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29화 (61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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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들

"융해는 몸을 물로 만든다고요?"

"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몸이 전부 물이 되는 겁니까? 그럼 뇌는요? 시력은? 촉각은? 힘줄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살죠?"

"음…. 너무 그렇게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순간 이동을 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 그렇긴 하네요. 아니…. 물로 변한다길래 기가 막혀서요."

정 부장의 말에 승규와 민희가 가볍게 웃는다.

하긴, 물로 변한다는 건 약간 와닿지 않긴 하지.

"한번 직접 봤으면 좋겠는데."

승규의 말에 이번엔 정 부장과 민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개념만으로 뭔가를 생각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거 같아 보이네.

"노화라고 하면…. 결국은 성장의 연장인 거잖아요?"

"그렇지. 성장이 동영상 10초 뛰어넘기라면, 노화는 10분 뛰어넘기 같은 느낌이지. 아니 영상 거의 끝부분으로 넘겨버리는 느낌?"

"융해…. 노화….“

그렇게 중얼거리는 민희. 의사였던 그녀는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려나?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에요. 한번 생각해보시라 이거죠. 도저히 제 머리로는 생각나는 게 없어서."

"알겠습니다. 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군요. 아. 이거 최 박사에게도 말해줘도 됩니까?"

"아.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분?"

"본인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상처받아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네. 상관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생각할수록 뭔가를 더 알아낼 확률이 높아지겠죠."

크라켄의 윗대가리가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진심으로 기억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정말 알고 싶다. 진짜로.

"그럼…. 그건 그렇고. 성철 씨? 오늘은 도망가지 말고 식사하고 가요."

정 부장이 그렇게 말하자 승규 형이랑 민희도 눈을 반짝인다.

"아…. 타이밍을 뺏겼네."

"한두 번 당해봅니까? 오늘은 식사하고 가세요. 여기 와서 밥도 한 끼 안 먹어 봤잖아요."

"에휴. 그래요. 그러죠. 근데…. 메뉴는 뭡니까?"

얼마 뒤 나는 식당에서 내 눈으로 직접 메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돈가스 정식과 제육 정식, 회덮밥. 셋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메뉴.

"이야…. 택일이라니."

"놀랍죠? 세상이 이렇게 되고 결국 남는 건 먹는 거밖에 없는데. 제대로 먹어야죠."

"회덮밥이라니. 사치스럽네요."

"후후후. 양식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해서 이제는 생선 정도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양식장이 큰가 보죠? 저도 아직 제대로 보진 못해서."

암행하면서 봤다는 말은 못 하니 짐짓 모른 체하고 물어본다.

그러자 정 부장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크기도 크긴 하지만, 물고기에게도 성장을 쓸 방법을 알아냈거든요."

"아…. 그래요? 원래는 못 썼어요?"

"처음에 와서는 조금 헤맸죠. 근데 해결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럼 저는 회덮밥."

그렇게 각자 메뉴를 골라서 식사를 받으러 간다.

"저쪽 가서 받아오시면 돼요. 받아오시죠."

정 부장과 승규, 민희는 셋 다 제육 정식을 골랐기에 우르르 몰려간다.

으음. 다들 한식파인가? 30대라 이건가?

회덮밥을 받으러 가니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다들 물고기가 그립긴 했겠지. 뭐….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오빠!?"

회덮밥을 받는 곳에 가니 하루카가 있었다.

그리고 회덮밥을 받으면서 하루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도 제법 있다.

아…. 물고기가 문제가 아니고 하루카가 문제였구나. 그냥 얘를 보러 회덮밥을 고른 건가?

"잘 지내고 있어 보이네."

"네! 식사 준비하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재밌어요! 사람들도 다들 친절하고!"

하루카는 통역이 없기에 아마 지금 말하는 건 일본어일거다.

하루카를 보던 남자들은 나를 보고 '저 새끼는 뭔데?' 이런 표정을 지었지만, 주변에서 뭐라고 속삭이자 다들 뜨악한 표정이 된다.

그래. 이놈들아. 내가 방주의 주인이라고. 건방진 놈들.

"자요. 여기 오빠 음식 나왔어요!"

뭔가 다른 사람들의 회덮밥에 비해 위에 올려져 있는 게 좀 많아 보이긴 하는데….

이거 괜찮나 몰라. '방주의 주인. 특혜 논란!?' 이러면서 소문이 퍼지는 거 아냐?

근데…. 특혜 받으면 어때? 아니지…. 특혜받으려고 이런걸 만든 건데!?

"바쁜 거 같으니까 이따 봐."

"네! 맛있게 드세요!"

