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1.
발을 맞춰 걷던 중 힐끗 오딜의 옆얼굴을 보았다.
시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키.
그런데도 머리가 워낙 조막만해서인지 멀리서 봤을 때는 키가 작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매일 같이 향유로 감은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한 체취가 풀풀 풍겼고, 자수정의 빛을 닮은 영롱한 눈동자는 요정같이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다.
건강한 복숭앗빛 홍조에 적당히 두툼한 입술과 걸음걸이에조차 묻어나오는 빼어난 기품.
마치 로코코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오는 공주님 같았다.
만약 시우가 현대에 살고 있고 오딜의 정체를 몰랐더라면 이렇게 함께 걷는 것만으로 황송한 기쁨에 젖었을 것이다.
그래, 오딜이 마녀가 아니었더라면.
"오딜 님."
"왜? 신시우 조수님."
"조금 전에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못된 사기꾼에게 두 번 다시 넘어갈 일 없게 됐어요."
타로 타운을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오딜이 멈춰 선 채로 눈을 마주쳤다.
시우는 황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무서운 건 둘째치고 아멜리아처럼 직시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눈만 마주쳐도 괜히 머쓱했다.
"마음에 두지 마! 대신 이렇게 근사한 에스코트를 받게 됐잖아."
"하..하하..."
오딜은 한 눈으로 봐도 어딘가 들떠 있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기분 좋을 때는 어떤 부탁도 쉽게 수락하기 마련이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내면 보내줄지도 모른다.
"그 에스코트에 관해서 말씀을 하나 올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관대히 허락할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타로타운의 지리에는 썩 밝지 않아서요. 더 적합한 사람을 고르시는 게 오딜 님의 편의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좀 보내주고, 라는 뒷말은 삼켰다.
대신 최대한 오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정중한 모양새로 고개를 조렸다.
"그래서?"
한참을 즐겁게 떠들어대던 오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너무 서둘렀나?
"아, 음... 대신 근처에 적당한 주점을 알고 있는데 어떠십니까? 산책도 좋지만 한적한 술집을 들르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특히나 저처럼 애매한 길잡이가 함께하면. 하, 하하하하....!"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도망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오딜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된 이상 대화를 통해 그녀의 함구를 부탁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술집, 그래. 술집 좋네! 당장 안내하도록 해!"
다행히도 오딜은 폴짝 뛰며 기뻐했다.
시우는 아까 보아두었던 흰고래 주점으로 오딜을 안내했다.
2.
흰고래 주점.
시우도 타카쇼를 따라 두어 번 정도 온 적이 있는 타로타운에서 가장 커다란 주점이었다.
"부어부어!"
"이번 판은 내가 다 가져가겠네, 미안하구먼."
"네네, 갑니다!"
"주인장 여기 맥주 두 잔 더 주쇼!"
능숙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
내기하듯 정신없이 맥주를 들이켜는 털복숭이 아저씨.
파이프에서 연기를 뻐끔거리며 카드 게임에 집중 중인 술꾼들.
테이블을 바쁘게 오가며 음식을 나르는 꼬마 종업원.
팔씨름을 하는 건장한 청년들도 보였다.
참 활기차고 좋은 절로 흥이 나는 모습이었지만...
오딜과 시우가 발을 들여놓자마자 삼사십 명이 왁자지껄 떠들던 술집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허름한 술집에 들어온 오딜의 존재는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모두가 우뚝 멈춰버린 가운데 모자를 벗고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가게 주인.
"아이고~ 마녀 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가게는 위생 기준을 준수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 있습니다요."
가게 주인은 한눈에 오딜이 마녀임을 알아차렸다.
하긴 잘 지어진 연립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마녀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지.
"아아, 괜찮아. 혼낼 게 있어서 온 건 아니야."
"예? 그럼 어쩐 일로..."
오딜은 소매안에 안에 손을 넣었다.
