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26화 (611/703)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실마리

"서민준은 SG 시티 안에서 코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미국으로 뜰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듣고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조 이사.

너무 침착한데? 제대로 이야기 들은 거 맞아?

"여긴 어디죠? 제법 큰 실내인 거 같은데."

"망해버린 대호 그룹의 비밀 벙커죠."

오히려 이번에 내가 한 말에는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서민준이 하려는 짓보단 여기가 대호 그룹의 벙커라는 게 더 놀랍다는 건가?

"빈 거 같은데. 담배 태워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조 이사는 그대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바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들이킨다.

이야. 분위기 있네.

담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까 살짝 생각이 바뀔 정도야.

"그 패륜아 새끼가 결국…."

담배를 피우며 가지고 있던 휴대용 재떨이에 재를 털다가 꽁초를 비벼끈 그는 짧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정의의 화신이라던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선인.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지금 상황이 맘에 안 드는 모습. 그리고 평소에도 서민준에 대해서 그다지 감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 분위기.

"귀하는 누구신데 저에게 이런 것을 말해주는 겁니까?"

"SG 시티가 망하질 않기를 바라는 소시민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소시민이라는 개념이 많이 축소되었나 보군요. 이래서 트렌디를 읽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소릴 듣나 봅니다."

근엄한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농담까지 하네.

생긴 건 상당히 꼬장꼬장한 틀딱같은 모습이지만, 역시 겉보기로 모든 걸 판단해선 안 되나 보다.

"거래를 제안할 때는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착각하지 않죠."

"거래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일방적인 지시일 수도 있을 텐데요."

"지시? 귀하가 나에게?"

"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조 이사.

그러더니 다시 한번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후우. 다들 기본이 없네. 기본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 이사.

"세상엔 기본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 스킬이란 거. 그걸 많이 가지고 있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나에게 지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뭐지? 뭐가 이렇게 당당한 거야? 뭔가 믿고 있는 수가 있나?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으신가 보군요?"

"하. 죽음. 죽음이라. 그래서? 귀하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게 죽일 수 있는 거 말고 뭐가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서민준 그 애송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 그거죠.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죽여서 끝내버리는 것. 삼류나 하는 짓이죠. 양아치나 하는 짓이고."

"계속해보세요."

무슨 신박한 개소리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당당한 태도와 세월이 녹아 있는 듯한 주장. 한번 들어봐도 괜찮을 거 같으니까.

"서민준이 SG 시티에 있는 모든 코인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 SG 시티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두 가지 말을 엮어서 생각해보면, 귀하는 그 녀석 대신 나에게 도시를 맡기고 싶은 생각인 거 같습니다. 맞지요?"

"정확해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싫다면?"

"엥?"

"귀하의 말은 마치 왕이 봉신에게 영지 하사하듯이 나에게 주겠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아마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거겠죠."

"뭐…. 부끄럽지만 그럴 능력은 있네요."

"여기가 대호 그룹의 비밀 벙커였다는 걸 순순히 알려준 것도 본인의 업적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거고요?"

"음. 그것까진 아니에요. 여긴 그냥 쓸만해서 쓰고 있는 거니까. 근데 굳이 안 밝혀도 되는 걸 밝힌 거 보면 조 이사님이 생각하는 그런 의도가 아예 안 들어있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네요."

"서민준을 죽일 생각입니까?"

"네."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뜻이군요. 주머니에서 동전 꺼내듯이."

"크게 다르진 않죠."

"그 패륜아 놈이 사라진 뒤 혼란스러워지는 SG 그룹과 SG 시티를 별다른 소동 없이 수습하는 자리가…. 포상 같아 보입니까?"

"어? 아닙니까? 여생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요."

"지금도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귀찮은 일일 뿐이죠. 딱히 그런 자리를 바라지도 않고요. 근데 그런 자리를 제안하면서 지시라니요. 그리고 안 하면 죽이겠다?"

