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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여자
세 시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숙련을 마치고 시계를 본다.
한국 시간으로 11시 59분. 드디어 하루가 지났다.
지난번에 승희와 미나, 세아를 한집에 모았을 때 이후로 이렇게 하루가 긴 적은 처음이야.
시계가 12시로 변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순간 이동했다.
나는야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 이 정도는 기본이지.
방문을 열고 나가자 요란한 음식 냄새가 나를 반긴다.
그리고 다섯 여자. 근데…. 와우!
"이쁘네!"
순수한 내 감탄.
그리고 그 짧은 한마디로도 원하는 반응이 나왔는지 다섯 여자가 다들 만족하는 모습이다.
화장을 해준 게 분명한 민희와 화장을 받은 승희, 미나, 세아, 안나.
"맘에 들어요?"
"응."
민희가 은근히 물어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희에게 다가갔다.
승희. 원래도 이쁜 애긴 했어. 미나와 안나가 있어서 살짝 저평가받고 있을 뿐이지.
뽀얗게 변한 피부, 날렵한 눈썹, 눈 화장, 붉은 입술.
게다가 머리도 만진 거 같네?
"연예인 같다. 장난 아니네?"
"그쵸? 화장하는 보람이 있었어요. 스타일이 확 달라졌죠?"
나와 민희의 말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승희. 으쓱으쓱하는 표정이야. 웃겨.
"보기 괜찮아요?"
"어. 너 앞으로 날마다 이러고 있어라. 화장 안 해도 이쁜 애가 화장하니까…. 이야."
"근데 진짜 연예인은 여기 있죠."
그러면서 승희가 미나를 가리켰고 나는 미나를 바라봤다.
승희 말이 맞다.
확실히 미나는…. 눈에 확 들어온다. 게다가 익숙하기까지 한 모습.
"미나는 화장하기 쉬웠어요. 많이 본 모습이죠?"
민희는 무슨 큐레이터 같다. 물론 본인이 화장했으니 그런 거긴 하지만.
"그러네. 5년 전 티비에서 막 화면을 뚫고 나온 거 같아."
"헤헤. 저도 놀랐어요. 민희 언니 화장 솜씨가 웬만한 메이크업 언니들 보다 좋은 거 같아요."
"그런가보다. 이쁘네. 역시 이 정도는 되니까 아이돌 하는구나."
잔뜩 쑥스러워하는 모습의 미나. 이쁜 애가 그런 표정 지으면 반칙이라고?
확실히 미나는 소속사 벽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게다가 미나는 지금 과거의 몸으로 돌아간 상태잖아? 완전…. 눈이 부실 정도야.
이대로 데려가서 무대의상 입히고 야한 짓을 하면…. 어우. 상상만 해도 좋네.
아…. 진짜 해볼까? 굉장히 좋은 생각인 거 같은데?
"미나는 어려져서 그런가 화장을 그리 많이 하지도 않았어요. 피부 봐요. 화장할 필요도 없어. 아. 세아도."
민희가 세아를 가리켰고, 웃기게도 세아는 약간 부끄러워한다.
"야. 넌 왜 부끄러워하냐? 고개 좀 들어봐. 좀 자세히 보자."
"아. 적당히 이쁜가 보다 하고 말지 뭘 그렇게 자세히 본다 그래?"
그러면서 고개를 슬쩍 돌리는 세아.
"이쁘게 화장을 했으면 자랑을 해야지. 왜 숨겨. 숨기긴."
그러면서 세아 얼굴을 돌리려고 손을 대자 깜짝 놀라며 내 손을 밀어낸다.
"화장 지워져! 만지면 안 돼!"
옆에서 큭큭큭 하고 웃는 승희와 미나, 안나, 민희.
그리고 나도 덩달아 웃었다.
이 녀석 화장 한 거 진짜 맘에 들었나 보네. 만진다고 이렇게 화를 낼 정도면.
"그러니까 봐봐. 좀 자세히 보자."
내 말에 세아는 나를 봤다가 시선을 어쩌지 못하고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한다.
"아. 쫌! 내 눈을 봐! 아니면 내 코나 인중을 보던가!"
그제야 방황하던 시선이 한데 모인다. 하여간 웃긴 녀석이야.
안 그래도 어려 보이는 세아는 화장을 하니 더 어려 보였다.
베이글? 딱 맞는 단어다.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
게다가 평소에 그냥 길게 늘어뜨리던 머리도 약간 구불구불하게 웨이브 져 있다.
이거 그 고데기 인가 그걸 쓴 건가?
"너 지금 모습 되게 어울린다. 머리도 그렇고. 너도 평소에 이렇게 하고 다니면 안 되냐?"
"무리야…. 화장은 너무 어려워…."
"아니야. 이 정도면 배우는 게 맞다. 배워라. 너는 스킬 숙련할 때가 아니네."
"근데 나도 그러고 싶긴 해. 안나 봐봐…. 나도 저렇게 화장해 주고 싶어."