회덮밥을 받아서 정 부장과 승규, 민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식사시간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지만,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이거…. 대학교에서 학식 먹었을 때 생각나네.

어차피 혼자 뭐 먹는 거에 별로 가슴 아파하거나 한 적은 없긴 하지만.

"어서 드세요."

이미 밥을 먹고 있는 세 사람. 나는 민희 옆에 앉아서 받아온 회덮밥을 비빈다.

그리고 한 입 크게 떠서 입에 넣자…. 어우. 행복하네. 이건 말도 안 돼.

"어때요? 끝내주죠? 요즘 식자재 생산하는 보람이 있다니까요."

확실히 정 부장은 상당히 신나 보인다.

다룰 수 있는 식재료의 폭이 넓어져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여기는 중국 사람들이 만든 거라 그런지, 별의별 식자재 생산이 다 되게 해놨더라고요. 아마 앞으로는 음식 걱정은 안 하고 살아도 될 거 같아요."

"그건 다행이네요. 냠. 정 부장님이 식량 생산하시는 거죠? 그럼 승규 형은?"

"나는 시설물 관리 감독."

"아아. 뭐 좋은 거 있어요?"

"수영장?"

"아항. 별게 다있네."

"그것뿐만이 아냐. 탁구장, 볼링장….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있어. 게다가 진영이가 밖에서 조달해와서 피시방도 있는걸."

"엥. 어차피 할 수 있는 게임이 없는데 피시방은 뭐하러요."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민속놀이가 있는데."

"민속놀이? 아…."

"그거 말고도 이것저것 뭔가 준비하던데. 몇 명이 모여서 게임 클라이언트 뜯어서 프리섭 만든다는 소리도 있고."

"하…. 정말 대단하네요. 어쨌든 여기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겠네요."

"그치. 다들 방주라고 부르긴 하지만 낙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

"음…. 노동강도를 높여야 하나? 폭군으로 거듭나야겠네요."

그렇게 밥을 또 한입 떠먹고 이번엔 민희를 본다.

"민희는?"

"저는 보안 담당자."

"아키랑 겹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물어보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뭐?"

돈가스 정식을 들고 내 옆에 앉으며 말하는 아키.

"오. 아키 양 오셨군요."

정 부장이 인사하고 승규와 민희도 가볍게 인사한다.

아키 역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다.

"아니 민희가 보안 담당자라길래. 너랑 비슷한 거 아닌가 싶어서."

"달라요. 비유하자면, 저는 경찰이고 아키 씨는 군대죠."

"아아. 내부관리와 외부의 적. 그 차이구나."

"맞아요."

생각해보니 웃기네. 생산과 시설 관리 같은 건 남자들이 하고 있고 보안과 무력을 담당하는 일은 여자들이 하고 있어.

이게 진정한 남녀평등이 아닐까? 크. 깨어있는 방주네.

"별문제는 없고?"

"약간 사소한 다툼 같은 게 몇 건 있긴 했는데, 잘 해결됐어요. 크게 문제 발생 시 바로 추방이거든요. 그러니 다들 적당히 하다가 멈추죠."

"추방? 뭐하러? 그냥 죽여."

내 말에 다들 밥 먹는 걸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너무 심해?"

"지나친 엄벌주의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에요."

민희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다. 이거 왠지 외로운 싸움이 될 거 같은데.

"왜?"

"섣불리 죽였다가 그 사람이 무죄면요?"

"아. 그래. 그게 사형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지. 근데 나는 기억 읽기가 있어."

"아…."

정 부장, 승규, 민희, 아키까지.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여간, 다들 순해 빠져서는.

"기억 읽기와 매혹. 그거라면 자신이 한 짓이 맞는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아. 도둑질, 폭행, 강간, 살인…. 뭐든 상관없어. 의심나면 잡아놔. 바로 확인하면 되니까. 그리고 죄가 확인되면 바로 죽일 거야. 그딴 놈들을 먹여 살리려고 여길 운영하는 게 아니니까."

조금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이 반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들 5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예전 세상의 잔재에 얽매여 있는 거 같네. 신기한 사람들이야.

"아. 잘먹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아. 아니다. 정 부장님?"

"네?"

"그 도축해주시던 영감님 어디 있어요? 그분 만나러 가야 하는데."

하루카가 키우던 동물들. 전부 아직 수납 안에 있으니 이것도 건네줘야지.

"저도 다 먹었으니 같이 가시죠."

"아. 저도 같이 가요. 볼일이 있어서."

웬일인지 민희도 나를 따라온다.

그렇게 정 부장과 민희를 데리고 지난번의 그 도축 영감님을 만나 수납 안에 있던 동물들은 전부 건넜다.