번쩍거리는 금화 세 개가 오딜의 앙증맞은 손 위에서 반짝였다.
그 어떤 인간도 매혹시키는 영롱한 금빛에 주인은 입을 떡 벌렸다.
"여기 가져."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하루 가게를 빌리고 싶어. 5분 안에 모두를 내보내 줘. 1시간 정도만 있다가 갈 테니까."
페니가 12개 모이면 실링, 실링이 20개가 모이면 그제야 금화 하나가 된다.
즉, 오딜이 지불한 대여비는 시우가 3년 동안 꼬박 모아야 하는 거금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인장은 손수 손님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쫓아 보냈다.
손님들은 궁시렁거리면서도 난동을 부리지 않고 나갔다.
마녀가 쫓아내는데 나가야지.
"너무 섭섭해 마, 이따 저녁에 오면 술을 공짜로 줄 테니까."
그제야 조금 밝은 얼굴로 나가기 시작하는 손님들.
가게 주인 입장에선 거금이 생기니 좋고, 단골손님들은 잠깐만 기다렸다 오면 공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좋다.
"이제 조용해졌네."
오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장 좋아 보이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것이 부자의 돈 지랄인가.
고작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우가 만져본 적도 없는 금화를 3개나 사용하다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최고의 안주를 내오겠습니다.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가게 주인은 맥주 두 잔을 내려놓더니 손을 싹싹 비비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 가게에서 팔고 있는 술은 오직 맥주뿐이지만 마법으로 차게 식혀진 맥주는 시우가 마셔본 것 중 최고였다.
그럴 수밖에.
게헨나의 시민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같은 업종에만 종사한다.
갑자기 맥이 끊기는 경우도 없고 이 좁은 세상에서 다른 소일거리도 딱히 없기에 건실히 살아가는 시민 대다수가 한 분야의 장인이었다.
그 결과 이 맥주 한 잔에도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축적된 노하우의 주조술의 정수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게 서민들이 마시는 술이란 말이지? 예전부터 궁금했어."
오딜은 제 얼굴보다 큰 맥주잔을 우아하게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시 잔을 내려놓았을 때는 신선한 거품이 수염처럼 입가에 묻어 있었다.
오딜은 그것도 모른 채 눈을 굴리며 맥주의 맛을 평가한다.
"쌉싸름해, 써. 묵직한 맛은 좋지만 그래도 고급스러운 내 입맛에는 못 미치네."
오딜은 흐붸에에 소리를 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입에 썩 맞아 보이진 않는다.
"뭐해? 너도 마셔."
"그 전에 마녀 님, 여기에 거품 묻었습니다."
한껏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표정으로 맛을 평가하는 오딜에겐 여전히 거품 수염이 붙어있었다.
평범한 술자리였으면 자연스럽게 입을 닦아주며 작업을 걸었을 만한 그림이다.
오딜은 손으로 거품을 닦더니 흠칫 굳었다.
"나, 나도 알고 있었거든? 아까 술꾼이 이렇게 마시길래 따라 마셔본 것뿐이야. 그렇게 마셔야 더 맛있을지 검증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잖아?"
오딜은 래퍼처럼 따다다다 말을 뱉고는 휙 팔짱을 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럼 고럼."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는 오딜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에 시우는 허벅지 살을 꼬집으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견습마녀라지만 이런 모습은 영락없이 애다.
머리가 찡 떨릴 정도로 차가운 맛.
구수한 보리의 향과 혀끝을 간질이는 탄산이 메말랐던 몸 전체에 스며 들어간다.
시우는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달다.
"그렇게 맛있어? 우리 저택에 있는 포도주라도 마시면 기절하겠는걸? 1년 내내 햇볕이 바른 멘델 구릉 포도로 담거든."
"기회가 되면 꼭 맛보고 싶네요."
"나중에 꼭 가져다줄게."
시우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사실 조금 전부터 느낀 건데 몇 마디 대화가 오가자마자 확실해졌다.
