 하다.
보통 상위 타운에 사는 마녀 중에 보더타운까지 직접 행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보통은 시우 혼자 운임을 내고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연구동에만 박혀 지낸다는 아멜리아가 동행하는 것이다.
"문제 있어요?"
"아...! 아닙니다! 운임은 인당 2파운드입니다."
역시 아멜리아.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만으로 다른 마녀를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다니.
아멜리아는 손을 뻗어 접수원에 손에 짤랑이는 금화 네 개를 올려주었다.
"네 번째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아멜리아, 시우만이 꾸벅 인사를 하고 따라 내려갔다.
이 포탈이라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구조다.
와인창고로 내려가는 길목처럼 생긴 돌계단은 지하를 향해 뻗어 있고 절반쯤 내려가다 보면 물이 찰랑이고 있다.
물론 일반적인 물은 아니고 아주 옅게 희석된 마력수이기 때문에 발광 플랑크톤이라도 사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들어가서 숨을 쉬는 것에도 지장이 없고 옷이 젖지도 않는 신기한 물이다.
이미 머리까지 푹 잠겨있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V자로 놓인 계단처럼 내려가면 거의 즉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이 보더 타운과 연결된 포탈이 된다.
약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시우는 보더 타운에 발을 내디뎠다.
3.
아멜리아는 포탈 멀미로 헛구역질하는 시우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겨우 세 번 정도밖에 안 타봐서인지 도저히 이 감각이 적응되질 않는다.
"관리인, 차라리 토하고 오세요."
"아,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멜리아는 옷 위에서 데구르르 구르는 마력수 방울을 팡 털어내고는 계단을 마저 올랐다.
그나마 구색이라도 갖췄던 아카데미의 플랫폼에 비하면 보더 타운의 플랫폼은 그야말로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와....."
반쯤 무너진 신전처럼 생긴 플랫폼을 나오자마자 시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항구를 접한 협곡이 계단식으로 깎여있는 보더 타운.
이끼가 가득한 절벽이 거대한 층을 이루며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스모그와 바다 안개로 가득한 대기가 햇볕을 가리기에 보더 타운의 날씨는 항상 흐림 또는 이슬비.
시우가 그토록 싫어하는 작업용 우의도 이곳에선 필수품이다.
포탈 플랫폼이 위치한 장소는 보더 타운에서 가장 고지였기에 시우는 모든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말발굽 형태를 이루며 항구를 감싸는 절벽과 그 위에서 건물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장관이지만 가장 시우를 압도하는 것은 바다 위로 직경 2km에 달는 거대한 원.
다른 이름으로 '문'.
그 안에서는 크고 작은 밀수꾼들의 선박이 물자를 옮기고 있었다.
어떤 배에는 현대에서 공수해온 물품들이 있을 것이고, 어떤 배에는 시우처럼 잡혀 온 노예가.
또 어떤 배에는 타운의 시민들에게 보급될 각종 식자재가 실려 있을 것이다.
게헨나에서 생산되는 작물만으로는 자급자족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더(border) 타운의 의미는 '경계'.
이면세계인 게헨나와 현대를 이어주는 타운이었다.
"그런데 부교수 님, 오늘은 어떤 물건을 사러 오신 겁니까?"
저 멀리 항구에서 개미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우가 물었다.
"담배, 그리고 향수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고작 그 정도라면 시우 혼자 보내는 것도 충분했을 텐데.
이거 진짜 데이트랍시고 데려온 건 아니겠지.
"푸른 뱀 접선소로 가야 하니 따라오세요."
"넵."
아멜리아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시우는 챙겨왔던 커다란 우산을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물론 알콩달콩한 커플이 오손도손 우산을 같이 쓰는 모양새는 아니다.
시우는 비를 죄다 맞으며 오로지 아멜리아에게만 받쳐 들어야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부교수님."
그녀라면 굳이 절벽에 난 길을 따라 빙빙 돌아갈 필요가 없다.
마법을 사용해 뛰어내려 항구 한 가운데 착륙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먼저 가시면 제가 곧 뛰어서 따라가겠습니다."
사실 이 무서운 아가씨를 한시라도 떼어놓고 싶었기에 한 제안이다.
어려운 말은 아니었을 텐데 아멜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또 뭔가 실수했나 싶어 재빨리 덧붙였다.
"모처럼 입으신 고운 드레스가 빗물에 젖지 않습니까?"
"........"
그런데도 아멜리아는 알듯말듯 한 표정만을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던 것은 햇수로 5년이 넘었는데 저런 얼굴을 보는 건 또 처음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훑는 가운데 아멜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죄송합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죄송해졌다.
"자꾸 토 달지 마세요. 짜증 나니까."
"넵."
시우는 입을 꾹 다물고 아멜리아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그녀의 뒤를 따라걸었다.
고지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중간 층계 정도로 내려오자 제법 인적이 생긴다.
우의 대신 거적때기를 쓰고 다니는 험상궂은 근육남.
AK소총만 들고 있으면 당장 해적이라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인상의 비쩍 마른 청년.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노파.
사람들이 햇볕을 못 받고 살아서 그런지 죄다 우중충하고 음흉하게 생겼다.
사실 디스토피아 판타지라는 단어와 꼭 들어맞는 보더 타운을 노예의 몸으로 거니는 것은 좀 겁이 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우 혼자 왔을 때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용무만을 끝내고 돌아왔다.
이것저것 돌아볼 틈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우리의 아멜리아 메리골드 교수가 등불처럼 지나가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외면하니 이토록 든든한 보디가드가 따로 없다 .
"관리인."
아멜리아의 스산한 목소리에 앞을 돌아본 시우는 식겁했다.
잠깐 주위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이 아멜리아의 정수리로 뚝뚝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이번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긴장하던 시우.
"우산 똑바로 들어요."
다행히 오늘의 아멜리아는 묘하게 관대했다.
마법으로 물기를 증발시킨 그녀는 군소리 없이 넘어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