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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번째 스킬
새벽 6시. 애매한 시간이네.
여기저기 갈 곳은 많은데 어디든 시간이 애매하다.
그냥 앉아서 숙련이나 하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상태 회복을 일단 마스터 해놓고 뭐든 해야겠어.
아침 8시. 드디어 상태 회복을 마스터했다.
하아. 이렇게 또 하나 스킬이 늘어나네. 그럼…. 할 게 많지. 일단 패시브부터 먼저 찍고.
스킬 반경 증가32, 스킬 지속 시간 증가32, 스킬 최대 수치 증가26, 스킬 한계 돌파26.
좋아 일단 패시브는 찍었고. 이제 바로 할 걸 해야지.
"원트."
눈앞에 뜬 창. 바로 패시브 화를 눌렀다. 그러자 나오는 스킬 목록.
목록에 있는 상태 회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바로 선택했다.
['상태 회복'을 패시브 스킬로 변환하는데 1억 코인이 소모됩니다. 변환하시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스킬 창에 패시브로 표시되는 상태 회복.
그렇다면 나는 이제 기절이나 마비, 수면, 매혹, 침묵 같은 거에 면역이라는 소리네.
매혹에 면역이 된 것도 괜찮네. 적어도 위치스에게 실수해서 매혹 당할 일은 없게 됐으니까.
피할 수 없는 수면을 생각하고 나에게 수면을 걸어봤다.
안 걸릴걸 알기에 스킬을 망설임 없이 쓸 수 있다. 근데 이렇게 쓰다가 잠들어버리면 그것도 레전드겠네.
정확하게 80번. 체력이 제법 바닥난 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수면을 걸었는데도 잠이 들진 않았다.
비로써야 내가 잠을 극복했다는 게 실감이 나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
결국, 그놈은 이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녀석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어.
아. Q&A로 물어볼까? 불면증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는지?
지금 걸려있는 거 답변받으면 다음에 질문해봐야지. 답변을 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어쨌든 됐어. 하고 싶은 건 일단 했고.
Q&A 삭제는 나도 질문 진행 중이니 삭제해봐야 안 되겠지. 의미 없어.
이젠 스킬을 찍어야 하는데…. 일단 보호막부터 찍어야겠지?
그동안 찍는다 찍는다 해놓고 못 찍던 스킬인데. 이제야 찍게 되네.
보호막을 누르고 바로 배웠다. 할 거면 빨리하는 게 낫지.
스킬 창에 생겨난 보호막. 배웠으니 바로 써본다.
"보호막."
많이 봐왔던 희뿌옇지만 투명한 보호막.
약간 폴터가이스트랑 비슷한 느낌이다. 뭐…. 됐어. 하도 많이 봤더니 별로 새로운 느낌은 없네.
그렇게 보호막을 찍고 적당히 숙련을 해보는데 안나의 기척이 자신의 방에서 나와 내 방 쪽으로 다가온다.
문을 빼꼼 여는 안나.
"일어났어?"
내 목소리를 듣자 씨익 웃더니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일찍 일어났네요?"
"어. 그렇게 됐네."
나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안나. 그러더니 갑자기 내 뺨을 잡고 바로 키스한다.
부드러운 입술을 잠시 느끼고 안나의 얼굴이 떨어진다.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안나. 정말 신기하네. 매혹에 걸린 것도 아닌데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나."
"네?"
"내가 그렇게 좋아?"
사랑스럽다는 표정이 더욱더 짙어졌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당연하죠."
"신기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지."
"저도 그래요."
6년 전의 권성철에게 이런 소리를 했다면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거야.
이 세상이 망하고 너는 존나 짱짱 세진 데다가 너를 좋아하는 존나 이쁜 러시아 미녀가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라도 정신병자 취급하겠지.
"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음?"
"세아랑 씅희에게 외출하는 거 허락해줬잖아요…."
"무슨 허락이야. 내가 뭐 걔들 억지로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혼자 돌아다녀도 어느 정도 안전하니까 한 소리지."
"아…."
"안나. 너도 여기 올 때부터 자유였어. 나는 너를 억지로 감금해 놓는 악덕 포주가 아니라고."
내 말에 안나가 살짝 쓴웃음을 짓는다.
음. 포주라는 말은 괜히 했나? 괜히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닌가 모르겠네.
"왜. 너도 세상이 궁금해져서?"
"아…. 그게요. 저도 봉인 마스터 했거든요?"
"아. 그래? 고생했네. 그래서?"
"순간 이동을 배우고 싶어서요.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그래. 배워도 좋지. 너도 게이트까지는 찍어."
"고마워요."
"고맙기는. 이제는 스킬 고르는 것도 다 니 자유야.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계속 골라줬으면 좋겠어요."
안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고운 백조 같은 여자다.
보고 있으면 아름답고 늘씬늘씬한 느낌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나 보다.
