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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켄
다섯 방향으로 흩어진 남녀.
사람의 기척이 있는 곳으로 간 그들은 굉장히 능숙하고 침착하게 민간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야 뭐 이제는 익숙해져서 별 느낌은 없지만, 이들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잘 훈련된 특수 부대 같은 느낌. 그리고 기계 같은 움직임.
기척이 있는 곳으로 가서 문을 열고 보이는 인간들에게 바로 바람 칼날을 날린다.
사람이 전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다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간혹 보호막이 있는 사람이 나오면 바로 번개 주먹을 써서 제압하는 모습.
그렇게 다섯팀으로 나뉜 남녀는 빠르게 기척들을 지워나간다.
탐지로 그 기척을 보고 있는 나는 마치 종이가 불타서 사그라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작 20명으로 이렇게 빨리 사람들을 지울 수 있다니. 진짜 신기하네.
더 신기한 건, 스무명이 전부 바람 칼날을 쓴다는 거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비명이나 소음도 없다. 그저 조용한 학살만이 있을 뿐.
뭐 하는 놈들일까?
빨리 밤이 왔으면 좋겠네. 기억 읽기가 간절해.
녀석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얼마 있지 않아 이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다.
간판을 하나 발견했다. 리우데자네이루 52킬로미터라고 쓰여 있는 간판.
그럼…. 여긴 브라질이란 소리잖아? 리우데자네이루면 브라질 맞지?
위쪽인지 아래쪽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거기서 52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소리니까.
죽어가는 사람들 생김새를 보고 혹시나 하긴 했는데…. 역시였네.
가만히 떠서 잠시 생각했다.
이 녀석들은 해안가를 따라서 남하하고 있는 거 같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그럼 중간에 있는 나라들은? 벌써 다 정리했다는 건가?
알 수 없네. 일단 섣부른 추측은 하지 말자. 어차피 기억 읽기를 하다 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스무명의 남녀는 다시 아까 모였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고, 인원 보고를 한 뒤 다들 게이트를 탔다.
돌아가는 거겠지? 일단 이 자리를 저장하고 아까 크라켄 본사가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하자 방금 게이트를 탄 녀석들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게 보인다.
일과를 정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 학살을 하고 오는 녀석들이라니.
나 참. 대체 저 녀석들의 의도가 뭔지 궁금하네.
해가 지고 난 다음은 제법 선선해져서 그나마 지켜보기가 편해졌다.
가만히 앉아서 스킬 숙련을 하면서 녀석들이 하는 모습들을 계속 살펴본다.
아까 학살을 하고 온 것만 빼고는 크게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생활.
저녁을 먹고 난 이후는 자유시간인 거 같다.
숙련을 하는 놈들도 있고 운동을 하는 놈들도 있고 모여서 카드 게임을 하는 녀석들도 있네.
열한 시가 되자 다들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알아서 들어가 잘 준비를 하는 녀석들.
간혹 침대에 누워 책 같은 걸 보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게 열 두 시가 되자 대부분의 방에 불이 꺼진다.
다행이네. 일찍 잠들어서.
모니터가 잔뜩 있는 방에 안 자는 놈들이 몇 있긴 하지만, 크게 신경은 안 써도 될 거 같다.
혹시나 몰라 그 방이 있는 쪽으로 가본다. 지하에 있는 곳.
탐지로 기척을 확인하고 바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그리고 땅속으로 다이브.
온통 어두워진 시야는 금방 밝아졌고, 나는 모니터실에 도착했다.
한 남자가 팔자 좋게 감자 칩을 먹으며 건성으로 모니터를 바라본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모니터들. 화면은 제법 많다. 본부 바깥의 길, 본부 안쪽 야외, 본부 내부, 지하….
아마 개인 방 외에는 감시 카메라가 사각 없이 전부 있는 것 같다.
근데 이게 의미가 있나? 투명화는 못 잡을 텐데?
어쨌든 개인 방에만 카메라가 없으면 상관없지. 바로 방 밖으로 나가서 아까 위치를 확인해 뒀던 녀석들의 숙소들 쪽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숙소.
방 안으로 들어가 잠들어있는 녀석들을 확인하고 페이즈 아웃 해제. 무효화, 수면, 기억 읽기. 페이즈 아웃을 반복한다.
처음 한 명의 기억을 읽었을 때는 의아함이 더 컸다.
두 명째에서는 황당함이, 세 명째에서는 약간 기괴함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몇 명의 기억을 더 읽었고, 이번엔 조금 높아 보이는 놈들의 기억을 읽는다.
아까 남녀 스무명을 이끌고 갔던 녀석.
그놈의 기억을 읽은 다음엔…. 녀석의 기억에 있는 치프라는 놈을 찾아 다시 기억을 읽었다.
