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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록
크라켄의 본부로 왔지만. 와보고 나니 여긴 밤이다.
젠장. 빌어먹을 시차. 거지 같은 시차.
지구가 돌고 있으니 이건 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좆같은 건 어쩔 수 없네.
이미 잠든 녀석들. 볼 것도 없고 여기 있을 필요도 없다.
그래도 그냥 가기 뭐해서 안에 들어가 녀석들의 기억을 읽어본다.
스킬 12개인 놈들과 13개인 놈들이 반반 정도.
얼래? 13개인 놈들은 뭐지? 왜 남아있지?
아직 데리러 안 온 건가? 히든 스킬인 융해와 노화를 찍은 거 보면 녀석들의 역할은 다 한 거 같은데.
내일은 꼭 지켜봐야겠네. 당장이라도 데려갈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할 일을 하지만, 정작 머릿속은 승희의 말과 민희로 가득 차 있다.
하. 민희. 아….
차라리 방주로 들어갈 때 자연스럽게 빼낼걸. 타이밍이 안 좋았어.
지금은 방주에서 빼내 올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없잖아? 하아. 머리 아프네.
근데 아직 본인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혼자서 고민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시간 낭비잖아. 순서가 잘못됐어.
당연히 방주로 가는 게 맞지만…. 나는 영국으로 순간이동 했다.
일한다는 핑계로 현실을 회피하는 느낌이네.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할 건 해야지.
영국. 버킹엄 궁전.
아무리 논영 놈들이 혐성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유구한 전통이 있는 궁전을 모텔처럼 쓰고 있는 녀석들.
뭐, 따질만한 영국 놈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지들 팔자인걸.
아직 이른 새벽. 또 밤새 술을 처먹었는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는 놈들.
저딴 놈들로 뭔가를 하려 하는 크라켄 놈들도 제정신이 아니야.
얼마 전에 온 캐나다 놈을 보니 그사이에 혐지화 된 듯 거나하게 술에 꼴아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이놈들을 지켜볼 이유가 있나? 한심하네. 정말.
차라리 스멜리 코퍼레이션 놈들이나 찾아봐야겠다.
예전에 핏맨 녀석을 읽고 알아낸 녀석들의 본부가 있을 텐데…. 어디다 적어놨더라.
수납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메모장을 뒤져본다.
아. 여깄네.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 도시 이름하고는…. 아. 감자 칩 먹고 싶네.
그렇게 날아가려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어휴. 씨발. 뭐 하는 짓이야. 이건 아닌거 같네.
민희부터 해결하자.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니까.
방주로 바로 순간이동 했다.
비어있는 내 방. 언제든 와서 이용할 수 있게끔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
장룡이 있었던 흔적은 거의 없어졌다. 그냥 고급스러운 호텔 같은 느낌.
천리안과 투시로 민희가 어디 있나 살펴본다.
역시 보안실에 있네. 여긴 아직 낮이라서 일하고 있는 건가?
괜히 눈에 띄기 싫어서 축소에 투명화를 걸고 탐지를 봉인했다.
그리고 빠르게 보안실로 간다. 아. 여긴 너무 넓어. 가기도 겁나 귀찮네.
마침 진영이가 보안실을 나오면서 열린 문으로 냉큼 들어가니 민희는 화면에 걸린 모니터를 보고 있다.
그녀의 귓가로 가서 바로 작게 소곤거렸다.
"나야. 놀라지 마. 내 방에 있을 테니까 그쪽으로 와."
그렇게 속삭이고 떨어지자 민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면을 조금 더 보더니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 몸을 돌린다.
하이힐이 어울리는 여자. 오피스 룩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여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의 예전 직업이 의사였다는 건 생각도 못할거다.
변호사나 아나운서 같은 직업이었다고 생각할 거야.
근데…. 의사 가운 입고 있는 것도 이쁘겠지? 보고 싶긴 한데.
순간이동으로 먼저 가있을 까 하다가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민희의 뒤를 따른다.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받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는 모습.
간혹가다 사람들이 뭐가 문제라고 말해주면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 폰에 바로바로 적으면서 문제점들을 바로바로 접수한다.
