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87화 (68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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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아무 말이 없어진 나와 아키.

아키야 내가 뭔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거고 나는…. 고민 중이다.

조건 없는 소원 한 개.

어떻게 보면 무적의 치트키 같아 보이지만 둔하디둔한 나도 이젠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안다.

이런 거로 아키 보고 옷을 벗으라고 한다던가 나랑 섹스하자는 소리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대화하다 보니 이제 쪼오오오오금 알 거 같다.

이야. 나도 정말 많이 컸구나?

"아키야."

내가 부르자 담담한 표정의 아키는 나를 슬쩍 바라본다.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담겨있는 표정.

세상 여자가 아키만큼 알기 쉽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나는 니가 좋다."

내가 소원을 말할 줄 알았던 아키는 뜬금없는 내 고백에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 됐다.

"소…. 소원을 말하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소원은 소원이고.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한 건데?"

"무슨 고백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는 거야…."

허둥대는 모습이 역시 귀엽다. 역시 평소의 모습과 갭이 좀 있어야 귀여운 거 같아.

이게 그 갭모에인가 그건가? 역시 원조의 나라답네. 느낌이 달라.

"음. 신발장에 편지라도 넣은 다음에 방과 후에 학교 뒤뜰에서 고백했어야 했나?"

"장난치지 말고!"

"고백 같은 걸 장난스럽게 할 정도로 생각 없지는 않아."

"하지만…. 그쪽은…."

주저하면서 말을 삼키는 아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저 고지식한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표정과 말 흐리는 것만 들어도 얼추 알 수 있지.

"맞아. 나는 대놓고 여러 여자를 만나고 있지. 아주 당당하게. 쓰레기같이."

적나라한 내 말에 아키는 뭐 이런 남자가 있냐는 표정을 짓는다.

어차피 이미 말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경악스러운 건 어쩔 수 없겠지.

"민희 상도…. 당신이 이러고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역시 여자라 이건가? 나랑 민희 사이는 이미 파악했나 보네.

아니지. 민희라면 오히려 자기가 밝혔을지도?

"얼추 알고 있을걸? 민희는 눈치가 빠르니까."

"나는…. 나는 잘 이해를 못 하겠어.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문란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는데…."

"아. 이건 한국 사람인 거랑 상관없어. 그냥 내가 유별난 거지. 민희가 이해심이 많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 뿐인 거고."

"이게 이해심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소리를 빽 지르는 아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어이없다는 눈빛.

물론 그런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굳이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이건 너랑 나 사이의 일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내 마음을 밝혔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신경 안 써!"

"세상이 망하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신경 쓰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아냐. 너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세상이 망했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랑 만나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

"음…. 그건 그렇긴 해. 나는 지금 여러 여자를 만나고 있지만, 그 여자들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하면 가서 그 남자 놈을 죽여버릴 거니까."

"대체…. 당신이라는 사람은…."

"웃기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쓰레기 같은 놈이지."

"하아. 정말…. 당신은 나쁜 사람이 맞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나는 진짜 나쁜 놈이라니까? 나쁜 척 같은 건 안 해."

내가 말하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키.

"하아…. 내가 어쩌다가…."

그러면서 한탄하듯 중얼거린다.

뒷말은 삼켰지만, 더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거 같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꾹 닫는 아키.

생각이 많아지나? 본인도 혼란스럽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인 거 보면.

"혹시 기억하나? 내가 전에 말한 거?"

내가 말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여자.

"나는 니가 나에게 수줍어하면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지."

"하아…. 진짜."

"사실 아까 소원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소원으로 그걸 말할 생각이었거든? 근데 생각해보니 소원으로 그런 걸 말하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더라고. 그래서 솔직하게 말한 거야."

아무 말이 없는 아키. 하지만 나는 초조하거나 하진 않다.

아니 초조하기는커녕 평온 그 자체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니까.

"나는…."

한참을 고민하던 아키가 조용히 입을 연다.

뭔가를 결정한 듯한 모습.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나도 당신이 좋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하아…. 어쩔 수 없어. 그건 사실이니까."

아키의 말에 등줄기에서 짜릿한 느낌이 쭉 훑고 지나간다.

크. 이 감각. 이 기분.

섹스하고 사정할 때보다 더 좋은 거 같다.

