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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리셋
"근데 기억 삭제를 당했다고? 뭐 기억나는 거 없나? 히어로 협회뿐만 아니라 크라켄 코퍼레이션이나 미라지 오션 컴퍼니, 호라이즌. 이런 거 들어본 적 없어?"
내 말에 다들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짓는다.
당연히 알 리 없지. 내가 어떻게 얻은 정보인데.
게다가 이들은 나를 만나기 직전의 기억에 멈춰있는 여자들이다.
다들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겠지.
"별 도움이 안 되네. 암튼 알았어. 당신들은…. 그래. 일단 여기서 머물러. 아니면 다른 데 갈 곳 있나? 그쪽 여자는 일본 사람이라고 했고, 거기는 한국 사람이고. 당신은?"
가인을 향해 물어보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홍콩이요."
"홍콩? 짱개는 아니네. 짱개였으면 바로 죽였을 텐데."
내 말에 가인의 표정에 미소가 어린다.
찐 홍콩 사람인 가인인 데다가 아빠가 반 중국파인 그녀는 짱개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할 수밖에 없지.
"당신 좋은 사람이군요."
"응? 대체 뭐가?"
"아니에요.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
"당신 말고 이쪽 일본 분에게."
"저요?"
레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저 여자는 저런 태도와 표정이 기본 패시브인가 보네.
하긴 잘나가는 호스티스였다고 했으니 남자들의 시선을 잡는 방법은 당연히 몸에 배었겠지.
"혹시 뇌제라는 사람을 아나요?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뇌제요? 절대 강자의 한 사람인 뇌제?"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글쎄요. 누군지는 알지만 직접 마주친 적은 없어서."
레나의 말에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가인.
"뇌제는 죽었는데."
그런 그녀는 내 말에 나를 휙 하고 돌아본다.
"죽었다고요?"
"어. 무명이라는 놈의 손에 죽었는데."
"네!? 말도 안 돼요. 무명씨랑 뇌제씨는 동료였는데…."
"어떤 관계인지는 나도 잘 몰라. 어쨌든 뇌제는 죽었어. 무명의 손에. 그리고 그 무명은 나한테 죽었고."
그 말을 들은 레나와 가인은 나를 바라본다.
살짝 놀란 표정의 레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가인.
"당신이 무명을 죽였다고요?"
"어. 그랬지. 잠깐만…. 당신 이름이 레나라고 했지? 설마 유혹의 마녀 레나?"
"어머. 당신 제 이름도 아나요?"
"당연하지. 어쩐지…. 나고야를 그렇게 뒤져도 없더라니. 이렇게 미국에 와있을 줄은."
"나고야를 왜 뒤졌죠? 나를 찾으려고?"
"물론이지."
"왜요?"
"죽이려고."
그 말을 들은 레나는 별로 표정 변화가 없다. 오히려 신영과 가인, 엠마가 약간 긴장한 표정이 됐을 뿐.
"저를 왜요?"
"딱히 너를 노린 건 아냐. 그냥 위협이 될 수 있는 강자들을 모두 정리할 생각이어서. 야쿠자의 왕이나 가면, 무명, 패왕은 내가 다 죽였거든."
"어머? 그 멧돼지 같은 남자도 죽였다고요? 당신이?"
"멧돼지 같은 남자?"
"고작 괴력으로 키운 힘 가지고 자기를 패왕이니 뭐니 하고 불렀던 남자요."
"아. 그 녀석."
"흐응…. 신기하네. 당신 정말이에요? 진짜 그 남자를 당신이 죽였어요?"
"어쩌다 보니."
"그럼…. 나도 죽일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레나는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면 이 여자가 호스티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잘나가는 연예인? 그런 느낌?
목소리와 표정에서 묻어나는 저 자신감과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애교.
인기 있을 만 해. 저걸 보고 어떻게 남자들이 안 넘어가겠어.
"글쎄. 이쁜 여자는 안 죽이는 주의라. 그래서 검성도 안 죽였지."
레나의 표정이 약간 오묘해졌다.
저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질투심? 아니, 비교당해서 기분 나쁘다는?
근데 또 그정도로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호기심? 그런 느낌이 더 강한데.
"흐응. 당신 생각보다 대단한 남자인가 보네요? 아니면 지독한 허풍쟁이거나?"
"글쎄. 뭐 판단은 알아서."
잠시 정적. 그리고 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좋은 사람이었던 거 같던데…. 죽었다고요."
"뇌제랑은 무슨 사이지?"
