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62화 (66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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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리셋

막상 기억 조작을 시작하려 하니 걸리는 게 있다.

신영. 불쌍한 여자.

다른 여자들은 크게 걸리는 게 없다.

레나나 가인, 엠마도 다 이쁜 여자들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냥 큰 미련은 없는 정도.

근데 신영이는 조금…. 마음에 걸린다.

알게 된 시간이 조금 길다 이건가? 조금 복잡한 마음이야.

사근사근한 신영이의 모습도 좋았지. 근데 경멸하고 억지로 몸을 내주는 그 모습도 좋았어.

고성연도 그렇고 신영이도 그렇고 그 기저에 깔린 프라이드가 있어서 그런 거 같다.

얼마든지 기억을 조작할 수 있었지만, 사실을 알려준 이유가 있었어. 그런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은 거야.

으. 고민되네. 또 손대기 싫은데.

따로 빼 놀까? 어차피 추적이 있으니까 상관없을 거 같은데.

"마스터?"

엠마가 나를 부른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물끄러미 서 있는 나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엠마.

이 여자 스킬이 뭐더라. 투명, 비행, 기절, 무효화, 반사던가?

"엠마."

"네?"

엠마의 매혹을 풀었다.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눈빛이 바로 사나워진다.

"무효화! 기절!"

나를 보고 바로 스킬을 쓰는 여자.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상태 회복이 패시브로 있거든.

기절 같은 건 걸리지 않아.

"어떻게!?"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테라스 창 쪽으로 몸을 날리는 여자.

하지만 내 염력이 엠마를 붙잡았다.

"젠장!"

양쪽 팔과 다리를 붙잡고 벽에 붙여버렸다.

자신을 잡은 염력을 뿌리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 근데 그게 풀릴 리가 없지.

"역시 반발이 심하긴 하네. 잘 될 리가 없지."

바로 재워버렸다. 쩝. 나는 뭘 기대했던 건지.

엠마의 입장에서 봤을 땐 나는 자신을 납치해서 매혹으로 노예처럼 굴린 개쓰레기 새끼인데.

엠마를 침대에 눕혀놓고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작업.

기억을 지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기에 별로 오래 걸리진 않는다.

그렇게 기억을 전부 지우고 별다른 조작은 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이제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었어.

다음은 가인.

가인을 불러서 역시 기억을 전부 지웠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고베의 료칸에서 누워있던 기억일 거다.

정신을 차리면 대체 여기 왜 왔는지도 모르게 되겠지.

다음 신영.

신영을 재우고 난 다음에는…. 조금 망설여졌다.

대체 이 여자의 기억을 몇 번이나 지우게 되는 걸까. 이러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에휴.

나를 만난 이후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이 여자의 마지막 기억은 대호의 벙커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이 되겠지.

그렇게 세 여자의 기억을 지우고 레나를 기다린다. 한 두어 시간이 지나자 나타난 레나와 서민준.

"마스터!"

"구했어?"

"네!"

"게이트 열어봐."

"네에! 게이트!"

레나가 열어준 게이트를 넘어갔다.

나를 따라오는 레나와 서민준. 저 새끼는 왜 졸졸 쫓아오는 거야? 진짜 개야?

"여기야?"

"네! 마스터가 말한 거랑 딱 맞죠!?"

"여긴 어디쯤이야?"

"여기는 LA 근처 바닷가에요."

"아. 그래? 잘했어. 그리고…."

"말씀하세요. 마스터."

"따라와.“

현 위치를 저장하고 뉴욕 게이트를 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 나타난 나와 레나, 서민준.

"너 저장 위치를 이 자리로 다 저장해."

"저장 위치요? 순간이동이랑 게이트 쓸 때 쓰는 저장 위치요?"

"어."

왜 그런 지시를 하는지 모르는 레나지만, 군말 없이 따른다.

매혹은 그런 거니까. 본인의 의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

"다했어요."

"잘했어."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자 서민준의 표정이 굳는다. 하긴, 매혹 걸렸으면 저런 반응은 맞지.

게이트를 열어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갔다.

레나와 서민준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게이트를 닫고 바로 서민준을 재웠다.

"어머!?"

"얘 죽여."

"네. 마스터."

