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23화 (60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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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입구를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 건 벽면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걸그룹의 사진이었다.

아이돌 기획사니까 당연하겠지…. 하고 넘어가려는데 보니까 페어리나인이다.

미나의 얼굴이 있네?

내가 가만히 서서 사진을 보고 있으니 미나가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헤헤…. 잘 나왔죠?"

"그러네. 이쁘다. 저거 언제지? 꽤 됐을 텐데."

"저게 데뷔 년 차였나? 2년 차였나?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그럼 몇 살이야…. 암튼 애기애기 하네."

"어렸을 때니까요. 헤헤"

그러면서 사진을 바라보는 미나의 표정은…. 조금 슬퍼 보인다.

아마 다른 맴버들 생각이 나서 저러는 거겠지?

"뜯어다가 집에 걸어놓고 싶네."

"그정도까진 아니에요. 가요."

다시 내 손을 잡고 한쪽으로 향하는 미나.

이리저리 들어가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복도를 지나 한 방으로 들어갔다.

"여긴 저희 전용 연습실."

"보통 연습실이 소속사에 있나?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

"음…. 다른 소속사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희는 여기에서 했어요."

그렇게 연습실을 한 바퀴 둘러보던 미나는 다시 내게 다가오더니 말한다.

"오빠. 지난번에 꽃다발 만들어 놓은 거. 아직 가지고 있죠?"

"꽃다발? 아."

"그거 여덟 개만 꺼내 줄래요?"

그렇게 말하곤 연습실 한쪽 방으로 들어가는 미나.

안에서 부스럭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양손에 텀블러를 잔뜩 들고나온다.

차마 손에 다 못 들어서 염력으로 몇 개 들고 오는 그녀.

뚜껑이 열린 채로 안에 물이 받아져 있는 텀블러.

미나는 그걸 하나씩 연습실 바닥에 일렬로 내려놓았다.

"주세요."

내가 꽃다발을 하나씩 건네주자 미나는 그걸 받아들더니 한 번 더 살짝살짝 손질한다.

그리고 텀블러에 꽃다발을 꼽기 시작하는 미나.

이내 연습실 바닥에는 여덟 개의 꽃다발이 꼽힌 텀블러와 하나의 빈 텀블러가 놓이게 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에요. 그쵸?"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참을 꽃다발들을 바라보던 미나.

작게 훌쩍이며 가만히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나에게 조용히 안긴다.

"이제 가요.“

뭔가 말해주고 싶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뭐라고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말주변이 좋았으면 좋았으련만.

다시 내 손을 잡고 건물 바깥으로 나온 미나. 그리고 다시 하늘을 날아올라 나를 이끈다.

미나와 함께 도착한 곳은 경복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

"헤헤헤.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거였어요. 여기를 남자 팔짱 끼고 당당하게 걷는 것."

"정말 하기 힘든 거였네. 지금이나 가능한 일이지."

"그쵸? 그래서 온 거예요."

아무도 없고 예전과 같은 분위기도 아닌 광화문 광장이었지만, 미나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팔짱 낀 채 경복궁 안으로 걸어 들어간 우리는 궁궐 안을 돌아봤다.

사실 그렇게 볼 건 없지만 미나는 그냥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워 보인다.

마치 아까의 슬펐던 감정을 모두 털어버리려는 듯한 모습.

그래서 일부러 더 저렇게 좋아하는 걸지도.

"아. 맞다. 여기 앞쪽에서 한복 갈아입을 수 있을 텐데."

"해볼래?"

"네! 해볼래요!"

바로 경복궁 밖으로 날아서 날아가려고 했는데 미나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걸어가요. 급할 건 없잖아요."

"하긴, 그렇네."

내 팔짱을 꼭 끼고 웃는 미나.

그렇구나. 뭔가를 하는 게 즐거운 게 아니고 그냥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즐거운 거였어.

경복궁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 쪽으로 가자 한복 대여를 해주는 가게가 많이 있었다.

가장 상태가 좋은 곳으로 들어가 옷을 고르는 미나.

흰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고른 그녀는 머리를 요령 좋게 묶더니 머리에 댕기를 단다.

"이쁘네. 잠깐 서봐. 사진 하나만 찍어 놓자."

전직 아이돌이라 그런지 사진 요구에 부끄러워하거나 하는 모습은 없다.

오히려 숙련된 포즈를 잡아주는 그녀. 아. 근데 내가 사진을 못 찍네.

피사체를 이렇게 못 살리다니.

"봐요. 잘 찍었나 검사해야지."

내 사진을 보더니 풉 하고 웃는 미나.

"사진 진짜 못 찍는다."

