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화 (1/917)

#001

1.

가을비는 차가웠다.

피부에 튕겨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소금기가 찌든 청색의 작업복에 눌러 붙는 한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다.

“더럽게 무겁네. 시발.”

배수구에 막힌 진흙더미를 조악한 삽으로 퍼내던 신시우는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체제를 거역할 용기도 힘도 없는 자는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나마 보이지 않는 반항을 할 뿐이다.

비를 머금고 등을 짓누르는 우의에서는 복무당시 판초우의에서나 맡았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낙엽과 혼연일체가 되어 배수로를 틀어막던 진흙 덩어리를 퍼내자 고여 있던 물이 빠져 나갔다. 직선거리로 20M가 넘는 거대한 배수로에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마법 서고에서 흐르는 빗물이 모조리 모인다.

그 덕에 한바탕 진흙탕에서 뒹군 몰골이 되었다.

삽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자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오전 작업이 이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이후에는 오후 두 시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마른 빵을 씹어 먹으며 두 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해야 하는 시우에게는 단비같은 낮잠이었다.

우선 이 개 같은 우의먼저 어떻게 하자라고 생각한 시우는 배수로에서 기어 나왔다.

발이 보였다.

예쁘고 작은 발.

“관리인. 조금 깔끔하게 작업할 수는 없나요?”

관리인.

이 아카데미의 생도, 교수, 혹은 연구원들은 모두 시우를 관리인이라고 불렀다.

성이나 이름 따위를 붙이지도 않은 적당한 호칭이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굉장히 인도적인 처사이다.

축생이나 다름없는 중앙 시청 소속의 노예에게 무려 존칭이라니!

어느 기관에 배치되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노예의 호칭은 ‘야’, ‘이봐’, ‘거기’, ‘노예야’ 등이 일반적이니 말이다.

“예예,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한 뒤 간신히 허리 높이의 배수로를 기어 올라가자 불결하다는 듯이 여자 측에서 살짝 물러선다.

이제 와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반응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남성의 체액과 마력의 상호관계에 대한 수업이 있어요. 12시까지 환복한 뒤 제 2교사 앞에서 대기하세요.”

노예 생활도 5년을 하다보면 눈치가 빨라지는 법이다. 사실 부교수인 그녀가 몸소 이 더러운 곳까지 행차했을 때 시우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기 마련이다.

“씻고 옷만 갈아입어도 정오일 텐데...”

“그래서요?”

시우는 억울한 눈빛으로 부교수를 바라보았다.

탐스러운 금발은 머리끈으로 묶여 정갈하고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고혹적인 기색을 풍기는 입술은 못마땅한듯 다물려있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 짜증이 난 표정이지만 시우는 알고 있었다.

푸른 사파이아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기학의 희열이 스며들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설마 불만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죠?”

힘겨운 노동이 끝나자마자 복장을 뒤집어 놓는 ‘아멜리아 메리골드’ 부교수는 시우를 갈구는 것에 환장한 마녀였다.

여기서 착각해선 안 될 사실 한 가지.

아멜리아를 마녀라고 칭한 것은 그녀가 유달리 히스테릭하고 개차반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 갓 스무 살이 된 아리따운 아가씨가 문자 그대로 ‘마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대 ‘메리골드’로부터 마녀의 낙인을 물려받고 수십 년을 살아 온 진짜 마녀 말이다.

“아닙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시우는 황급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이 도시에서 마녀란 특별계층이다.

시우같은 노예는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도 아무도 논란삼지 않을 만큼 말이다.

“잠시만요.”

우산 아래 긴 속눈썹을 치켜뜬 아멜리아가 시우를 불러 세운다.

고혹적인 분위기,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은 완벽한 비율과 미의 극치.

저 인형 같은 모습만 같아서는 도저히 흉악한 마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잠깐 뜸을 들인 아멜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도 생각이 바뀐 것 없나요? 5년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충분한 시간일 텐데요.”

평상시와 같이 사무적인 목소리를 가장하지만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은근한 유혹의 손짓이기도 했다.

시우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그녀의 말 뒤편에 숨어있던 함의를 느릿하게 알아챈 탓이다.

그 순간 시우는 남아있어서는 안될 감정의 파편을 느꼈다.

바로 자존심과 오기였다.

“일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우는 진흙의 산에 박혀있던 삽을 거칠게 빼들고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은 장대비 속에서 아멜리아의 눈가가 다시 좁아졌다.

2.

“개 같은 년.”

오랜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기껏 작업한 결과물을 보고 쓸데없는 군소리를 늘어놓을 때도 잠잠했던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스레 뛰고 있었다.

어쩐지 이제껏 집요하게 괴롭히더라니 아멜리아는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마녀란 족속들은 죄다 저 모양이다.

불노불사의 신체와 더불어 마법이란 신비한 힘을 휘두르며 온갖 특권을 누리는 주제에 아주 사소한 일에 앙금을 품고 집요하게 복수한다.

시우는 마녀가 싫었다. 그 중에서도 아멜리아는 특히나!

누군가 엿 들을까 마음껏 욕설도 내뱉지 못하는 와중 투박한 손이 거칠게 그의 어깨에 얹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능글맞은 목소리.

“오우 형제, 왜 이렇게 죽상이야.”

“누가 니 형제야 쪽바리 새끼야.”

“오늘따라 입담도 거세군. 안 좋은 일이 있거든 털어놓으라고.”

온몸이 이렇게 더러운 판국에 거리낌 없이 어깨를 붙잡는 사람은 이 아카데미에 한명 밖에 없다. 홋카이도 출신의 일본인 미마야 타카쇼다.

