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
"흐음...."
쌍둥이와 시우는 상자에 마법진 초안을 펼쳐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사실 오딜과 오데트는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마법에 대해 상의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70%가량의 마법진이 완성됐고 새로운 '문'을 열기까지 1년 정도가 남았다고 자백했을 때도 무지한 초심자의 착각일 것으로 생각했다.
엉망일 게 분명한 시우의 초안을 보고 적당한 조언을 던져준 뒤, 이걸 빌미로 타로 타운으로 끌어들여 여러 가지 일을 해볼 생각이었는데.
"조수님, 왜 이렇게 되는 건가요? 뭔가 구불구불 이상하게 생긴 그림이 있는데."
"전개부를 지나고 변화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효 마력값의 범위를 계산하는 겁니다."
"어떻게요?"
"숫자를 일차원 위에 놓인 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어요. 회전각에 따라 값이 아닌 위상이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하~"
시우는 펜을 들어 종이에 쓱쓱 간단한 그림을 그려주었다.
오데트에게 설명하는 시우의 수식 계산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생각에 잠긴 오딜.
그는 오딜의 마법에 맞서 디스펠 핀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영역'의 일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마법을 배운 적이 없는 일개 노예가 대규모 마법진을, 그것도 자신만의 체계에 맞춰 구축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는 왜 룬 문자를 직렬로 전개한 거예요? 브릿지 형태로 두는 게 노이즈 정류에 좋지 않을까요?"
"브릿지 형태를 취하면 출력이 절반으로 줄어버려서요. 이곳에선 한계까지 마력 효율을 높여야 안정성이 늘어나요. 왜 느리게 던진 종이비행기는 휘청휘청 날잖아요?"
무슨 질문을 해도 막힘 없이 답변이 나온다.
그것도 꽤 그럴듯한 비유와 함께.
"이 부분은 조금 이상하지 않아? 마력 저항을 잘못 선정한 것 같은데?"
"아 그 부분은 무시하셔도 괜찮습니다. 일부러 저항값을 낮춰서 마법이 실패했을 때 마력의 역류를 방지하는 그라운드에요."
"그런 게 된다고?"
게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법을 사용해 마법을 완성하고 있다.
그의 마법은 말도 안 되게 엉뚱한 방법으로 세워진 건축물 같았다.
꿈 많은 어린아이들이 그린 건물을 온갖 듣도보도 못한 기술을 이용해 실제로 건축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문제가 아주 없진 않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연성부야. 독자적이긴 하지만 너무 위험이 커."
"게다가 변수부가 확정되지 않은 이상 시우 조수님이 통제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요."
"그런가요?"
그래도 명색이 견습 마녀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부터 마법을 공부해온 쌍둥이 눈엔 시우의 마법이 지닌 문제점이 슬슬 보였다.
"자, 이거 봐. 예를 들어 여기는 마력부하 값을 11.26으로 예정했잖아? 이럼 마력 출력이 0.33로 변환되니까..."
그렇게 세 사람은 해가 질 무렵까지 열띤 토론을 펼쳤다.
2.
시우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쌍둥이는 다행히도 시우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말로는 아멜리아에게 알리겠다느니 협박하겠다느니 엄포를 놔도 정작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달까.
오히려 다음 날에도 찾아와 시우가 곤란을 겪고 있던 부분을 열심히 도와주기까지 했다.
"오늘도 끝!"
시우는 도서관에 널브러져 있던 마지막 책을 정리하고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내일이면 또 타로 타운에 가야 한다.
오딜과 오데트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정신줄을 놓는다면 꽤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본 게임인 섹스는 무리여도 그 정도 급의 여자들과 한 침대에서 뒹굴 수 있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이번에는 가슴이라도 보여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음흉한 망상을 즐기다 살짝 자괴감이 돌 무렵.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기에 시우는 옷차림을 단정하게 했다.
괜한 잔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시우는 발소리만 듣고도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인."
흉포 그 자체, 사람 뜯어먹는 사슴 아멜리아다.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올리며 시우의 앞에 섰다.
향긋하고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오늘 아멜리아의 코디는 곧은 쇄골과 둥근 어깨선이 드러나는 물색의 드레스였다.
하얀 목덜미가 두드러지면서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가슴골도 슬쩍 보여서 눈 둘 곳을 모르겠다.
"무슨 일이신가요?"
시우는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찔리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멜리아의 당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보더 타운'에 갈 생각인데. 동행이 필요해요."
"짐꾼인가요?"
"그래요."
이런 아멜리아가 날 좋아한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아멜리아의 얼굴을 봐서는 도저히 타카쇼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정말 아멜리아가 이쪽에 호감이 있다면 적어도 오데트만큼이라도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오전 중에 갈 생각이니 제 연구동으로 9시까지 오세요."
"알겠습니다."
문득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타카쇼의 말대로 아멜리아의 호의가 정말이라면 이 정도의 말은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근데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의 왼쪽 눈썹이 꿈틀 위로 올라갔다.
참고로 저건 의아함을 표출하는 아멜리아의 바디 사인이다.
"이 말씀을 전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연구동과 대도서관은 꽤 거리가 있다.
단둘이 만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게 아니냐는, 본인이 걸리는 게 없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슬쩍 떠보는 질문이었다.
"용무가 있으시면 사람을 보내주시죠.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부교수께서 번거롭게 걸음 옮기실 필요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아멜리아를 존중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며 뒷수슴도 가능하고 말이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결정해요. 관리인은 앞가림이나 잘하세요."