바로 적수를 써서 망설임 없이 서민준을 찌르는 레나.

그렇게 녀석은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불쌍한 새끼.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코인 먹었어?"

"네."

"미스터 샤이닝은 처리했어?"

"네. 마스터."

대답을 듣자마자 레나도 재웠다.

그리고 기억 삭제.

그녀 역시 나를 만나기 전 나고야의 기억이 마지막이 되었고 이로써 네 여자는 나와 전혀 모르는 관계가 되었다.

일단…. 이제 이 여자들은 됐고.

레나를 침대에 눕혀놓은 뒤 아까 LA의 바닷가에 있는 저택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런 다음 탐지를 돌리고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제법 넓은 집인데 사람이 셋밖에 없네?

나이 꽤 있는 남자 하나랑 젊은 여자 둘.

외모로 봐선 애인이나 그런 건 아닌거 같은데…. 일단 가서 전부 재운 다음 기억을 읽었다.

남자는 집주인. 여자 둘은 사용인이자 여러가지를 겸사겸사 하는 관계.

다행히 남자도 여자도 가족은 없다. 깔끔하네.

가족이 있으면 그 가족까지 다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진 않아도 되겠어.

여자 둘은 바로 수납으로 먹어버리고 남자의 기억을 읽는다.

남자가 기억하는 집의 가장 좋았던 시절을 읽은 후 일단 남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상태 회귀.

남자의 저택은 무사히 가장 좋았던 시절로 돌아갔고 남자는 내 수납에 먹혔다.

좋아 집 하나 마련됐네.

집안에 들어가 둘러보니 제법 맘에 든다.

방도 많고 집도 고급이야. 식량 창고도 제법 크고 비축된 것도 많다. 역시 부자들이 사는 저택이라는 건가?

이정도면 저 여자들이 충분히 살 수 있겠지.

게이트를 열어 레나와 신영, 가인과 엠마를 데려왔다.

응접실의 고급스러운 소파에 네 여자를 눕혀놓고 잠시 바라보다가 네 여자에게 추적을 걸었다.

이제 됐고….

이제 연기를 할 시간이네. 뭐…. 잘 되겠지?

광역 스킬 무효화.

여자들의 머리에 떠 있던 수면시간이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네 여자.

눈을 뜬 여자들의 얼굴에 다채로운 표정이 떠오른다.

조용히 평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레나.

인상을 쓰고 여기가 어딘지 살펴보는 신영.

신영과 별로 표정 차이가 없는 가인.

주변을 살피기보단 바로 앞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는 엠마.

"당신은 누구지?"

엠마의 말에 주변을 살펴보던 세 여자도 나를 바라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들.

"어디 불편하거나 안 좋은 사람?"

아무 말도 없는 네 여자.

"그럼 됐어. 나는 바쁘니까 이만 갈 거야. 이 집은….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문제없을 거야.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안나가는 걸 추천하겠어."

"잠깐!"

내가 순간이동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엠마가 나를 부른다.

"할 말 있어?"

"대체 여긴 어디고 당신이 누구인지는 말해야지! 나는 분명히 미스터 샤이닝과 함께 있었는데…."

"미스터 샤이닝? LA의 히어로?"

"그래!"

"그와 아는 사이인가?"

"나는…. 나는 그의 사이드 킥이야! 쉐도우다!"

"그럼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돼서 유감이네. 그는 죽었어. 안타깝게도."

"뭐!?"

나와 엠마의 대화에 레나와 신영, 가인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인상을 쓰고 바라본다.

아니, 알아듣는 거 맞나? 레나와 가인은 통역 스킬이 생겼으니 알아들을 거고…. 신영은 영어를 할 줄 알지?

근데 표정은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보이는 모습이다.

하긴, 미국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일본인과 한국인, 홍콩인이니 지금 나와 엠마의 대화를 들으면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겠지.

"미스터 샤이닝이 왜 죽어!!!"

"왜 죽긴. 히어로 협회 때문이지."

"뭐!?"

심각한 표정의 엠마, 그리고 더욱더 알 수 없는 표정이 돼가는 세 여자.

"저기….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죄송하지만요…."

레나가 조심스럽게 나와 엠마 사이의 대화에 끼어든다.

