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49화 (64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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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제안

뉴욕에도 어둠이 내려온다.

다섯 시가 땡하고 되자마자 하나둘씩 사라지는 미라지 오션의 직원들.

이야. 칼퇴근 보장이라니. 훌륭한 회사야.

혹시나 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역시 회장 녀석은 퇴근할 준비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제길. 이래서 순간 이동은 거지 같아.

내가 쓰면 존나 좋지만 남이 쓰면 거지 같다고! 젠장.

게이트나 순간 이동을 원트로 어떻게 스킬 조합시킬 수 없을까?

효과만 같고 다른 스킬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고 게이트랑 순간 이동을 지워버리는 거야. 다들 좆 돼봐라 이거지.

그럼 세상 놈들을 죽이는 게 조금 더 편해질 텐데.

지금까지는 게이트와 조합할 수 있는 스킬이 없었다.

근데, 과연 있긴 할까? 있으면 좋겠는데.

안 배운 스킬 중에 조합 될만한 그럴듯한 스킬이 뭐가 있을까?

음…. 천국의 문? 와. 이거 좀 그럴듯한데.

아닌가? 게이트가 문이잖아. 그게 그거 아닐까? 으음…. 모르겠네.

심연? 심연 게이트? 오우. 이건 좀 무섭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잖아? 약간 시도하기 무서운 스킬이야.

그렇게 여러가지를 대입해봤지만 마땅한 게 없다.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아쉽네.

근데 한계 돌파를 한 열 단계 정도만 더 올리면 게이트 같은 건 필요 없지 않을까?

이미 지금도 거의 마하 2에 근접하는 속도인데.

미친 듯이 불어나는 비행 속도면…. 게이트랑 순간 이동, 블링크까지 전부 지워버려도 크게 안 불편할 거 같은데.

아. 대체할 수 있는 스킬이 있네.

파티가 있잖아. 전송과 소환. 그리고 통신.

으음…. 괜찮은데?

아니다. 내가 나를 못 보내는구나. 누군가를 보내고 그 사람이 나를 소환해줘야 하네.

놔두자. 게이트를 지우는 건 오히려 내가 더 손해가 크네.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스킬이 없는 이상은 생각 안 해도 되겠어.

뉴욕이 오후 다섯 시라는 것은 한국은 오전 6시라는 것.

민희는 돌아갔으려나? 아니면 벙커에서 자나?

방주로 돌아가서 잔 다음 다시 아침에 벙커로 오는 것도 모습이 조금 이상하긴 하네.

아마 벙커에서 자겠지? 그럴 확률이 높아.

쩝.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네. 시간 참 더럽게 안 가는구나.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진다.

하긴, 잠에게 할애해야 했던 시간을 온전히 내가 쓰게 됐으니 당연하긴 하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삶이 계속될 거야. 남들보다 1.5배는 긴 하루가.

지금은 스킬 숙련이라도 있지만…. 나중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벌써 고민되네.

그건 나중에 고민하고, 지금 당장 할 일이나 찾아본다.

이제 뉴욕에 있을 필요도 없고, 하와이는 갈 필요 없고.

라스베이거스나 갈까? 아. 위치스는 아직 인도에 있으려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스킬 숙련밖에 없다.

왜 장룡 그놈이 온종일 스킬 숙련을 했는지 알 거 같네. 녀석도 하루가 너무 길었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뜩 고성연 생각이 났다.

아무리 아들을 찾아줬다고 해도 많이 괴롭힌 게 있으니까 뒤처리를 하는 게 맞겠지?

게다가…. 저 여자가 뉴욕에 있으면 필요할 때 뉴욕을 잿더미로 만들 수가 없다.

신경 쓰이잖아.

하하.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거 신경 썼다고. 웃기네.

성연의 집으로 갔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여자.

아들놈은 요리를 하는 성연 근처의 식탁에 앉아있고.

엄마 곁이 좋은가? 하긴. 좋을 수밖에 없겠지.

잠금 해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들 녀석은 반갑게 나를 보고 인사한다.

"어! 안녕하세요!"

갑자기 아들이 인사해서 깜짝 놀란 성연은 고개를 휙 돌아봤고, 나를 바라보더니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잘 지냈냐. 엄마 속썩이지는 않고?"

"저 엄마 말 엄청 잘 듣는데요?"

"그래? 보질 못했으니 믿을 수가 있나."

"진짠데요? 완전 착하거든요?"

그런 녀석을 보고 피식하고 웃은 다음 고성연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표정 풀어. 아들 앞이잖아?"

경멸과 혐오와 증오와…. 암튼 안 좋은 것은 몽땅 다 담겨있던 표정이 억지로 굳는 얼굴로 변한다.

그런 성연에게 보란 듯이 식탁에 앉은 나는 민후에게 말했다.