"아직 죽인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죽일 거 아닙니까? 그리고 다른 탐욕에 쩐 이사들을 찾아갈 생각 아닙니까?"

"뭐, 그럴 방법도 있을 테지만, SG 이사회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더군요. 조 이사님 말고는? 아. 이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서민준 그놈의 생각이죠. 이사회에서 조 이사님 말고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놈이 애송이라는 겁니다."

재밌다.

오랜만에 남자랑 하는 대화가 재밌다. 보통은 짜증 나서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

승규 형이나 정 부장 정도가 아니면 이런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야생마? 그런 느낌이다.

씨발. 꼬우면 쏘든가? 대신 쏘면 나라는 야생마는 길들일 수 없어! 쏴! 쏴! 씨발!

이라고 외치는 것 같은 모습.

"좋아요. 제가 또 실수했네요. 앞으로 조 이사님과 대화할 때는 예의를 좀 더 갖춰야겠어요."

"귀하는 그래도 그나마 사람 같군요. 그 패륜아 새끼보다는."

"칭찬입니까? 기준점이 서민준이면 별로 칭찬으로 안 들리는 데요."

"칭찬입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아잌. 이게 무슨 대화야. 존나 웃기네.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왠지 끅끅거리며 웃고 있다. 이 아저씨. 생각보다 맘에 들어.

"좋아요. 그럼….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죠."

"SG 시티와 SG 그룹을 유지해달라고요?"

"그룹은 상관없습니다. SG 시티만 유지되면 돼요. 50만의 인구가 멀쩡하기만 하면 그룹이 사라져도 상관없습니다."

"주체가 SG 시티의 존속이라는 말이군요. 그룹은 상관없고."

"맞아요."

"또 있습니까?"

"아뇨?"

"그럼…. 이쪽에서 원하는 걸 말하죠."

당당해. 참 당당한 아저씨야.

감투를 씌워주는 데도 거기에서 뭔가를 더 얻어내려 하다니.

이런 사람을 장사꾼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상황을 자기의 페이스로 만들고 얻을 수 있는걸 몽땅 얻어가는 수완.

"말해보세요."

"다시는 SG 시티의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의외네? 바라는 게 고작 그거야?

"그러겠다고 하면 믿을 겁니까?"

"그럼, 인감을 찍거나 지장을 찍는다고 강제력이 생깁니까?"

"아…. 그건 아니네요."

"귀하의 양심을 걸고 약속하는 겁니다. 물론 귀하가 약속 같은 건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두고두고 양심에 찔리게 될 거고요."

"근데, 강경한 반응에 비해 요구하시는 건 상당히 감성적이시네요? 결국, 내가 함부로 굴면 겪게 되는 손해는 겨우 양심에 찔리는 거다? 고작 그것만으로는 억제력이나 저지력이 상당히 부족하지 않나요?"

양심이니 약속이니 하는 걸 들으니 약간 앞에 들었던 말들이 조금 퇴색되는 느낌이다.

아무리 장사치라고 하지만 저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약자가 강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건 그런 거밖에는 없으니까요. 혹 다른 방법 있습니까? 있으면 알려주시죠."

"푸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마지막 말. 정말 맘에 들었으니까.

자신의 곤조를 유지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이 아래라는 것을 자존심 상하지 않게 인정하는 말.

덕분에 이 남자의 평가는 상당히 올라가게 됐다. 맘에 들어. 맘에 드는 사람이야.

"좋습니다. 조 이사님의 말대로 하죠. 거래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민준은 사라질 테니 그에 대한 처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SG 시티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겠어요."

"거래가 성립돼서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저를 돌려 보내주겠습니까? 아쉽게도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군요."

"물론이에요. 아…. 근데 SG 센터로 보내드려야겠네요. 저장 된 곳이 거기 밖에 없어서."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바로 게이트를 열어줬다.

그가 나가고 게이트를 닫은 나는 인공 정원에 가서 항상 신영이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과연, 저 조 이사를 믿을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지금 바로 쪼르르 서민준에게 가서 어떤 놈이 회장님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바로 고자질할 수도 있다.