"니 고기 더 안 필요하나?"

무뚝뚝한 말투지만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느껴지기에 주는 고기를 잔뜩 받아 수납에 넣었다.

또 고기 파티를 할 수 있겠네. 행복하구만.

"갈 거예요?"

그렇게 고기를 받자 정 부장이 말했고, 나는 민희를 한번 바라보고 말했다.

"민희도 볼일 있는 거 같으니 그거 보고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부담 가지지 말고."

"아. 그럼 오늘 먹은 회덮밥이나 더 가져가야겠네요. 수납에 넣어놨다가 배고프면 먹게."

"그래요. 그건 식당가서 말씀하시면 될 거에요."

사실은 승희랑 미나, 세아랑 안나에게 주고 싶은 거지만.

어쨌든 그렇게 식당에 가서 말하니 유정 형수와 하루카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음식들을 챙겨준다.

덕분에 돈가스와 제육, 회덮밥도 잔뜩 챙긴 나는 그녀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민희를 바라봤다.

"왜?"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죠?"

아니…. 이여자는 왜 또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뭐, 나야 좋지. 아까 저장해 놓은 장룡의 방이었던 곳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바로 민희와 함께 넘어간 나는 게이트를 닫았고,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민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바로 소파에 가서 앉는다.

얼래. 뭔가 느낌이 싸한데.

"앉아요. 왜 서 있어요? 여긴 당신 방인데."

민희의 곁에 가서 앉자 그녀는 조금 전의 딱딱한 모습이 아닌 원래대로의 모습이 되었다.

잠시 그렇게 내게 몸을 기대고 있던 그녀는 약간 나른한 말투로 입을 연다.

"지난번에 말하려던 거 기억해요?"

"엉?"

내가 뭘 말하려고 했었지?

"기억 안 나나 보네요. 여자 이야기요. 여자."

"아…."

갑자기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아. 그걸 까먹고 있었네. 맙소사.

"내가 방주 들어온 이후로 요 며칠간 잘 살펴봤는데요."

"응."

"펜스에서 온 윤서 씨, 송이 씨, 정현 씨, 지원 씨랑 지아 자매. 그리고 청평에서 온 지연 씨."

민희의 입에서 여자들의 이름이 나오자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다.

아. 이거 뭐지? 무슨 상황이야?

"당신이 안았던 여자들. 맞죠?"

"너 기억 읽기 있니?"

"그런 건 기억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왜 그리 주눅 들어있어요. 바람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어?"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크게 신경 안 쓴다고."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민희의 표정은 뭐랄까 음흉한 느낌이다.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

"근데…. 오히려 나는 당신의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가 맘에 안 드네요."

"무슨 소리야? 뭐가 미적지근해?"

"마음을 줬으면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해야죠.“

"딱히 내가 마음을 주거나 한 건 아닌데."

내 말에 민희가 인상을 쓴다.

어우. 쟤의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네.

"당신은…. 어떤 부분에선 정말 극단적으로 진보적인데 의외의 부분에선 지독하게 보수적이네요."

"어…. 친한 사람이랑은 정치 이야기하는 거 아닌데."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는다. 그래. 인상 쓰지 마. 웃는 게 좋지.

"당신은 세상이 망한 이후에 얻은 정보들에 대해서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깨어있는 거 같아요. 스킬이라던가, 생존이라던가, 발상이나…. 그런 것들."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입을 여는 민희.

"근데 꽉 막힌 부분도 있어요. 아니. 서투른 느낌? 인간관계나 여자관계 같은 거…."

"어우. 정확하네. 맞아. 그건 나도 인정해. 사실 나는 세상이 망하기 전엔 뭐 특별할 거 없는 별 볼 일 없는 놈이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찐따?"

"그렇게 말하지 마요. 서툰 부분이 있다고 그걸 그런 식으로 비하할 필요는 없어요."

민희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 이 여자는 왜 내 결점을 본인이 감싸주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에요. 자주 와요. 자주 와서 얼굴 자주 비추고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봐요. 당신의 작은 관심에도 좋아할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말을 한 민희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 가게?"

"네. 할 말 다 했으니까 가야죠."

"그냥 이렇게 간다고?"

"왜요?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옷을 정돈하는 민희.

"알면서."

"후후. 오늘은 아니에요. 내 생각나도 참아요. 당신에게 주는 벌이야. 그럼, 나는 가요."

그렇게 말하고 순간 이동이라고 작게 말한 뒤 사라져버리는 민희.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옅은 향수 냄새만 은은하게 남아있게 됐다.

하. 진짜. 요망한 여자네. 정말. 자기 할 말만 쏙 한 다음 가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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