내 질문에 가인은 약간 아련한 표정이 되어 대답한다.
"무슨 사이…. 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그가 저를 구해줬을 뿐."
"구해줘? 넌 홍콩 사람이라며? 일본에 있었나?"
"아니요. 뇌제씨가 홍콩으로 왔죠. 그래서 저를 구해줬고요."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나 보네. 거기까지는 내가 알 이야기는 아닌거 같고. 근데 뭘 했는데 구해줬다는 거지?"
"저는 반중국파의 간부였으니까요."
"홍콩의?"
"네."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럼 축하해줘야겠네?"
"네?"
"중국은 망했어. 모든 중국인이 죽었지. 아마 살아남은 순수 짱개라면 아마 손에 꼽을 수 있을걸?"
"네?"
내 말에 가인은 물론 레나와 신영, 엠마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중국이…. 망했다고요?"
"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가인.
"설마, 그것도 당신이 한 건가요?"
그리고 레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어본다.
"거의?"
"허풍쟁이였군요."
"억울하네. 따로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억울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나를 계속해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레나.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이번엔 신영을 바라본다.
"히어로의 사이드 킥, 일본의 절대 강자, 홍콩의 반중국파 간부. 굉장히 화려한 맴버인데. 그럼 당신은? 혹시 대통령 딸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내 질문에 신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냥 평범한 일반인인데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말하는 신영.
웃기네. 일부러 저러는 건가? 굳이 본인의 신상은 밝히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 근데 왜 여기 미국까지 와서 잡혀있었지? 미국 유학생인가?"
"아뇨."
"뭐지? 그럼 가진 스킬이 많나?"
"그럴 리가요."
이야…. 원래 얘 성격이 이런 애였나? 되게 자연스럽네?
"어라라?"
그렇게 신영이와 대화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레나.
"왜?"
"왜 배운적 없는 스킬이?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이 사람들이랑 파티가 되어있어요."
레나의 말에 다들 자신의 스킬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들 놀라는 모습.
"어? 나도?"
"저도요…."
"어째서?"
기억은 지울 수 있지만 배운 스킬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는 어차피 생각해 둔 게 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지.
바로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봉인하고 바로 스킬을 쓴다.
"스킬 사용 불가 지대."
그렇게 스킬을 쓰고 염력으로 네 여자의 목을 붙잡았다.
"컥…."
"꺅!"
"윽…."
"무슨…."
"너희 뭐야."
변한 내 태도에 놀란 표정을 짓는 네 여자.
"당장 너희가 가진 스킬 개수를 말해. 가진 스킬이랑."
서슬 퍼런 내 말에 가인이 먼저 입을 연다.
"여…. 열한 개요…. 매혹, 비행, 반사, 투명화……."
그렇게 가인이 자신의 스킬을 전부 말했다. 바로 내가 신영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한다.
"여덟 개…. 요. 매혹, 반사, 수납, 광역 스킬 무효화…."
뒤를 이어 엠마를 바라보자 그녀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가 계속 노려보자 결국 입을 열었다.
"다섯 개요. 큭. 투명, 비행, 기절, 광역 스킬 무효화, 반사…."
마지막으로 레나를 보니 그녀는 별로 무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긋하게 말한다.
"스무 개요. 투명화, 탐지, 비행, 반사…."
스무 개라는 소리에 신영과 가인, 엠마의 표정이 놀람으로 가득 찬다.
하긴, 스무 개 정도 되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맞지.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내가 염력을 풀고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풀자 신영과 가인, 엠마는 더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게다가 레나 역시도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란 모습이다.
아마 그녀는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해제했다는 것에 대해 더 놀랐을 수도 있겠네.
"뒤에 세 개는 내가 배운 건 아니지만, 스무 개가…. 별거 아니라고요?"
자신의 목을 만지며 나에게 물어보는 레나.
"어."
"허풍치고는 너무 용감한 거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노릴 수도 있는데?"
"하. 당신이 나를? 재밌는 농담이네."
그 말을 들은 레나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음…. 뭔가 하려나?
잠시 나를 바라보던 레나는 코를 살짝 만졌다. 그리고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한지 알았다. 내 반사가 꺼졌으니까.
아마 코를 만지면서 입을 살짝 가리고 무효화에 매혹을 걸었겠지.
누가 유혹의 마녀 아니랄까 봐.
그녀가 봐왔던 세상에선 남자라면 무효화 매혹 콤보로 어떤 남자도 굴복시킬 수 있었겠지.