아멜리아는 아무런 내색 없이 답했다.
켕기는 건 일절 없다는 모습이다.
그 와중에 말뽄새 보소.
"아, 그리고 하나 주의시킬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최근 견습마녀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으시나요?"
갑작스러운 아멜리아의 질문에 시우는 흠칫 놀랐다.
최대한 놀란 기색을 숨기며 머리를 굴린다.
최근 오데트와 오딜이 숙소로 들어오기도 했고, 별개로 복도에서 마주칠 때 작은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적인 대화라 하심은...?"
"노예와 마녀 관계에서 필요 이상의 대화를 주고받은 적 없냐는 말이에요."
필요 이상의 대화야 이미 주고받고 있다.
마법진에 대해서 서로 토론도 하고 심지어 나흘 전에는 입싸도 해주었다.
설마 들킨 건가?
어디서 모습을 보인 거지?
역시 아카데미 안에서 만나는 것은 너무 위험했나?
"아닙니다."
일단 부정했다.
아멜리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쌍둥이와의 일탈이 공개되는 순간 시우는 파멸이다.
아멜리아는 유심이 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난감했다.
아멜리아의 새파란 눈이 지그시 얼굴을 바라보자 마음이 훤히 읽히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관리인은..."
잠깐 말을 망설인 아멜리아.
"마녀를 싫어하던 게 아니었나요?"
아멜리아는 얼음 동상이라는 별명답게 말투도 표정도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시우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꺼낸 말은 약간의 망설임을 동반했다는 것.
"그렇진... 않습니다."
당연히 싫어한다.
마법에 정신 나간 미친년들을 어떻게 좋아하라고.
"그런가요."
"네."
"......"
"......"
이 어색한 분위기, 침묵.
아멜리아가 뭘 알고 있는지,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 조금도 감이 잡히는 것이 없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마저 정리를 끝내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평소 용건 위주로만 딱딱 잘라 말하던 아멜리아가 왜 이런 침묵을 감내하며 앞에 서 있는지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기다려요."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를 아멜리아가 붙잡았다.
"네."
"....그..."
그 단호하고 똑 부러진 아멜리아가 말을 끌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징조라는데, 죽을병이라도 걸린 걸까?
"그...?"
아멜리아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은 성질 급한 한국인에게는 정신건강에 해로웠다.
"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일 약속 시간에 늦는다면 또 연구동 청소를 시킬 테니 그리 아세요."
언제 그랬냐는 듯 찬바람 쌩쌩 부는 모습으로 아멜리아는 사라졌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야."
시우는 멍하니 쾅 닫힌 대도서관의 문을 바라보았다.
3.
회랑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아멜리아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아멜리아 어때? 데이트 신청은 성공했어?"
"아베느가, 데이트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밝고 화려한 자색의 머리칼, 검은 눈동자.
앳된 기색이 역력한 아멜리아와는 다르게 완숙한 여성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가슴까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수석교수 '소피아 아베느가'는 붙임성 없는 아멜리아가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어디까지나 소피아의 주장이긴 했지만.
"아멜리아, 내가 하나 알려줄까? 넌 기분 나쁠 때면 날 마녀명으로 불러."
"잘못된 통계겠죠."
"특히 정곡을 찔리면 더 그래."
"정곡 찔린 적 없어요, 소피아 교수."
아멜리아는 들러붙는 소피아가 귀찮다는 듯 휙 그녀를 지나쳐갔다.
"이번엔 뭐라고 꼬셨어? 설마 저번처럼 약속 시각을 꼬투리 잡아서 혼자 있는 연구동으로 불러내기라도 한 거야?"
아멜리아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솔직히 그거 너무 깼어'라고 깔깔거리는 소피아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데이트가 아니었어요. 꼬신 건 더욱 아니었고요. 노예에게 올바른 처세에 대해 가르쳤을 뿐이죠. 대답이 됐나요?"
"아무럼요~ 부교수님."
아멜리아는 질척거리는 소피아에게 벗어나기 위해 더욱 빠르게 걸었지만 애초에 보폭이 다르다.
소피아에 비하면 조그마한 아멜리아가 아무리 아장아장 걸어봤자 몇 걸음이면 따라잡혔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괴롭힐 거야? 너희 아직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지?"
"노예와 마녀 간에 '대화'라니. 이름값 못하는 천박한 마녀답군요. 밤마다 노예를 침소에 불러 뒹굴다 보면 그런 분별도 사라지나요?"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아멜리아의 독설었지만 소피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 쓴소리에 꼬리를 말 위인이었으면 그녀의 곁에 친구로 남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5년은 그저 그런 짧은 시간이지만 노예에겐 아니야. 네가 자꾸 뭉그적거리고 괴롭히기만 하니까 시우 씨도 널 싫어하잖아."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높아진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소피아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친구로 지낸 지 60년이 넘었는데 어쩜 이리 아직도 아이 같은지.
아멜리아는 솔직하지 못한 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자꾸 그러면 내가 뺏는다?"
"그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
"내일 보더 타운 가는 거면 그쪽에 있는 내 별장 빌려줄까?"
"필요 없습니다."
"아멜리아는 어른스러운 속옷도 없지? 레이스 장식이 달린 검은 속옷은 숙녀의 필수 소양인데."
"그런 저속한 소양 만들지 마세요."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아멜리아와 그 뒤를 쫓는 소피아.
둘의 만담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시우는 몰랐지만 아멜리아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소피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