그렇게 거의 내 방 가까이 온 그녀.
나는 순간이동을 해서 방으로 간 뒤 바로 축소와 투명화를 풀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척을 하는데…. 느긋하지가 않다. 왜 떨리냐. 웃기게.
바로 열리는 문.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오는 민희.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앉는다.
확 풍기는 향수 냄새. 아아. 머리가 마비된다.
"무슨 스파이 영화인 줄 알았네요."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알아들었으면 됐지."
"이리 와 봐요."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민희.
그러더니 책상 위에 있는 인터폰처럼 생긴 걸 보여주며 나에게 말한다.
"이걸 누르고 여기 보안실이라고 돼 있는 거 있죠? 이걸 누르면 보안실에서 받을 거예요. 다음부턴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이걸로 불러요."
"아. 그래? 그렇구나."
다시 소파로 가서 앉자 민희는 앉지 않고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러더니 내 무릎 위로 올라탄다. 훅하고 강하게 코를 때리는 향수 냄새.
눈앞에 보이는 하얀 블라우스와 안에 보이는 검은 브라.
이렇게 입으면…. 옆에 있는 남자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나? 일 못 할 거 같은데.
"천하의 권성철 씨가 대체 무슨 고민이 있어서 이렇게 얼이 빠져있을까?"
나를 내려다보는 민희의 얼굴. 이야. 이 각도에서 바라봐도 이쁘네.
"글쎄. 제법 긴 이야긴데."
"어머. 길어요? 금방 다녀온다고 하고 왔는데."
"길어. 심각하고."
"흐응. 이거 겁나네요. 왜 이렇게 겁을 주지?"
그러더니 내 무릎 위에서 일어나 아까 나에게 알려줬던 책상의 인터폰으로 가더니 버튼을 누른다.
[보안실입니다.]
"저예요. 정 민희."
[아. 실장님. 네. 말씀하세요.]
"여기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아요. 그러니 내가 못 가도 아까 말했던 거 진행해요. 막히는 거 있으면 급한 거 아니니까 그냥 놔둬요. 천천히 봐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인터폰을 끊고 다시 내게 돌아온 그녀는 이번엔 옆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그럼…. 들어볼까요? 대단한 성철 씨의 고민을?"
"뭐야. 왠지 놀리는 기분인데."
"어머?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요."
잠시 말을 하지 않자 민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말한다.
"미안해요. 기분 나빴어요?"
"아냐. 딱히 그런 건 아냐.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고르고 있었어."
"진짜 심각한 이야긴가 보네. 매번 듣는 사람 신경 안 쓰고 툭툭 말하더니."
"당연하지. 니 이야기니까."
"저요?"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여자.
이야기를 듣는 건지 나를 유혹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한번 할까? 하고 나면 머리가 좀 개운해질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다. 말 꺼내기가 힘들긴 하지만 빨리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는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결국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방주의 일은 맘에 들어?"
"맘에 들죠.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치? 하아. 그렇긴 하겠지."
기껏 말을 꺼냈는데 다시 속으로 꿀꺽 넘어간다.
아. 진짜 오늘은 왜 이리 말하기가 힘드냐. 이 정도로 고민하는 것도 웃기는데.
"성철 씨."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내 옆에 않는 민희.
그리고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풀더니 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속에 쑥 넣는다.
"뭐 하는 거야?"
"머리가 복잡해 보여서요."
민희의 가슴에 손이 들어가자 모든 정신이 손으로 몰렸다.
순간적으로 복잡한 고민 같은 건 신경 안 쓰일 정도로.
와. 이거 효과 죽이네. 역시 가슴은 만병통치약인가?
"고마워. 덕분에 정리가 되네."
그런 나를 보고 싱긋 웃는 민희. 내가 손을 빼자 브라를 정리하고 다시 블라우스 단추를 채운다.
음. 그냥 열고 있지. 아쉽게.
"내가 너보고 방주를 떠나서 나랑 같이 살자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냥 내질렀다.
내가 무슨 고민이냐. 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닌데.
선택과 결정. 그건 민희가 할 일이다. 일단 알려줄 건 다 알려줘야지.
