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60화 (6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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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우와…."

저 커플 녀석들은 리액션이 참 맘에 든다.

미국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때가 덜 탄 모습이야.

아. 저것도 양키식 리액션인가?

하긴, 장룡 녀석이 쓰던 방은 화려함을 많이 거둬냈긴 했지만, 저들이 보기엔 눈이 돌아갈 만하긴 하지.

나도 아직 적응이 잘 안 되는데 뭘.

"왜 다 와 있어요?"

내 방에는 민희 말고도 정 부장이랑 승규 형도 와있었다.

내가 물어보자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 정부장.

"아니, 니가 또 누굴 데려오나 궁금해서."

승규 형마저 저렇게 말하니 뭔가 좀 웃기다.

"뭐…. 상관없죠. 자. 이쪽은 여기 방주를 책임지는 책임자 세 명. 이쪽은 뉴욕에서 온 사람들. 대호 그룹의 생존자들이에요. 사연이 길긴 한데 여기 이 여자가 아들을 찾고 싶어서 해서 뉴욕에 데려다줬고, 결국 찾았죠. 이 두 사람은 세상이 망하고도 5년 동안 얘를 보살펴 준 사람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죠."

간단하게 말하자 승규는 약간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근데 정 부장과 민희의 표정은 조금 묘하다.

정 부장이야 내가 대호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얼추 알고 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만, 민희는 왜?

쟤는 대호랑 나 사이의 관계를 모를 텐데?

아…. 성연의 외모를 보고 뭔가 짐작하는 건가? 나라면 이 여자를 단순한 선의로 구해준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으려나?

뭐, 상관없어. 대놓고 드러난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이 여자는 스킬이 위스키 생산이래요. 맞지?"

"네? 네. 맞아요. 위스키 생산."

내 말에 정 부장의 눈빛이 번뜩인다.

한국에서는 소주 생성만 가능하기에 이 방주 내에는 위스키 생성을 가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세상이 망할 당시 이 여자는 미국에 있었기에 그걸 배울 수 있었다.

즉, 위스키는 희귀품이라는 이야기.

미국에 있을 때는 별로 빛을 못 봤겠지만, 여기에서는 상당히 귀중한 물품이 될 수 있다.

"암튼, 그러면…."

"또 저렇게 사람만 놓고 또 가려고요?"

정 부장의 말에 승규와 민희가 큭큭하고 웃는다.

상황을 모르는 성연과 민후, 커플은 약간 의아한 표정.

다행히 고성연 저 여자는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거 같다.

티 나게 이상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모습.

그래.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게다가 어쨌든 약속은 지켰으니까.

"알아서 잘 해줄 거잖아요. 방주의 자랑인 밥이나 좀 먹여요. 아. 이 사람들은 자정이 넘은 뉴욕에서 왔다는 거 생각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성철 씨는 가도 돼요. 우리가 알아서 하죠."

여전히 킬킬거리며 웃는 정 부장과 승규 형, 민희.

하여간 정 부장 저 사람은 맘에 든다.

내가 저지른 안 좋은 일들도 얼추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하기도 편하고 말이지.

정 부장과 승규 형, 민희는 성연과 민후, 그리고 커플을 데리고 간다.

나는 그렇게 가버리는 성연에게 추적을 걸었다.

나중에 찾아오려면 걸어놔야지. 방이 어디냐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

성연에게 추적을 걸었을 때, 때마침 그녀가 내 쪽을 바라봤다.

살짝 움찔하긴 했지만, 추적은 걸렸다고 알아채지 못한다.

저건 그저 때마침 나를 바라본 것일 뿐.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줬다. 그대로 고개를 휙 돌리는 여자.

저 여자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이 방주의 시설과 생활을 겪어보면 더 혼란스럽겠지.

과연…. 저 여자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네. 적어도 시시한 반응은 아니겠지.

모두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마이애미로 넘어갔다.

뉴욕에서 방주로 넘어올 때 이미 자정이 넘었었기에 회장 녀석의 집은 제법 조용했다.

그럼…. 녀석은 뭐하나?

추적이 걸려있는 곳을 보니 녀석은 소파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취향 한번 고상하시네. 아니지. 저건 고상한 게 아닌가?

잠들기 전에 소주 한 병 마시고 자는 느낌이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버프를 모두 켜놓은 채 성장 숙련을 한다.

녀석이 여기 미국의 흑막이 맞을까?

잠들지 않는다면 흑막이 맞을 거다. 그럼 뭘 어떻게 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근데 추적이 쉽게 걸렸으니 녀석이 흑막이어도 나쁘진 않다.

이러나저러나 나에겐 손해 볼 일이 없는 상황.