나는 세아의 말에 안나를 바라봤다.
사실 순서대로 하느라 안나를 제일 마지막에 보긴 했지만…. 가장 처음부터 눈이 간 건 안나긴 했어.
"가장 어려웠어요. 화장 안 한 얼굴을 이길 수가 없었으니까. 근데 이 정도면 성공한 거 같아요."
민희의 말에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승희와 미나, 세아 역시 같은 마음인가 보다.
진심으로 민희의 말에 공감하는 둣한 모습.
내가 알기로는 여자들은 아무리 이쁜 여자가 있어도 그 여자를 칭찬하면 조금이라도 시기나 질투하는 마음이 든다고 알고 있는데.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을 확률이 높지. 내가 여자들 마음속에 들어 갔다 와 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 있는 여자들은 그런 게 없다.
시기랑 질투는커녕 오히려 안나의 미모와 민희가 해준 화장에 경외심까지 느끼는 듯한 모습.
"민희 너도 진짜 겸손하네. 이 정도면 안나의 미모도 미모지만 화장을 한 너도 달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런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승희, 미나, 세아.
그러면서 안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딱 그거다. '우리 안나 최고다!'라는 표정.
안 그래도 미친 미모의 안나다.
근데 거기에 어려진 데다가…. 화장이 기가 막히게 됐다.
절대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야.
지금의 안나를 보고 이쁘다는 생각을 못 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새끼는 게이야. 확신할 수 있어.
"나 괜찮아요? 썽철?"
"아. 복잡하네.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데 꼭꼭 숨겨놓고 나만 보고 싶은 마음이야."
"맞아요! 나도 그런 생각이에요!"
승희가 말했고 다들 웃는다. 그래. 다들 비슷한 생각이겠지.
질투나 시기 같은 것도 규격 외의 존재를 상대로는 생기지 않는 법이니까.
"나에게 보여주려고 이렇게 얘들을 화장해 준거야?"
민희를 보고 말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렇죠? 다들 관심도 많았고. 게다가 이렇게 화장하기 좋은 얼굴들이 어딨어요. 최고의 상대지."
"근데 화장품이 이만큼이나 있었나?"
"아. 저 회귀 배웠어요. 게이트 마스터 하고."
"그랬어? 몰랐네."
"그래서 어제 다 같이 나가서 백화점 갔어요. 화장품이랑…. 이것저것 가져왔어요."
와. 여자 다섯이 백화점? 미쳤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어…. 쇼핑 다 하는 데 몇 시간 걸렸어?"
"우리 어제 저녁 먹고 나가서 새벽 두 시에 들어왔어요."
승희의 말에 아찔함이 현실이 됐다.
"백화점 VVIP가 된 거 같아서 좋았어요. 또 가고 싶은데."
"다음에 또 가자. 미나야. 내가 자주 올게."
"그래요. 언니. 다음엔 옷 위주로 가봐요. 백화점에는 여름옷이 너무 없어서."
"그치? 아무래도 세상이 이렇게 될 때 백화점은 가을 시즌 옷들이 주였으니까. 백화점 말고 매장 쪽으로 가면 여름옷들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옷들도 회귀하면 다 원래대로 쓸 수 있으니까."
민희와 미나는 굉장히 친근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
아니, 미나뿐만이 아니다. 승희도 세아도 안나도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언니처럼 자연스럽게 대하는 모습.
역시…. 이게 민희 매직인가? 저 여자는 동성 매혹이라도 쓸 수 있는 걸까?
"근데…. 새벽 두 시까지 쇼핑을 했다고? 와. 너희 수납 한번 까보고 싶네. 너희 수납 다 까서 열면 백화점이 통째로 들어있는 거 아냐?"
농담처럼 한 말인데 다섯 여자는 대답이 없다.
"어…. 농담이었는데 왜 대답이 없는 거지? 설마?"
"아. 맞아. 이제 밥 먹죠! 음식 다 식을라!"
급하게 음식 이야기로 넘어가는 승희.
그리고 다들 승희의 말에 동조하며 나를 식탁 쪽으로 데려간다.
미치겠다. 웃겨 죽겠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야.
어쨌든 그렇게 식탁으로 가니 뭔가 굉장히 화려한 식탁이 보인다.
"이야. 뭐가 이렇게 많아?"
"언니가 준비해 온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잔뜩 요리해 봤어요."
뿌듯한 미나의 말에 다들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얘들은 뭐가 이렇게 즐겁냐? 무슨 말만 해도 까르륵 이네.
물론…. 다들 하루 만에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걸 보니 기분은 좋다.
그리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안 맞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럼 내가 중간에서 굉장히 곤란했겠지.
어쨌든 그렇게 모여 앉아서 식사를 시작한다.
종류별로 있는 고기 요리, 생선 요리, 구이, 볶음, 찜…. 하여간 굉장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식탁이네.
"근데 말이에요. 어제 우리끼리 한 이야긴데요."