매혹에 걸리지 않은 그녀는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지만, 당찬 느낌이다. 죄송하다고 말하는데 전혀 안 죄송한 느낌?

"여기는 어디인가요?"

나는 일부러 인상을 썼다. 마치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여기는 LA의 내 안가 중 하나야."

"LA요? 미국?"

"나는 나가겠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려는 엠마.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나는 방금 너희를 히어로 협회에서 구해왔어. 다시 거기를 제 발로 찾아가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길 바라."

그대로 멈춰서 내 쪽을 바라보는 엠마.

"히어로 협회에서 구해왔다고? 나를? 이 여자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나?"

내 말에 인상을 쓰는 엠마. 자신의 머리를 잡더니 인상을 더 심하게 쓴다.

"나는…. 미스터 샤이닝과 이상한 여자를 잡으러 출동했었어…. 그리고…."

중얼거리는 엠마를 무시하고 레나와 신영, 가인을 바라본다.

"기억 삭제인가? 거기 너희들도 혹시 기억나는 게 없나?"

눈치를 보는 세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엠마의 분위기가 워낙 흉흉해서 그런가? 고개 끄덕이는 게 되게 귀엽네.

"히어로 협회에 대해서 몰라?"

"저는…. 조금 전까지도 일본에 있었던 걸요?"

"일본? 일본 사람인가?"

"레나라고 해요. 그러는 당신은?"

"티어10에 있는 통역을 배운건가? 입 모양과 말하는 게 다르네?"

내 말에 말없이 미소를 짓는 레나.

자신의 실력이 있어서 그런가? 지금 상황이 이해는 안 가지만 여유는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잠깐. 당신 한국 사람이야?"

나를 보고 물어보는 신영.

까칠한 듯한 말투. 목소리에 살짝 들어있는 오만함. 그래. 이게 최신영이지.

"너도 한국 사람인가 보네."

"물어봤으면 대답을 해야지."

"내가 왜?"

"뭐?"

"웃기는 상황이네. 적어도 고맙다는 소리는 들을 줄 알았는데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라 그런 인사도 못 듣다니. 손해 보는 짓을 했어."

내 말에 신영은 입을 닫고 조용히 눈치를 본다.

저 여자는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내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조합하면서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거야.

내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말이 많으면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니까.

"히어로 협회에서 구해왔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지?"

엠마가 나를 향해 말했고, 다른 세 여자도 거기에 동의의 눈빛을 보낸다.

아마 지금 상황에선 최대한 정보를 얻고 싶겠지.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현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니까.

오히려 엠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

"하아. 골치 아픈 상황이 됐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여자들과 마주 보는 소파에 앉았다.

"거기? 쉐도우라고 했나? 당신도 앉지?"

엠마는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소파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나에게 재촉한다. 빨리 뭐든 말해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히어로 협회에 원한이 있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위지만. 당신, 호라이즌이라고 아나?"

엠마를 바라보고 물어봤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나? 역시 거기까지는 정보가 없나 보네."

잠깐 생각하는 척 한 나는 내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의 시선을 잠시 즐긴다.

재밌는 상황이야. 즐겁기까지 하네.

"히어로 협회의 상위 기관에서 히어로와 빌런을 모두 관리하는 거 알고 있나?"

"뭐!?"

"알 리가 없겠지. 보통 히어로들은 그걸 모르니까. 물론 빌런들도."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건 그쪽 생각이고, 현실은 그래. 아무튼, 나는 거기에 원한이 있어서 꼬리를 밟고 있지. 그리고 그러던 도중에 한곳에서 당신들을 발견했어. 그래서 구해왔지."

"왜?"

"왜 구했냐고? 음…. 글쎄. 왜 구했을까? 이뻐서?"

"뭐!?"

"나도 건장한 남성이라서? 이쁜 여자를 보면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잖아? 게다가 당신들은 거기에서 감금당해 잠자고 있었어. 그러니 구해왔지. 뭔가 아는 게 있나 해서."

나를 인상 쓰면서 바라보는 엠마.

그리고 레나와 신영, 가인은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역시 재밌어.

억지로 기억을 조작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런 게 낫지.

어떻게 할까 막막했었는데…. 이러길 잘했네. 시작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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