"저기, 오딜 님."
"응, 귀 기울여 듣고 있어."
"타로 타운에 오신 건 처음이신 건가요?"
"응!"
오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유달리 주변을 둘러본다 싶더니.
"스승님은 엄하시거든. 그렇게 타로 타운에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도 허락을 안 해주시지 뭐야?
낙인을 계승 받기 전까지는 다른 유희에 눈 돌리지 말고 기반을 닦는 데 열중하라나. 그래서 아르스 마그나 타운이랑 레노먼드 타운 밖으로는 나와본 적 없어."
오딜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리따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정확한 나이를 콕 찝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아직 앳된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자면 대충 스무 살 정도이리라.
"그럼 오늘은요?"
"오딜의 대 일탈이지. 스승님이 좋으신 분이긴 해도 답답한 구석이 있으셔. 매일같이 마법만 공부하는 게 얼마나 지루한데!"
한참 호기심 왕성할 나이에 갑갑한 새장 속에서 공부와 씨름했어야 할 오딜을 생각하니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허름한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만으로 이렇게 신나 보이는데 까짓거 좀 나가서 놀게 해주지.
"아무튼 조수님이 걱정하는 건 알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비밀로 해달라는 거지?"
"아, 네. 그렇습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 없어. 나도 그렇게 잔인한 사람은 아니야."
오델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천사다, 천사.
수업 외에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예상외로 말이 정말 잘 통하는 마녀였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꼰대교수 아멜리아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이 없다.
"안주 나왔습니다."
"어! 여기 놔줘!"
주인장은 테이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안주를 가득 차려놓았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햄과 무화과 절임, 건포도와 생강이 들어간 밀빵과 소금과 후추 그리고 올리브유를 뿌린 무화과까지.
오딜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안주를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흥~ 흐으응~ 흐으음~"
어찌나 기분 좋은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접시에 더는 오딜.
그녀는 손수 시우의 접시에도 큼지막한 햄을 썰어주었다.
"움움! 조수님도 먹어 먹어!"
"감사합니다."
통째로 구운 햄이다.
언제나 콩으로만 단백질 보충을 하던 중 몇 개월 만에 영접하는 노르스름한 햄은 침샘을 폭발시켰다.
정신없이 음식을 탐하던 도중 문득 오딜이 질문했다.
"그런데 마법을 걸리면 왜 안 되는 거야?"
"노예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괘씸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비록 힘을 조금만 사용했다지만 내 결계를 파훼한 솜씨인데? 다들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까? 고작 노예인데도 이렇게 마법을 열심히 공부했다니! 이러면서."
역시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딜 님 같이 마음씨가 넓은 마녀님이 아니라면 마법을 파훼한 순간 더 거대한 마법으로 목을 날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맞아 맞아, 내가 이해심이 깊긴 해. 혹시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솔직하게 말해봐."
"네! 사실은 이 빌어먹을 게헨나에서 탈출하기 위해 공간 술식을 연구 중이었어요. 보더 타운의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을 말이죠."
"우와!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거야? '문'을 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지금으로선 저도 무립니다. 그래도 2년, 아니 1년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서적들을 뒤져가면서 70% 정도 이론을 정립했거든요."
"서적?"
"네, 제 업무 중에 서고 정리가 있는데 그곳에 좋은 기초 서적....어?"
열심히 햄을 뜯어 먹던 시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햄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오딜을 바라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결코 꺼내면 안 됐을 말은 자백제라도 투여받은 것처럼 술술 불고 말았다.
게다가 지금은 분명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생각한 속마음이 고스란히 입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어떻게 이런 게 일이...?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자성(自成) 마법?"
"응, 정답이야. 조수님."
친근하게만 느껴졌던 오딜의 표정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 그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이다.
잠깐이라도 그녀를 딱하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만큼.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어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딜.
"아항~ 그런 시우 조수님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좆됐네."
"응, 우리 조수님 좆됐어."
오딜은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