"야.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아이스크림이요."

"그런 거 말고. 밥으로 먹을 거."

"없어요."

"정말? 치킨이나 피자 이런 거 안 먹고 싶냐?"

"피자는 어제 먹었어요. 치킨은 별로 맛이 없고."

"치킨이 맛이 없다고? 왜?"

"음…. 그냥 맛없어요. 퍽퍽하고. 느끼하고."

"니가 아직 맛있는 치킨을 못 먹어봐서 그래."

그렇게 말하고 나는 위시를 썼다.

치킨이 맛이 없다고? 하. 짜식. 니가 아직 어려서 K-치킨 맛을 제대로 모르는구나.

아니지. 모를 수밖에 없나?

"너 매운 거 잘 먹냐?"

"아뇨."

적당히 치킨을 위시로 시켰다.

빛나는 주머니를 본 민후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고, 거기서 갓 만든 간장 양념 순살 치킨이 나오자 우와! 하며 탄성을 지른다.

"먹어봐라. 이래도 맛이 없나."

바로 손으로 치킨을 집는 녀석. 그걸 입에 넣으려고 하자 갑자기 성연이 빼액 소리 지른다.

"최민후!"

깜짝 놀란 민후는 그대로 굳어서 자신의 엄마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슬쩍 치킨을 내려놓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죄송해요. 포크로 먹을게요."

그러더니 포크를 가지러 가는 녀석.

그것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닐 텐데. 하긴, 저 녀석은 지금 지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

"왜 애한테 그러냐? 성질부리지 말고 너도 앉지?"

나를 매섭게 쏘아보던 성연은 그대로 자신의 방에 들어간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

"니 엄마 요즘 기분 안 좋니?"

"음…. 조금요?"

그렇게 말하고 포크를 가지고 온 녀석은 나를 보더니 살짝 주저한다.

왜 그러지? 아하.

"야. 먹어. 먹어. 니 엄마는 간장 치킨 안 좋아하나 보다."

바로 포크를 찍어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는 녀석. 그러더니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야말로 우걱우걱 먹기 시작한다.

"아 참. 내가 정신이 없네. 치킨 먹으면서 콜라랑 치킨 무도 안주고. 개념이 없어. 개념이."

위시로 시원한 제로 콜라와 치킨 무까지 생성한 나는 녀석의 앞에 내줬다.

"야. 제로 콜라다. 맘껏 먹어라. 이건 먹어도 살 안 쪄."

"컵 가지고 올게요."

"어. 그래. 두 개 가져와라. 나도 좀 마시자."

컵 두 개와 포크 하나를 더 가져오는 녀석.

"형도 드세요."

"그래. 고맙다."

애가 예의는 참 바르네. 잘 컸어.

콜라를 따르고 나도 치킨 하나를 찍어서 입에 넣었다.

음…. 딜리셔스. 이 맛이지. 아름다운 맛이네. 이놈들 치킨 맛은 제대로 구현해 놨네.

그러고 보니 치즈버거도 그랬지.

"근데요."

입을 쉬지 않고 우물거리면서 나에게 말을 거는 녀석.

"뭐."

"이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이것도 스킬이에요?"

"아아. 이거? 스킬이랑은 조금 달라. 사실 나는 마술사거든."

민후의 표정에서 방금 성연의 표정이 살짝 나왔다.

얼굴에 '그건 좀' 이러고 쓰여 있는 표정이네.

"진짜래도? 야. 너 뭐 가지고 싶은 거 있냐? 말해봐라.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정말요?"

"일단 말해보라니까?"

"어…. 그럼 히어로 카드도 돼요? 캡틴 썬더러 카드요."

"히어로 카드? 캡틴 썬더러?"

"형은 캡틴 썬더러 몰라요?"

"몰라. 어디 히어로야?"

"여기요. 뉴욕."

"엥? 뉴욕은 히어로 없잖아?"

"네. 파괴자 모로도가 때문에 없어졌죠! 근데 이번에 스케빈져 크루가 나타났거든요? 새로운 빌런인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놈들을 막은 게 캡틴 썬더러에요. 그래서 지금 인기가 엄청 많아요!"

뭐지? 히어로 협회 그놈들 되게 마지못해 일하는 거 같던데. 언제 또 이렇게 일했데?

"모로도가 죽어서 새 빌런이 나온 건가?"

"어!? 모로도는 안 죽었어요. 파괴자는 지금 힘을 키우고 있어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죽였는데. 아. 설정이 그런 건가? 하긴. 코스튬만 있으면 대역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하. 정말. 히어로 협회 놈들. 이제 의미도 없는데 참 열일한다. 열일 해.

"빨리 캡틴 썬더러가 각성 해야 하는데."

참…. 잘먹히네. 하긴, 이 나잇대 애들이 이런 거에 민감하긴 하지.