게다가 러시아는 발레고 발레 하면 백조의 호수잖아? 그래서 그런 느낌이 더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외모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면은 아니다.
오리. 그것도 막 알에서 깨어나 나를 각인한 새끼 오리.
성인이 되기 전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 그런가 유독 그런 부분이 있는 거 같다.
물론 그게 기분 나쁘거나 흠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살짝 걱정될 뿐이지.
이제 그 새끼 오리도 자신이 백조라는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런 그녀가 혼자 날갯짓해서 날아보겠다고 하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근데, 어디 가고 싶은데?"
"아. 그거요…. 당신 러시아 쪽 게이트 또 열어줄 수 있어요?"
"러시아? 아. 혹시 너희 집?"
"네."
그러면서 약간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안나.
"아직 있지. 거기 가보게?"
"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집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일이 제법 커지겠네."
"어차피 시간은 많잖아요."
"그렇긴 해. 그럼 지금 순간 이동 찍을 거지?"
"네."
"그럼 바로 다녀오자. 아. 아니다. 잠깐 있을래? 저장 된 게 아마 너희 집 근처가 아니고 루블료프카일거야."
"루블료프카? 아아. 그래도 그리 먼 곳은 아니네요."
"응.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 금방 가서 찍고 올게."
"같이 가요. 같이 가면 되지."
"아. 그러네. 그럼 바로 가자. 뭐 따로 준비할 거 없잖아?"
"네. 그래요."
"잠깐 애들에게 말하고 가자. 근데 일어난 애가 없네."
"쪽지 남기고 가죠."
"아. 그러면 되겠네."
거실에 쪽지를 남기고 바로 러시아 루블료프카 게이트를 열었다.
그렇게 넘어간 나와 안나.
근데 넘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분위기가…. 왜이래?
"탐지."
"탐지."
나와 안나가 동시에 탐지를 돌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기척. 하지만 예전의 그 기척의 숫자가 아니다.
세상이 망했어도 발레까지 즐길 정도로 현실감 없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느껴지는 기척이 거의 없다.
그러고 보니 건물들도 정상이 아닌 게 많네.
깨진 유리창, 그을린 자국. 무너진 곳도 몇 개 있고…. 확실히 뭔가가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글쎄. 바로 알아보면 되겠지. 어…. 어떻게 할래? 돌아갈래?"
"혹시 제가 방해되나요?"
"아니. 방해…. 까지는 아닐 텐데. 내가 누가 옆에 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럼 잘 따라다녀 볼게요. 방해 안 되도록."
"그래. 뭐 다급한 상황은 아닌거 같으니까. 그럼 잘 따라와. 스킬 사용 불가 지대 봉인하는 건 잊지 말고."
"네."
일단 남아있는 기척들을 살펴본다.
몇 안 되는 기척. 그중 하나를 살펴보니 한 남자가 비어있는 집에서 식량 창고 같은 곳을 뒤지고 있다.
일단 저놈으로 할까?
"간다."
안나를 위해서 굳이 축소를 쓰지는 않았다. 바로 블링크 후 깨진 건물 유리창 안으로 다시 블링크를 썼다.
그리고 건물 안쪽에서 녀석이 보이는 쪽으로 가 바로 수면을 날린다.
녀석이 상태 회복을 패시브로 만들어 놓지 않은 이상은 무조건 잠들 수밖에 없는 스킬.
그렇게 쓰러진 녀석에게 다가가 바로 기억을 읽는다.
다행히 녀석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긴. 상황을 아니까 이런 곳에서 당당하게 물건을 뒤지고 있겠지.
고마운 정보를 준 녀석을 수납 안으로 초대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코인을 선물로 주는 녀석.
"또 간다."
"평소대로 움직여도 돼요. 잘 따라가 볼게요. 어차피 파티로 위치는 다 보이니까. 가기 힘든 곳이면 멀리 떨어져 있을게요."
"그래? 알겠어."
건물 바깥으로 나가 다음 기척을 찾는다.
짧은 시간 안에 폐허가 된 곳. 그리고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놈들이라면 그리 대단한 녀석일 리는 없다.
바로바로 재우고 기억을 읽은 다음 수납으로 초대한다. 어휴 오늘은 오랜만에 입주민이 꽤 있네.
그렇게 한 열 명 정도의 기억을 읽으니 대충 윤곽이 잡혔다.
"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네. 그럼 가자. 안나 너희 집으로."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음…. 가면서 이야기할까?"
"네."
하늘로 떠올라 모스크바 외곽을 향해 날아간다.
이스트라. 스타르체바 저택이 있는 곳.
안나의 비행 속도에 맞춰서 날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엄청 빠르네. 하긴, 안나도 한계 돌파 패시브는 착실하게 찍으니까.
"그러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스멜리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가 있어."
그렇게 안나에게 기억에서 읽은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줬다.