썩 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 같네.
순간이동을 써서 본부 바깥으로 나온 나는 혹시나 누가 눈치챘나 싶어서 본부 안쪽을 한 번 더 훑어본다.
조용하네. 하긴, 이걸 누가 대비하고 있겠어.
'누군가 몰래 본부로 침투해서 조용히 기억만 읽고 가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하는 놈이 있다면 보안을 강화하는 것보다 그런 걱정하는 놈을 편집증으로 의심하는 게 더 편할 테니까.
게다가 이걸 막을 방법도 없다. 무슨 수로 이걸 막을 건데.
어느 정도 확인이 됐으니 바로 벙커로 돌아온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기억 읽은 것을 정리한다.
일단…. 가장 신기한 건, 녀석들의 스킬이다.
처음엔 의아했고 두번째는 황당했으며 세 번째에는 기괴함까지 느껴졌던 이유.
녀석들의 스킬이 모두 같았다.
대부분이 티어11인 녀석들.
그리고 가진 스킬은 바람 칼날, 비행, 투명화, 탐지, 번개 주먹, 보호막, 반사, 금속화, 성장, 잠금 해제, 파티.
기억을 읽어보니 스킬을 배운 순서도 똑같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그야말로 사람을 찍어내고 있는 거다. 양산형 병사를 육성하는 느낌?
근데 스킬 세팅이 조금 의심스럽다. 잠금 해제. 이걸 배우는 게 굉장히 의심스러워.
물론 녀석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해서는 잠금 해제가 필요하긴 하다.
문 같은 걸 잠그고 안쪽에서 농성해버리면 답이 없지. 그걸 위해서 필요한 건 사실이긴 해.
페이즈 아웃을 쓸 수도 있지만, 그럼 파티가 풀리니까. 잠금 해제면 어디든 못가는 곳이 없을 테니 찍은 건 이해한다.
근데 가장 찝찝한 건…. 녀석들은 티어13을 찍은 다음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온 크라켄 본부는 녀석들을 티어13을 찍을 때까지만 있는 곳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본부에 있던 치프도 잘 모른다.
치프의 역할은 그저 자신들에게 배정된 인원을 규격에 맞춰서 스킬을 찍게 훈련하는 것.
딱 거기까지일 뿐.
티어13이라니. 이거 뭔가 찝찝한데.
히든 스킬이 나오는 구간이잖아. 게다가 녀석들이 배우고 있는 스킬이 거슬린다.
금속화, 성장, 잠금 해제.
잠금 해제의 히든 스킬인 제약 해제는 여기저기에 많은 영향력을 주는 스킬.
금속화의 히든 스킬인 융해는 몸을 물처럼 만드는 스킬.
성장의 히든 스킬인 노화는 타겟의 시간을 뒤로 확 돌려버리는 스킬.
뭘까? 이 세 가지로 조합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
융해가 제약 해제 빨을 받으면 물에서도 숨을 쉰다거나? 그래서 해저 도시라도 만드나?
근데 노화는 뭐야? 노화는 이해가 안 가네. 융해와 노화가 뭔가 연결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짚이는 게 없다.
아. 답답하네. 답답해.
이럴 때는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야지. 내일 방주로 가봐야겠어.
똑똑한 사람들의 머리를 좀 빌려봐야지.
크라켄 본부는 더 지켜봐야 할 거 같다.
녀석들이 티어13을 찍으면 치프가 다른 쪽에 연락하고, 그쪽에서 티어13 찍은 사람들을 데리러 오니까.
내가 노릴 건 그놈들이 데리러 올 때 슬쩍 섞여서 그쪽으로 가는 것.
그래야 그쪽으로 넘어가서 또 정보를 얻어내지. 하. 이거 진짜 귀찮네. 징그러운 새끼들.
기억 읽기에 대한 대비를 안 하는 게 아니었다.
철저한 정보 통제. 임무를 받아서 하는 놈들도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
역시…. 뭔가를 꾸미려면 저렇게 해야지. 어떤 놈인지 몰라도 참 대단해.
사람을 철저하게 소모품이나 재료로 생각한다는 거잖아?
짱개놈들의 마인드랑은 조금 다르면서도 같다.
역압과 통제로 사람을 다루는 짱개.
자유와 사명감으로 사람을 다루는 양키.
근데 어쨌든 사람을 마치 도구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건 다를 게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국의 방식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냐. 당하는 놈들이 그저 정신 승리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어쨌든…. 일단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녀석들이 티어13을 찍길 기다릴 뿐.
근데 가장 궁금한 의문은 아직 안 풀렸다.
서민준. 그놈을 왜 스카우트하려고 했던 걸까?
서민준의 스킬에는 성장이나 금속화가 없다.