"캡틴 썬더러라고?"

위시를 써서 캡틴 썬더러 히어로 카드라고 말하자 예의 그 주머니가 나오고 카드 한 장이 손에 잡혔다.

"우와!!!"

내가 카드를 건네주자 녀석은 잔뜩 흥분해서 두 손으로 카드를 잡고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파일 하나를 가져왔다.

안에 잔뜩 들어있는 카드들. 보니까 히어로 카드다. 방금 받은 캡틴 썬더러 카드를 가장 앞에다가 꽂아 넣는 녀석.

"형 진짜 멋져요!"

나도 참…. 웃기네. 뭐 좋다고 애랑 이렇게 놀고 있냐.

"민후야."

"네?"

"치킨 맛있냐?"

"네! 치킨도 맛있고 카드도 좋아요!"

"그래. 그럼 조용히 이거 먹고 방에 들어가 있을래? 나는 니 엄마가 삐진 거 같아서 좀 풀어줘야 할 거 같아."

"네!"

"엄마가 화낼지도 모르니까 어른들 이야기 할 때는 함부로 방에 들어오거나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그래. 말 잘 들으면 이따가 가기 전에 원하는 거 하나 더 선물로 줄게. 뭐 받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어."

"우와!! 진짜요!? 알겠어요!"

그러면서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파일을 들고 방으로 간다.

"야! 더 먹고 들어가도 돼."

"배불러요!"

그러고 보니 그사이에 제법 많이 집어먹었네.

암튼, 쟤를 방으로 보냈으니…. 이젠 성연과의 시간이 남았지?

성연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냉장고를 한번 열어봤다.

휑하네. 뭐 있는 게 없어. 오늘 저녁은 대체 뭘 먹으려고 했던 걸까?

그렇게 냉장고 문을 닫고 성연의 방앞으로 가서 문고리를 잡고 열려는데…. 문이 잠겨있다.

귀엽네. 웃겨.

잠금 해제로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다가 나를 노려보며 말하는 성연.

"나가."

"왜?"

뻔뻔한 내 말투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하긴, 자기 방에서 나가라고 했는데 왜냐고 물어보면 다 저런 표정을 짓겠지. 음. 정상이야.

화장대 의자를 끄집어내서 침대에 앉은 그녀 앞에 앉았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가더니 창밖을 바라보는 성연.

"아들이랑 사니까 좋냐?"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라서 성연이 내 말을 씹었어도 별로 상처 입진 않았다.

"근데, 되게 처량하게 산다."

내 말에 성연의 볼 근육이 실룩거리는 게 보인다.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수는 없겠지. 현실이 그런걸.

여기는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니 이곳으로 왔으면 먹고 살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근데 성연은…. 그저 재벌가 며느리일 뿐이다.

뭔가 잘하는 게 있기야 하겠지만…. 당장 식료품 사기도 쉽지 않을 거야.

근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버텼지? 아. 수납이 있던가? 가지고 있는 거라도 처분했으려나?

"고성연."

내가 불러도 미동조차 없는 여자.

그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봐?

"평생 음식 걱정 안 하고 목숨의 위협도 받지 않는 곳에서 살 생각은 없냐?"

내가 말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음…. 너무 터무니없었나? 역시 돌아볼 생각을 안 하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곳 뉴욕은 곳 폐허가 될 거야. 아마 살아있는 사람이 없게 될 거고. 너야 어떨지 모르지만, 니 아들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겠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지만…. 이미 그녀의 평정심은 깨졌다. 불안한 눈빛과 빨라진 호흡.

아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겠지.

자기 자신만 있었다면 아마 끝까지 평온하게 외면했을 테지. 하지만 아니잖아. 어떻게 찾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또 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질 거야.

"마지막 기회야. 고성연. 죽을지도 모르는 뉴욕에 남아있을래? 아니면 아무런 걱정 근심 없는 곳으로 가서 아들이랑 같이 행복하게 살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 볼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여자.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데."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왠지 야하다.

언제나 나에 대한 경멸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그녀.

그런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항복의 의미처럼 보였다.

본인이 두른 갑옷을 스스로 벗어버린 것 같은 모습. 그렇기에 옷을 입고 있어도 야하다.

마음이 꺾인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의 표정에서 체념의 기운이 보인다.

"몰라서 물어? 살려주려는 거지. 너랑 니 아들 둘 다. 내가 뭐하러 너를 미국까지 데려왔겠어?"

나를 바라보던 성연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여자. 그리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더니 나에게 말한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뭔데."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네. 그럼 나야 당연히 똑똑히 말해줄 수밖에 없지.

"벗어."

각오는 한 거 같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 나도 얻는 건 있어야 하니까.

다시 눈을 감는 성연. 그러더니 그녀는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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