그렇기에 느긋하게 성장을 쓰면서 녀석을 지켜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장 놈은 잔을 모두 비우더니 옷을 벗고 침대에 눕는다.

음…. 드디어 자네. 좋아.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어?

한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녀석을 지켜봤다.

느리게 변한 호흡. 저 정도면 자는 거지. 연기가 아니라면 말이지.

블링크, 페이즈 아웃, 벽을 넘어서 녀석의 방구석 한가한 곳으로 간다.

워낙 방이 넓어서 사각은 넘쳐났기에 바로 해제를 하고 축소를 비롯한 모든 버프를 다 건다.

그리고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봉인했다. 이러면 뭐…. 문제없고.

녀석에게 수면을 걸었다. 제발…. 걸려라!

내 바람이 이뤄졌고 녀석의 머리 위에 시간이 뜬다.

다행이긴 한데…. 시시하네. 어쨌든 녀석은 흑막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녀석이 잠들었으니 집안을 살펴본다.

본채에는 회장 외에 아무도 없다. 별채같이 생긴 곳에는 사용인들만 잠을 자고 있다.

웃기네. 뭐가 이렇게 허술하냐?

어쨌든 기억을 읽는다. 그렇게 느긋하게 기억을 읽는데…. 오 씨발.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녀석을 한번 바라봤다.

와. 미친 새끼들 진짜로?

그렇게 다시 녀석의 기억을 읽는다.

이거…. 시간이 조금 걸리겠어. 그래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읽는다. 와씨. 이거 흥미진진하네.

녀석의 기억에서 이놈은 날마다 여섯 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간을 맞춰서 기억 읽기를 마치고 뉴욕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페이즈 아웃을 한번 쓰고 해제했다.

그럼 저 녀석은 알아서 깨어날 테니 됐고….

하. 씨발. 일단 녀석의 기억에서 읽으면서 스마트 폰에 적었던 것을 정리한다.

근데…. 다시 봐도 웃기는 새끼들이네. 진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로스차일드 가문….

미국의 음모론 같은 것을 보면 정말 단골 소재로 나오는 단체.

명색이 비밀 단체고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단체.

물론 음모론을 믿는 이들에게 그런 걸 말하면 '그렇게 하도록 일부러 그런 거야!'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다.

한 개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아흔아홉 개의 진실을 공개하는 방법이라며 말이지.

물론 나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다.

맹신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잘 모르니까. 있다는 증거도 없고 없다는 증거도 없잖아?

게다가 미국은 애초에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지.

근데…. 아까 그놈. 미라지 오션의 회장, 빈센트 B. 레이놀드.

이놈의 기억을 읽고 나니….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 진짜.

음모론의 단골 소재인 미국과 세계를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

즉, 딥 스테이트라 부르는 것은 존재했다.

물론 이들은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망한 이후 이놈들이 딥 스테이트가 되었다는 것.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평소에 음모론을 맹신하고 있던 놈이 틀림없을 거야.

이렇게 무슨 일이 터지자마자 냅다 이런걸 만든 거 보면.

호라이즌이라 불리는 단체.

이들이 속한 곳이다. 크라켄도 미라지 오션도 전부 호라이즌에 속한 회사다.

물론 크라켄이나 미라지 오션에 다니는 이들은 자신들이 호라이즌에 속해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평범한 직장인 줄 알겠지.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들은 모두 다 호라이즌의 의지였고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호라이즌에 있는 최고 의결 기관. 7인의 위원회.

그리고 그들이 추종하는 그랜드마스터.

그놈들이 지금의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놈들이다.

그리고 레이놀드 이 녀석 역시 7인의 위원회의 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녀석에게서 아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정말…. 화끈한 정보들을.

미라지 오션, 그리고 크라켄.

녀석들이 티어13 이상의 인간들을 잔뜩 훈련해서 하와이에 데려다 놓는 이유.

그리고 ROF PROJECT. 그게 뭔지를 알아냈다.

생각보다 황당한 거였어. 하. 진짜.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ROF PROJECT.

ROF는 줄임말이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단어의 조합.

Ring of Fire. 불의 고리.

게임의 스킬 따위가 아니다. 저건 그러니까…. 세계 지리에 관련된 단어다.

환태평양 조산대라는 것이 있다.

태평양 바다 밑, 태평양판을 비롯한 여러 지각판들이 맞닿은 곳.

이 판들 때문에 일본이 생기고 알류샨 열도가 생겼으며 미국의 로키산맥이 생기고 칠레의 안데스산맥이 생기고…. 암튼 그렇다.

판과 판이 충돌하면서 땅이 밀려나 솟으면 산맥이 되는 거다. 바다에서 솟아오르면 그게 섬이 되는 거고.

그렇기에 그 환태평양 조산대에는 지구의 지진 90퍼센트가 일어나고 화산의 75퍼센트가 존재한다.