머리가 쭈뼛쭈뼛하고 뇌세포가 팡팡 터지는 기분? 저절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얼굴 근육에 힘을 줘야 할 정도.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좋았던 기분에 찬물을 뿌리는 기분.

나는 궁금함에 그녀에게 물어본다.

"왜?"

"...하루카."

"하루카? 걔가 왜."

"나는 하루카의 마음을 알아. 그러니…. 나는 그 아이를 두고 먼저 도둑질할 수 없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도둑질? 뭔가 번역이 이상하게 됐나?

아마…. 새치기? 그런 뜻으로 말한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래. 당신이 만나는 다른 여자들. 그 사람들은 내가 신경 안 써. 나랑 마주칠 일도 없고. 민희 상은…. 모르겠어. 그 사람은 어른이니까 더 여유가 있어 보이니 알아서 하겠지."

잠시 말을 멈춘 아키. 천천히 단어를 고르는 듯한 모습.

"하지만…. 하루카는 달라. 나는 그 애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당신이 나와 좋은 관계가 되고 싶다면 하루카가 먼저야."

"신기하네. 언제 그 정도로 돈독해진 거야? 그렇게 그 애를 챙겨줘야 할 정도로?"

"당신도 알잖아? 하루카가 어떤 애인지. 그때 들었을 거 아냐. 당신을 먼저 안건 자기라고 똑똑하게 말하는 모습."

참 재미있는 관계다.

하루카와 아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챙기는 건지.

그 누구보다 강해 보이는 아키지만 오히려 하루카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하루카가 아키를 조종하고 있는 실세였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웃기건…. 아키의 말을 들은 나도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는 거다.

나도 괜히 아키에게 먼저 이러고 하루카에게 미움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으니까.

"그러니…. 여기 있어. 내가 하루카를 데려올게."

그리고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순간 이동해 버린다.

하…. 이게 뭐야? 갑자기 일이 이상해지는 느낌이네.

아까 대련할 때 아키에게 추적을 걸어놨기에 그녀를 떠올리자 시야와 소리가 전부 들렸다.

일 나갈 준비를 하는 하루카를 찾아간 아키는 무작정 그녀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뒤 게이트를 열었다.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자 눈앞에 게이트가 열려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하루카의 손을 잡고 넘어오는 아키.

"오빠? 아니…. 여기는 우리가 살았던 곳? 아키 상?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게이트를 닫는 아키. 어리둥절한 하루카. 뭐부터 해야 할지 약간 혼란스러워진 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너무 어이가 없다.

연애와 사랑에 서툰 남자와 여자 둘이 망한 세상에서 모여 어이없는 촌극을 펼치고 있는 듯한 모습.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 그럴듯한 말이나 번지르르한 말을 해줄 자신은 없다.

나는 그런 전문가가 아니잖아?

그저 맘에 드는 여자를 놓치지 않고 싶은 욕심 많은 쓰레기일 뿐이지.

그렇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미사여구나 수식어 같은 것도 없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사실만 포함해서.

"하루카."

"네?"

"사실 나는 방금 아키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어."

내 말에 희한한 표정이 되는 하루카.

갑자기 불려와서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은 듯한 표정.

"근데 아키한테 거절당했어. 하루카의 마음을 알기에 자기가 먼저 받아줄 수 없데. 그러더니 하루카 너를 데려오더라고."

내 말에 하루카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는 아키.

그리고 하루카는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더니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재밌어진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나도 실수한 게 맞더라고. 그래서 너한테 먼저 사과부터 하려고. 미안해. 하루카. 내가 순서를 틀렸어."

이제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 된 하루카. 그러더니 나를 보고 물어본다.

"그리고요?"

"좋아해. 하루카."

"저도 좋아요!"

그러더니 앉아있던 나에게 와락 안긴다.

상당히 가벼운 몸. 품에 쏙 들어오는 여자.

하루카는 정말 보는 사람이 즐거워질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

오죽하면 아키가 그런 하루카의 모습을 보고 시기나 질투를 하는 게 아니고 행복한 듯한 미소를 지을 정도.

그렇게 나에게 안겼던 하루카는 내 얼굴을 한 번 더 보더니 다시 와락 안긴다.

"아차!"