루블료프카가 저 꼴이 된 건 결국 그 녀석들 짓이었다. 스멜리 코퍼레이션. 경호업체를 빙자한 학살자들.
물론 저곳을 저렇게 만든 건 녀석들의 짓이 맞긴 하지만…. 사실 그 원인은 나였다.
이바노비치가 핏맨에게 당할뻔한 거라고 이야기를 만든 게 나니까.
나 때문에 스멜리 코퍼레이션을 견제하기 시작한 이바노비치.
하지만 이바노비치의 견제는 의미 없었다.
스멜리 녀석들이 지금까지 힘이 없어서 경비견 역할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녀석들은 미련 없이 자신들이 지켜오던 집주인을 물어버렸다.
그들을 채우고 있던 목줄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주인인 줄 알았던 녀석들은 순식간에 목덜미가 뜯겼다.
그 결과가 지금의 루블료프카의 상황이다.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과거의 잔재는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렸고, 이바노비치 역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됐다.
간단하게 그런 것들을 말해주자 안나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진다.
"그럼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글쎄. 내가 알기론 스멜리 코퍼레이션 녀석들은 지금 유럽 쪽에 있어. 루플료프카를 이렇게 박살 내놨으니 여기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근데…. 맘에 안 드네. 개새끼들.
감히 안나의 첫 비행을 이런 식으로 훼방놔?
"만약에, 제가 그들과 마주치면 위험할까요?"
안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한다.
그때 핏맨. 그놈은 확실히 무섭긴 했다. 답이 없어 보였으니까.
근데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녀석들이 강하긴 했지만…. 니가 더 강할 거 같은데. 너는 블링크로 거리를 벌리고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깔기만 해도 이길 수 있으니까."
"으음."
"거기에 데스 윈드면…. 어지간해선 아무도 못 이기지. 이 세상 남은 4억 중에서 그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될 거 같은데."
"그 정도예요?"
"어. 그 정도야. 다 왔다. 이 근처지?"
"네. 저쪽이네요. 가죠."
상태 회복을 패시브로 만들어버린 나는 데스 윈드에는 면역이 됐을 거다.
나는 출혈에 당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베이거나 상처가 생겨서 나는 출혈까지는 못 막겠지만 스킬로 인한 출혈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와 안나는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왔던 이후로 딱히 변한 것은 없어 보이는 스타르체바 저택.
다시 이곳에 오게 된 안나는 뭉클한 눈으로 저택을 바라보고 작게 '저장'이라고 말한다.
"회귀가 저택에 통째로 적용이 된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는 안 되죠?"
"어. 회귀는 제약이 좀 많이 심하니까. 단일 개체에만 적용되고 조건도 까다롭지."
그렇게 생각했다가…. 뭔가 머리에 뭔가 떠올랐다.
내가 회귀를 썼던 건 거의 제약 해제가 있기 이전이었잖아? 게다가 원트가 있기 전의 상황이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 나에겐 스킬 조합이 있어.
"잠시만."
바로 원트를 썼다. 그리고 스킬 조합을 눌러 스킬 조합 목록에서 일단 회귀를 올린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상태 회복을 올렸다.
지난번 테스트때는 상태 회복이 없었기에 해보지 못했으니까.
[조합하시겠습니까?]
떠오르는 메시지. 바로 예를 누르고 기다린다.
과연…. 이게 될까? 될 거 같은데. 일단 스킬 이름만으로는 그럴 듯하잖아?
['상태 회귀' 스킬이 조합되었습니다. 스킬을 배우는데 3억 코인이 소모됩니다. 배우시겠습니까?]
"아싸!"
이예쓰! 예쓰! 역시 됐다. 크. 나의 상상력. 정말 무시무시하네.
내가 소리치자 깜짝 놀라는 안나.
그런 안나의 반응은 잠시 접어두고 바로 예를 눌렀고 스킬이 생겨났다.
"왜…. 왜요? 무슨 일이에요?"
"후우. 잠시만. 이게 과연 생각하는 그런 스킬이 맞나 모르겠네."
그렇게 스타르체바 저택을 바라보며 나는 바로 스킬을 쓴다.
제발 돼라. 돼라. 됐으면 좋겠네.
"상태 회귀."
내가 범위로 설정한 곳은 눈에 보이는 스타르체바 저택 그 자체.
그리고…. 눈 앞에서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간을 빠르게 거꾸로 돌린 것 같은 모습.
저택을 침범하고 있던 식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깨졌던 유리창이 다시 생겨난다.
구멍 난 지붕이 메꿔지고 부서졌던 벽돌들이 다시 달라붙는다.
"세상에…."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리는 안나. 그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안나의 눈앞에서 시간을 거스른 저택은 다시 예전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안나의 기억에서 봤던 스타르체바 저택. 그 고고하고 웅장했던 그때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