그야말로 화산이 잔뜩 있는…. 불의 고리.

녀석들이 티어 13인 녀석들을 모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융해와 노화는 눈속임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였어.

계획에 참여한 참가자들도 그쪽으로 정신 팔리게 해서 온갖 추측을 하게 만드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이놈들이 진짜 원한 건 그거였다. 티어14스킬 카타스트로피.

100명이 넘는 카타스트로피 스킬 보유자를 모아 한 번에 불에 고리에 있는 화산을 동시에 터트리는 것.

이놈들은 불의 고리에 있는 화산을 일제히 분화시키면 3년 내로 인간의 99퍼센트를 죽일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화끈한 새끼들. 씨발. 발상 자체가 다르네.

화산 폭발과 지진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건 그저 1차 적인 피해일 뿐이다.

진짜 피해는 그게 아니다. 2차 피해. 화산재로 인한 기온 하강.

화산이 터지면서 뿜어낸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고 그 화산재는 미처 떨어지지 않고 하늘 높은 곳에서 머물며 태양 빛을 가린다.

그리고 찾아오는 빙하기. 아니 소빙하기? 암튼.

추워지는 지구는 식량 재배와 가축 사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불모지가 되어버리는 것.

이놈들은 쪼잔하게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하나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던 거다.

그냥 블의 고리에 있는 화산을 몽땅 터트려 지구 자체를 좆되게 만들고 지구상의 생존자들을 말려 죽일 셈인 거야.

미친놈들. 스케일 존나 크네.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다. 아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탐지 반경 패시브를 늘려서 살아있는 사람을 하나하나 잡아 죽일 생각을 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네.

그리고 가장 웃긴 건…. 이놈들 7인의 위원회 놈들도 그랜드마스터에게 속고 있다는 거다.

이 녀석들이 그랜드마스터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내가 아는 것과 달랐다.

이 녀석들은 최후의 한 사람이 아닌 최후의 10인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더 어이없는 건 이놈들이 직접 그랜드 마스터의 기억을 읽었다는 거다. 기억 읽기로.

이 새끼들. 기억 조작당한 게 분명하네.

그것 말고는 이해가 안 간다. 근데 그랜드마스터 그놈도 정말 대범하네.

기억을 읽게 하고 그걸 바로 조작한 거야?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할 짓이 아닌데.

하긴, 그 정도 깡은 돼야 미국을 쥐고 흔들지. 딥 스테이트의 수장다워.

하긴 불의 고리에 카타스트로피 100연발 같은 미친 생각을 한 시점에서 정상인은 아니지만.

기억을 전부 읽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꿀릴 게 없다. 화산 폭발이라고? 지구가 좆돼?

아니다. 좆되는 건 생존 능력이 없는 민간인이다. 지구가 아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방주가 있으니까.

화산 폭발로 인해서 민간인을 모두 죽여주는 수고를 대신 해준다면 사실 거절할 필요는 없다.

이놈들이 그 코인을 전부 회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단지 맘에 안 드는 건, 이놈들의 계획은 너무 거창하다.

차라리 그 인원을 그대로 투입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죽이는 게 더 빠르지 않나?

지금도 이미 그러고 있잖아? 남미 쪽은 그렇게 잡아 죽이고 있으면서?

해보니까 힘들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하나 잡아 죽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나?

하긴,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 그렇게 잡아 조졌는데도 아직 4억이나 남았잖아.

그 많은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서 하나하나 잡아 죽이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

일단은 관망.

그랜드마스터 놈을 잡아 죽일 수 있으면 그렇게 할 테지만, 무리하진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놈들의 계획은 언제든지 뒤엎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와이로 가서 스킬 사용 불가 지대 깔고 데스 윈드 한방이면 되잖아?

이놈들이 공들여 준비한 계획도 그거 한방이면 끝이지.

어차피 나는 급할 게 없다.

이놈에게 추적이 걸렸으니 다음 정례 회의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잖아?

녀석들이 얼마나 은밀한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놈이 자신들을 파고 있다는 건 모르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네. 이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하긴, 생각해보면 이런 발상이 어려운 건 아니겠네.

이놈들은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핵전쟁에 대해서 몇십 년을 생각한 놈들이니까.

화산을 핵무기로 바꾸면 이놈들이 생각하는 건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실수든 고의든 핵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거기에 따른 대처와 생존 전략도 이미 다 준비되어있겠지.

이놈들은 그저 그걸 재활용하고 있을 뿐이고.

됐다. 당분간은 미국 놈들은 놔두자.

정례 회의는 다음 달 15일. 지금이 6월 말일이니 이제 보름 남았네.

적어도 그사이엔 터트릴 생각은 없을 거 같으니 일단 지켜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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