"나는 같이 사는 여자가 넷 있어.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이야기했다.
잠꼬대. 민희의 이름을 말한 것. 네 여자의 결정.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것.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가?"
"당신이 함께 사는 여자들이 있다는 거."
"그래. 저번에 넌지시 이야기했지."
"재밌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왔죠? 겨우 잠꼬대 가지고 이런 이야기가 나올 일은 아닌 거 같은데."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모습.
다시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희.
"그래.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겠지."
허리를 한번 쭉 펴고 민희를 바라본다. 과연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써 궁금하네.
"Q&A라는 스킬이 있어."
"질문과 답인가요? 누구에게?"
"세상을 이렇게 만든 놈들."
민희의 눈이 커진다. 그래. 놀랍겠지. 그게 당연하지.
"그리고 나는 그놈들에게 왜 세상이 이렇게 됐느냐고 물어봤어. 대답이 어땠을 거 같아?"
"그걸…. 알 리가 없잖아요. 빨리 말해봐요."
"녀석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을 찾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어."
"마지막…. 한 명?"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 하긴, 저 이야기를 듣고 덤덤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웃기지? 마지막 한 명이라니. 이렇게 사람 죽이는 스킬을 잔뜩 만들어 놓고 말야. 게다가 그걸 배울 수 있는 재화는 오직 코인인데 그 코인은 사람을 죽여야 얻을 수 있어. 참…. 잔인한 놈들이지."
내 말을 들으면서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죽일 수 있어도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 나랑 사는 여자들. 그리고 너."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민희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의 눈과 마주친다,
"설마…. 방주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인가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살짝 겁먹은 건가?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내가 방주 사람들을 왜 다 죽여."
"나보고 방주에서 떠나라고 했잖아요."
"아. 참. 그랬지. 내가 말하는 순서가 조금 이상하게 됐네. 그건 그거 때문이 아냐. 음…."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상태 회귀라는 스킬이 있어."
"상태 회귀. 네. 계속 말해요."
"회귀 스킬은 알지? 내가 쓰는 거 많이 봤으니까."
"그렇죠. 여기 방주에도 회귀 스킬 있는 사람도 있으니."
"회귀는 사람에게 못 쓰지.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체에게는 쓸 수 없지."
설마 하는 표정의 민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눈치챘나?
"상태 회복은 사람에게 쓸 수 있어. 원하는 나이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지."
내 이야기를 듣자 자신의 입을 살짝 가리는 모습.
얼굴 가득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나는 나와 사는 여자들과 방주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죽일 거야. 그리고 느긋하게 지켜보는 거지. 방주의 사람들이 모두 제 수명을 누리고 늙어 죽는 모습을. 이 상태 회귀 스킬로 계속 어려지면서."
"세상에…. 그런데. 제가 왜 방주를 나가야 하죠? 그럼 그냥 여기 있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상태 회귀를 너에게도 쓰고 싶거든."
"아…."
"민희 니가 계속 방주에 남아있는데 갑자기 어려진다면 혼란이 생기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방주의 사람들에게 모두 이 스킬을 써주고 싶지도 않고."
"왜죠?"
"글쎄.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망한 세상에서 이만한 곳을 찾아서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내 할 일은 다 한 거 아닐까?"
"그렇긴…. 해요. 사실 이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아야 하죠."
"굳이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잠시 말이 없는 민희.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럼 나에게 그 스킬을 쓰려는 이유는 뭐예요? 설마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 같지는 않고."
"어휴.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런 생각은 안 해. 나는 민희 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흐응…. 은근히 사람 기분 좋게 만든다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여자. 뭔 짓을 해도 저렇게 앙큼하냐.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거 같지는 않네.
"다른 게 아니야. 나랑 같이 사는 여자 중에 안나라고 있어. 러시아 태생인데…."
안나의 이야기를 해줬다. 너무 자세히는 말고 간단하게. 안나도 안나의 프라이버시란 게 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다 들은 민희는 땅바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생각이 길어지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렸다.
"과거의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닌데."
내가 생각한 반응과는 다른 말.
되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네. 되게 심각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