갑자기 이럴 게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내 품에서 몸을 빼더니 이번엔 그대로 아키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아키 상."

분명 나이도 아키가 두 살이나 많고 키도 큰 데다 더 강하기도 한 아키인데.

지금 하루카가 아키를 안고 있는 모습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맙다고 안아주는 어른스러운 하루카와 칭찬받고 기뻐하는 아이가 된 아키.

"그럼. 이제 아키 상 차례에요?"

바로 차례를 아키에게 돌려버리는 하루카.

그런 그녀의 말에 아키의 얼굴이 확 빨개진다.

"어!? 어어? 뭐…. 뭐가?"

"저 때문에 아직 말 못 했다면서요. 이제 저는 했으니 아키 상 차례죠."

그러면서 싱글싱글 웃는 하루카.

역시…. 무서운 여자애야. 쟤가 나보고 천사님 천사님 하던 것도 의심 한 번 해볼 만 하다니까.

어쨌든 하루카 덕분에 나도 지금 상황이 몹시 즐거워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하루카의 깔끔한 행동 덕분에 상황이 확 정리된 느낌.

웃고 있는 나와 하루카 덕분에 아키의 얼굴은 더 빨개진다.

이야…. 저러다 터지는 거 아냐? 괜찮은 거야?

"좋아해. 아키."

내가 쐐기를 박자 아키의 얼굴은 정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빨개졌다.

푹 숙인 얼굴을 차마 들지도 못하는 모습.

그러자 하루카가 아키의 곁에 가더니 손을 꼭 잡아준다.

"저도 했잖아요. 용기를 내요."

먼저 고백한 여자가 다음에 고백할 여자를 응원해주는 상황이라니….

진짜 현기증 나는 상황이네. 이게 바로 세상이 망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조…. 좋…."

이제는 아예 눈빛으로 응원하는 하루카.

그런 하루카의 얼굴을 힐끔 본 뒤 아예 눈을 질끈 감은 아키.

"좋…. 좋아해. 오빠."

아까의 짜릿함이 번개라면 지금의 짜릿함은 우레 폭풍 정도 될 거다.

내가 보고 싶어했던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고백. 거기에 오빠 소리까지.

크으으으. 세상은 살만해. 이렇게 원하는 것들이 다 이뤄지니 말이지.

"뭐 해요. 가서 안아줘야죠."

하루카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키에게 다가갔다.

아키는 흠칫하는 모습이지만 피하진 않는다. 다만 빨개진 얼굴은 어떻게 나아지질 않네.

이대로 안으면 정말 터지는 거 아냐?

내가 팔을 벌려서 안으니 몸을 내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안기는 아키.

아…. 잘때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어. 멍청한 새끼. 그랬으면 지금 훨씬 더 짜릿했을 텐데.

"나도요!"

그렇게 말하고 안고 있는 나와 아키에게 와락 달려드는 하루카.

졸지에 우리는 셋이서 안게 됐고 하루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는다.

잠시 그렇게 우리를 안고 있던 하루카. 갑자기 아쉽다는 듯 우는 소리를 냈다.

"힝..."

"왜? 무슨 일 있어?"

"이러고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식사 준비하러 가야 해요."

"아…. 그럼 그건 내 권한으로 니 순번을 바꾸는 거로…."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근데…. 그렇게 순번을 바꿔서 뭐하시려고요?"

하루카의 말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너희랑 섹스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껏 이렇게 훈훈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인간 이하의 행동이니까.

내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그정도로 멍청한 소리를 할 수는 없지.

"사실 나도….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아키 역시 슬쩍 발을 뺀다.

둘 다 그리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이는 모습.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키? 하루카랑 같이 방주로 돌아가."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 바로 게이트를 연다.

아무래도 아키 쟤는 지금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거 같아.

"조심히 들어가. 따라 들어가진 않을게."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 게이트로 쏙 들어가는 아키.

그리고 하루카는 갑자기 나에게 휙 오더니 내 뺨에 키스한다.

"다음에 봐요."

그리고 바로 게이트로 넘어갔다. 바로 닫히는 게이트.

그렇게 게이트가 닫히자 나는 진이 빠지는 느낌이 확 들었다.

이야. 힘들다. 이건 뭐…. 엄청 힘드네. 뭐가 이렇게 힘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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