“너 시발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홋카이도 남아(男兒)의 씩씩한 육조칠층탑은 아침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네.”

타카쇼는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요컨대 시우가 오전 내내 빗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타카쇼는 어떤 연구원이나 교수의 침대에서 뒹굴고 왔다는 말이다.

시우와 타카쇼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둘 다 지구에서 이 망할 마녀의 도시 ‘게헨나’로 잡혀왔고, 시청 소속의 노예이며, 같은 남성에, 나이마저 동갑인 28살이다.

한편 그런 둘의 차이점은 극명했다.

시우는 5년간 우직하고 비참한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반면 타카쇼는 아카데미 내의 몇몇 마녀들을 상대로 성상납을 하며 각종 편의를 보장받고 있다는 점이다.

시우의 얼굴이 또 다시 분노로 덧칠된다.

조금 전 아멜리아에게 느꼈던 깊은 빡침이 타카쇼를 보자 가중되고 있었다.

“넌 밸도 없냐? 우리가 이지경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한 침대에서 뒹굴고 싶어?”

“응, 나는 예전부터 기둥서방이 꿈이었어. 게다가 여기 있는 여자들 죄다 도내 최고 미소녀라고! 아줌마들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던 그때와 비교하면 이건 출세야 출세. 너도 고집 그만부리고 적당히 기어. 하잘 것 없는 자존심만 버려도 무릉도원이 된다니까?”

타카쇼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쓸데없이 산뜻한 새끼다.

마녀의 도시, 게헨나로 잡혀온 현대인은 모두 노예가 된다.

이때 노예의 직분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시청 소속의 노예인 ‘공동노예’, 다른 하나는 개인 소유의 ‘사노예’이다.

이런 분류 속에 그나마 인간다운 취급을 받는 공동노예는 제각기 하나씩 장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타카쇼처럼 반반한 얼굴을 지녔다던가, 아니면 시우처럼 특출난 능력을 지녀 공무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여겨졌거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확한 기준은 시우도 타카쇼도 잘 알지 못한다.

오직 명확한 사실은 타카쇼가 호스트바에서 일하던 경험을 살려 머나먼 타향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아멜리아 부교수가 너한테 관심 있잖아, 응? 하는 짓 보면 영락없이 사춘기 계집애라니까? 내가 은근히 말 꺼내줄 수 있어. 잘 구워삶아서 입신양명 해봐야지. 또 저런 깐깐한 여자가 한 번 녹이면 헌신적이야.”

착 달라붙어 귓속말을 하는 타카쇼를 쳐냈다.

“안 해, 시발.”

“바른 생활 청년 시우 군, 한국에선 자네의 태도를 고고한 선비의 자세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선 그걸 아집이라고 부른다네.”

“안 한다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덕져.”

“어허, 기분 좀 풀어주겠다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전직 호스트 출신답게 타카쇼는 아멜리아가 왜 유독 시우를 괴롭히는지 눈치를 채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시우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잊고 있었을 뿐, 아카데미에 처음 배속되었을 당시 아멜리아의 밤 시중을 거절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워낙에 세상 물정도 몰랐고 당황도 많이 했던 탓에 거절했는데...

아직까지 앙심을 품고 사람을 못살게 굴 줄이야. 그걸 알게 된 이상 오기가 생겨서라도 꼿꼿한 절개를 지킬 생각이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긍지라고 말해도 좋을까?

“나 바빠 길 막지 마.”

“또? 방금까지 작업하고 온 것 같은데. 선비는 힘들구만.”

위로해준답시고 옆에서 깐족거리는 꼴이 화가 나긴 해도 타카쇼는 좋은 친구다.

한결 풍족한 환경에 있는 타카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며 그게 아니라도 유일하게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2년간 군생활 같이한 군대 동기도 절친이 되는 마당에 5년간 노예 생활을 함께한 친구라면 말할 것도 없지.

“무슨 일인데. 조수?”

“말이 조수지. 시발...”

학을 떼는 시우와 달리 타카쇼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수업인가?”

“그래, 그 수업.”

어깨를 늘어뜨리고 낙담하는 시우와 달리 타카쇼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해해? 난 좋던데.”

“너 같은 놈이야 좋아하겠지.”

“새롭고 파릇파릇한 견습 마녀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내 삶에 위안이 되는지 넌 모를 거야.”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견습 마녀는 건들면 모가지인거 알지?”

그런 짓을 했다간 아무런 비유도 없이 목이 날아가 버린다.

이미 육림에 파묻혀 사는 주제에 금기에까지 손을 뻗으려 하는 것은 아니겠지.

반쯤 질겁한 시우의 모습에 타카쇼는 호탕하게 웃고는 답했다.

“꽃은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질 때도 있는 법이야.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내가 대신 가면 안 되나?”

“나도 진심으로 그러고 싶은데. 아멜리아 부교수의 호출이라 별 수 없어.”

“너도 사서 고생이구나.”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타카쇼.

태생부터 여자에 미친놈인 그의 입장에서는 배부른 투정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극히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지닌 시우에게는 그 어떤 노역보다 고된 시간이었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도록하지. 너도 바빠 보이고. 이따 보자고.”

타카쇼는 등을 툭 쳐 시우의 기운을 복돋아주고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 다른 지명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도 빠듯해 보였다. 아멜리아 부교수가 지시한 시간을 멋대로 어겼다간 어떤 트집을 잡혀 잔소리를 얻어먹을지 알 수 없다.

재빨리 실험복으로 환복한 이후 약속 장소에서 5분 전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한숨만 길게 흘러 나왔다.

“좆 같은 도시.”

이거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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