"한 번만 더 나에게 매혹 걸면 다음엔 봐주지 않을 거야. 홀딱 벗겨서 그 탐스러운 몸뚱이를 느긋하게 이뻐할 거라고. 알겠어?"
진짜로 놀란듯한 표정을 짓는 레나.
아마 머릿속으로는 대체 왜 매혹이 걸리지 않았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대답은?"
"네? 네…. 죄송해요."
"두번은 없어. 그리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나는 뭔가 얻을 게 있을 거 같아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당신들을 구해왔어. 하지만 조금 전 저 여자처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은 용서하지 않아. 나를 허풍쟁이로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다른 일이야. 적당히 선은 지켜주길 바라. 그러면 나도 그만큼 대우를 해주겠어."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여자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삭막해졌네. 자. 다들 웃자고. 나는 당신들을 겁주거나 협박하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까. 웃어. 다들."
내가 웃었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웃을 분위기는 아니지. 이 상황에서 웃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아무튼…. 나는 당신들을 뭐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뭔가 의아한 부분은 많지만, 기억이 없다고 하니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지. 어쨌든 나는 이제 볼일이 있어서 가볼 거야.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떠나도 상관없고 남아도 좋고…. 뭐 알아서 하라고. 기왕이면 나는 당신들이 남았으면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여자들의 분위기를 살짝 확인해본다.
음…. 딱히 뭘 어쩌겠다는 걸 알아채긴 힘드네. 근데 이 여자들이 여길 떠날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궁금할 테니까. 지금 당장 나가서 뭔가를 알아볼 방법도 없잖아?
게다가 추적도 걸려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그럼…. 이만 멋지게 퇴장해볼까?
프랑스의 니스로 순간이동 했다.
적당히 모두가 잠들만한 새벽이 된 니스. 일단 천리안과 투시를 쓰고 스멜리 녀석들을 살펴본다.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녀석들.
납치해온 여자들은 반 이상이 없었다. 죽였나? 아무래도 죽인 거 같은데.
잘 살펴보니 몇몇 남아있는 여자들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잔뜩 강간당하고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아직도 당하고 있는 여자들도 있다.
징한 새끼들.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도 아직도 저 지랄이야?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귀찮게.
그냥 기다리자니 보는 게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아 남겨진 여자들이 뭘 하고 있나 살펴보기로 했다.
추적이 걸려있는 신영을 생각하자 그녀의 시야와 목소리가 바로 들린다.
[...니까 괜히 자극하지 마세요. 어쨌든 우리를 구해준 사람 같은데 왜 자극을 하는 거예요?]
[어머? 그쪽은 아까 그 남자를 믿나요?]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좋게좋게 이야기해서 정보를 얻어야 할 거 아니에요?]
[믿지 못하는데 정보를 얻어서 어쩌려고요?]
[그건 정보를 얻은 다음에 확인해 봐야 하는 거죠. 설마 누구나 다 진실한 정보를 넙죽넙죽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흐응…. 재밌는 아가씨네.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내 감이랑 내 느낌으로 판단할 뿐이지.]
[이야기가 안 통하는 부류였군요. 알겠어요. 더는 신경 쓰지 않을게요. 대신 그쪽의 섣부른 짓으로 저까지 피해 보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오우. 흥미진진한데? 저 여자들이 다 같이 하하 호호하면서 지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생각보다 공격적이다.
게다가 신영의 시야 안에는 가인과 엠마는 없었다.
둘 사이의 갈등엔 상관이 없다는 건가?
가인과 엠마의 생각을 해서 그녀들이 뭘 하나 확인해보니 가인은 자신의 스킬을 보고 있었다.
오…. 이건 또 새로운 걸 알았네. 추적 걸린 사람의 시야를 보면 그 사람의 스킬 창도 볼 수 있구나?
이건 또 좋은데?
아마 스킬을 보면서 왜 이런 스킬을 배웠는지 생각하고 있는 듯한 가인.
하지만 본다고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엠마는 집을 돌아다녀 보고 있었다.
방과 방을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찾는 듯한 모습. 뭘 찾지? 계속 지켜봐야 하나?
한참을 엠마의 시선을 지켜봤지만, 뭘 찾는지 모르겠기에 그냥 생각을 멈췄다.
됐어. 뭐 알아서 하게 두자. 어차피 저 여자들은 크게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이제 저 로씨야 썅놈들의 기억을 뒤질 생각이나 해야지.
저쪽이나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