밥을 먹으면서 말을 꺼내는 승희.
"뭐?"
"우리 집을 옮겨야 하지 않아요?"
"왜?"
내가 의아한 듯 물어보자 승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한다.
"음…. 함께 사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으니까?"
그 말에 민희가 밥을 먹다가 빙긋 웃는다.
승희의 말은 민희를 확실히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네.
그리고 그건 미나나 세아, 안나도 인정했다는 소리일 거고.
민희 역시 거기에 동의한 거겠지? 물론 민희는 방주에 출퇴근하겠지만…. 그거야 뭐 본인이 알아서 할 테고.
"여기도 그리 작은 건 아니잖아?"
"그래도요."
"음…. 그래? 그럼 큰 벙커로 갈래? 50인짜리 벙커 확보해 둔 게 있긴 한데."
수원 벙커. 거기라면 이 여자들도 맘에 들 거다.
여유 공간도 많고 무엇보다 대호 그룹에서 추가로 지어놓은 부분이 있으니까.
청평이나 그 수원의 공원 밑에 지어놓은 벙커의 업그레이드판이잖아?
게다가 거기는 인공 정원도 있다. 크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니 딱 좋을 거 같은데.
대호 그룹에서 사용한 흔적이 있지만…. 그거야 상태 회귀 한방이면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마치 막 만들어 놓은 벙커로 돌릴 수가 있어.
"또 벙커야? 우리도 이제 밖에서 당당하게 지내도 되는 거 아냐?"
세아의 말에 다들 그 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가? 하긴 그렇긴 하네. 근데 벙커가 좋지 않냐? 그 안정감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긴 해요, 근데 이제는 좀 밝은 곳에서 살고 싶어요."
미나가 말했고 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런 안전불감증 녀석들. 하긴. 나 같은 놈이나 벙커를 좋아하지…. 다들 이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 뭐…. 한번 알아볼게. 근데 상태 회귀를 쓰려면 원래의 모습을 알고 있어야 해서…. 쉽게 구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근데 썽철. 방주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 거예요?"
나를 바라보며 물어보는 안나. 어우. 눈부셔. 미모에 눈이 부시네.
"없어."
단호한 내 말에 다들 나를 바라본다.
"상태 회귀 때문에요?"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왜요?"
"방주로 들어가면 나는 너희들을 특별 대우해줄 수가 없어."
내 말에 민희만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특별 대우?"
"너희가 방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방주의 일원이 되는 거야. 내가 너희들을 편애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소외감이나 질투심이 생길 수도 있어. 나는 그 꼴은 못 봐. 그들이 너희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것 자체를."
내말을 들은 승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본다.
"얼래? 특별 대우를 할 수 없어서 싫은 게 아니고 특별 대우는 당연히 할 건데 그랬을 때 생기는 문제가 싫은 거예요?"
"당연한 거 아냐?"
"이상한 오빠야. 진짜."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미나나 세아도 마찬가지.
민희만 묘한 표정을 지으며 빙긋 웃을 뿐.
"썽철. 그럼 유정을 보러 가는 것도 안 돼요? 하율도?"
"음…. 그건."
"그녀들이라면 내가 가끔 데리고 올게요. 여기 말고 밖에서 만나면 되겠죠?"
민희가 말하자 안나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안나.
"그 정도야 뭐 상관없지. 유정 형수가 입이 가벼운 사람도 아니고. 근데 지금 상태로는 안돼. 상태 회귀에 대해서도 말하면 안 되고."
"와아!"
아이처럼 좋아하는 안나. 보는 사람이 흐뭇할 정도의 미소.
근데…. 허락은 해주긴 했지만, 썩 내키진 않는다.
그동안 칼같이 지켜왔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드니까.
댐. 역시 이것도 댐과 같다.
민희라는 예외가 생겨버렸기에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예외나 특이 케이스가 하나씩 생겨버리면 결국엔 전부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섞여서 혼탁해지는 게 싫다.
물론 섞인다고 문제가 되진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섞인 다음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보단 애초에 섞지 않으면 되는 거다.
내 사고 방식은 그래. 0 아니면 100이지. 확률로 뭔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건 너무 위험도가 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민희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승미세안 네 여자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특히 세아. 묘하게 민희에 대해 우호적이다. 하긴 쟤는 미나와 안나에게도 그렇지.
남자를 싫어했던 것만큼 여자를 좋아하는 건가? 음…. 잘 모르겠네.
"자주 놀러 올게."
"안돼요. 자주 오는 거로는 안 돼요. 날마다 와요. 일 끝나면 바로."
"고마워. 이렇게 반겨주니 너무 고맙네."
그러면서 세아를 끌어안는 민희. 저렇게 보니까 엄마랑 딸 같기도 하네.
이크. 민희에겐 실례인가?
어쨌든 그렇게 환대를 받으며 민희는 방주로 돌아갔다.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다. 이로써 마음의 짐을 하나 또 덜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