아니 직접 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걱정이 들지 않는다.

그가 내 앞에서 서민준을 패륜아라고 불렀다고 그에게 믿음이 생긴 건 아니다.

단지 그가 똑똑하다는 것. 그리고 뭐가 이득일지를 계산할 줄 안다는 것.

방법은 상관없다. 나는 그저 그가 SG 시티를 보존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거면 된다. 그 과정이 어떻든 상관없어. 그는 나에게 비수를 꽂기 힘든 위치에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가 마지막에 요구한 게 맘에 들었다.

더는 자신들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그 자신감? 그런 게 맘에 들었어. 그래. 남자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레나를 데리고 다시 청주로 넘어왔다.

그런 그녀를 앞세워 바로 서민준을 찾았고, 아직 자신의 집에 있는 녀석을 확인한다.

"잠깐 여기 들어가있어."

수원 게이트를 열어주고, 레나가 들어가자 바로 닫았다.

그리고 블링크, 페이즈 아웃, 벽을 넘어서 해제, 무효화, 수면.

맥없이 잠든 서민준을 데리고 바로 수원 벙커로 넘어갔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

서민준. 스킬이 열다섯 개나 있는 녀석. 이런 녀석을 함부로 죽이면 아깝지.

하지만 그대로 쓰기는 힘들다. 어쨌든 폴터가이스트가 있으니 제압해놓기도 힘든 녀석이니까.

일단 녀석에게서 기억 읽기부터 한다.

루프 코퍼레이션. 거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기억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기에 읽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럼 이건 됐고.

이번엔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나에게까지 번지지 않게 하려는 얄팍한 짓이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기억 삭제 역시 그리 힘든 일이 아니기에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마무리된 녀석을 레나에게 넘겨준다.

"이제부터 이놈은 니 부하 1이야."

"에에? 마스터 말고 다른 남자는 필요 없는데요!?"

"남자가 아니고 부하 1이라고. 아니면 노예로 쓰던가."

"아아…."

"단, 절대 매혹을 풀지 말 것. 그리고 잠금 해제를 마스터 하기 전까지는 일단 밖에 데리고 나가지 마."

"네에."

"잠금 해제. 찍었나?"

"네에. 지금 숙련 하고 있어요."

"내일까지 마스터 해."

"네!? 내일요? 아무리 그래도 내일까지는…."

"해."

"히잉. 알겠어요…."

"이놈 데리고 돌아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놈이 매혹에서 풀리는 순간, 너는 다시는 나를 못 보게 될 거야."

"으악! 알겠어요! 잘 관리할게요!"

레나가 서민준에게 매혹을 걸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라스베이거스로 옮겨줬다.

아예 다른 기억도 다 지웠으면 좋았을걸. 근데 스킬 때문에라도 기억은 함부로 지울 수는 없는 게 아쉽네.

어차피 레나가 제약 해제를 배우면 뭐…. 영원히 매혹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할 테니까.

일단 서민준 녀석은 해결했고.

SG 시티도 조 이사가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 거기도 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을 파볼 수 있겠네.

그동안 삽질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으니 서둘러봐야겠어.

근데…. 아직 원트를 못 찍은 게 걸리네.

앞으로 사흘. 길어야 나흘.

그 정도면 되는데. 으음. 어쩐다.

일단 루프 코퍼레이션을 확인해보면서 스킬 숙련을 마저 해야겠다.

아무래도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지.

일단은 레나에게 LA 게이트를 열어달라고 한 뒤 바로 넘어가서 루프 코퍼레이션 쪽으로 향했다.

LA 도심 한복판에 있는 회사. 비행으로 날아가니 가는 데는 얼마 안 걸리는 곳.

그렇게 하늘 위에서 위치를 저장한 나는 지속 회복 포션 생성 스킬을 숙련하며 서민준의 기억을 더듬으며 거기서 봤던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