투명화, 페이즈 아웃, 염력, 비행, 탐지, 보호막, 데미지 감소, 반사, 수납, 블링크, 순간이동, 게이트, 회귀, 무효화, 번개 주먹.
그리고 거기에 히든 스킬 폴터가이스트.
녀석은 잠금 해제도 없고 다른 히든 스킬을 찍을 수 있는 스킬도 없잖아? 근데 왜 스카우트하려고 했던 거지?
이유를 잘 모르겠네.
웃긴 건 서민준 그 녀석도 크라켄 녀석들이 자신을 왜 원하는지 모른다.
하여간 다들 이해가 안 가. 안 궁금한가? 다들 제정신이 아닌거 같아.
아무튼, 잠들기 전에 스킬 숙련을 더 한다. 오늘 바짝 하고 내일 오전에 조금만 더 하면 이것도 마스터 할 수 있을 거야.
후. 지겨워. 이 스킬 숙련은…. 언제쯤 그만두나?
아마 나와 있는 모든 스킬들을 다 배우기 전까진 계속 이렇게 투덜거리겠지?
다음날.
잠에서 깨니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시간 계산을 해보니 크라켄 본사가 있는 곳은 지금 새벽 세시.
아직 시간은 꽤 남았네. 그럼 방주에 좀 가봐야겠지?
지난번에 암행은 비공식적이었으니 내가 방주에 나타나는 건 그렇게 다들 모아 놓은 이후로 처음이 되는 셈이다.
신경 써야지. 괜히 티 내다가 몰래 봤다는 걸 알면 귀찮아져.
방주로 순간이동 했다.
장룡의 방을 저장해놨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했기에 공터로 순간 이동한 나는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핀다.
윤서와 이야기 하고 있던 아키가 나를 보더니 이쪽으로 다가왔고 윤서 역시 따라온다.
"웬일이야."
"웬일이긴. 내 방주에 내가 오는 데 이유가 필요 해?"
"자주 오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키.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건지 원.
"대장."
오랜만에 대화하는 윤서. 지난번에 연구소와 싱가포르 코인을 주울 때 보긴 했지만, 대화는 못 했었지."
"잘 지냈어?"
"덕분에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아 보이는데 아키가 약간 신경 쓰이나 보다.
언제 한번 또 다들 면담을 해줘야겠네. 역시 일대일 개인 면담은 중요하지.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네. 아. 윤서야. 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네? 어떤 거요?"
"정 부장님이랑 승규 형, 민희 좀 불러줄래? 내 방으로 와달라고 해줘."
"아…. 그런 부탁이었군요. 알겠어요."
그러더니 바로 사라지는 윤서. 뭐지? 순간이동인가?
"바보."
아키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향한다.
뭐야? 정말 웃기는 애야. 쟤도 면담 좀 해야겠네. 꼭 해야겠어.
장룡이 자신의 방으로 썼던 방. 그리고 이제는 내 방이 된 곳.
거기로 간 나는 이번엔 바로 위치를 저장했다. 하여간, 까먹을 걸 까먹어야지.
방은 장룡 녀석이 있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마 일부러 여기는 건들지 않은 느낌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고 처리하려고 했나 보지?
나는 세 사람이 오기 전까지 느긋하게 방안을 구경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요해 보이는 건 그대로 놓거나 수납에 넣고, 필요 없어 보이는 건 그대로 우한 게이트에다 던져버린다.
예를 들면 이 두꺼비 장식물.
하여간 짱개 놈들 감성은 이해 못 하겠다니까.
그대로 우한 게이트로 쑤셔 넣은 나는 벽에 달린 짱개 냄새가 잔뜩 나는 장식물들 염력으로 떼어내 역시 내다 버린다.
"오셨습니까?"
정 부장과 승규 형. 민희. 세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든든함이 느껴진다.
바로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세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는다.
세 사람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거 보니 방주 일은 잘 되고 있나 보네.
"어때요? 살 만해요?"
내 질문에 정 부장이 엄살을 잔뜩 떨며 말한다.
"아휴. 죽겠어요. 왜 그렇게 신경을 쓸 게 많은지."
"잘 돼 가고 있나 보네요. 엄살 부릴 여유 정도는 있는 거 보면."
"이런. 한숨을 푹 쉬면서 죽상을 하고 있을 걸 그랬나요?"
분위기는 제법 좋다. 세 사람도 서로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고.
그건 다행이지. 사람이 섞이면 가장 피곤한 건 역시 사람 문제다.
정말…. 사람 대하는 일처럼 어려운 게 없지.
"일단, 방주 일을 물어보기 전에 내 이야기 먼저 들어줄래요?"
그러면서 그들에게 히든 스킬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해주고 융해와 노화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혹시 이걸로 뭐 연상 되는 거 있으세요?"
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기는 세 사람. 부디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