"그치? 나도 반성하고 있어."

"괜찮아요. 많이 찍으면 잘 나온 거 하나는 나오겠죠."

그러더니 남자 한복 쪽을 살펴보는 미나.

"자. 오빠는 이거 입어요."

도포 같은 한복 한 벌을 꺼내서 나에게 건네는 미나.

이런 건 정말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못 맞추는 등신 머저리는 아니기에 순순히 위에 걸쳤다.

"자. 이것도."

갓까지 하나 꺼내온 미나. 그것까지 머리에 쓰고 거울을 보니 음…. 난 잘 모르겠다. 괜찮은 건가?

"멋지다. 우리 오빠 잘생겼다!"

"영혼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에요! 멋져요! 자. 이제 우리 가요."

뭐 어쨌든 미나가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상관없지. 지금은 그녀만 맘에 들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옷을 갖춰 입고 경복궁 안을 들어가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안쪽에 있는 민속 박물관이라고 되어있는 곳도 들어가 구경했는데…. 사실 그렇게 신기하거나 재밌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 보이는 미나. 나는 그런 그녀의 발랄한 모습을 계속 사진으로 찍는다.

"미나야."

"네?"

생글생글 웃으면서 좋아하는 미나가 나를 보고 대답한다.

"너 절대 아무 일 없어야겠다."

"으음? 왜요? 갑자기?"

"아니. 이러고 있는 게 너무 플래그 세우는 행위 같아서. 그런 거 있잖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사진을 잔뜩 찍은 남자는 그 후에 벌어진 일 이후 떠난 그녀를 생각하며 사진을 보며 눈물 흘리는…."

"어휴! 정말! 분위기 깨는 데는 아주 세계 최고야! 세계 최고!"

그러면서 내 팔을 찰싹찰싹 때리는 미나.

"그런 거는 속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진짜!"

"아니. 절대 그럴 일 없게 하자고 조심하자는 소리지. 니가 나를 왜 떠나."

"어어? 그런 말도 하지 마요. 하여간 오빠는 만화나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그렇게 말하고는 푸흐흐 하고 웃는 미나.

참 착한 여자야. 이런 소리나 찍찍하는 나 같은 놈도 웃으면서 받아주고 말이지.

그렇게 경복궁을 나왔고, 우리는 그 옆에 있는 삼청동길이라는 곳을 거닐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다녔을 것 같은 거리. 하지만 지금은 나와 미나 뿐이다.

"아. 시원한 아아 한잔 마셨으면 정말 좋겠는데."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그건 회귀로 안 되겠죠?"

"어…. 잠깐만 수납을 뒤져보면 커피 정도는 있을 거 같은데. 아. 얼음이 없나? 눈보라 쓸래? 아니다. 소규모 동결 정도로도 되겠네."

"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게 얼음에 진심이진 않다고요. 아니다…. 해볼까요?"

"뭐 어때. 먹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수납에서 아메리카노를 찾아낸 나는 미나에게 건넸고 커다란 플라스틱 컵도 하나 꺼내 줬다.

"이런 건 대체 왜 있어요?"

"수납에 어지간한 건 다 있어. 일회용품, 생필품, 기타 잡다한 물건들…. 좋아 보이는 건 다 쑤셔 넣으니까."

"편하긴 하겠네요. 나도 빨리 수납을 배워야 하는데. 아. 얼음 해볼까요?"

"응. 해봐."

"소규모 동결! 소규모 동결!"

근처에 보이는 우체통에 소규모 동결을 두어 번 쓰는 미나.

우체통 주변에 약간 두툼하게 얼음이 생겼고, 미나는 거기 다가가 유심히 바라본다.

"깨끗한 것 같긴 한데요."

"한번 깨보자."

염력으로 몇 번 두들기니 얼음에 금이 가며 깨졌고, 그중 덩어리 큰 것들을 떼어다가 미나의 컵에 넣어줬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니 제법 그럴듯한 아아가 만들어졌다.

한 모금 마시더니 맘에 든다는 듯 활짝 웃는 미나.

"완벽해요!"

"그래? 다행이네."

"오빠 것도 만들어요!"

그렇게 우리는 아아 한 잔씩을 들고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사람의 인적이 닿은 지 오래된 카페들 사이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씩 들고 걸어가는 건 나름대로 느낌이 있네.

왠지 힙한 분위기야.

그렇게 우리는 한옥마을 쪽까지 걸어오게 됐다.

근데 사람의 관리가 없었어도 한옥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딱히 세상이 망하기 전과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든 건물들.

하긴, 그게 한옥의 매력이겠지.

물론 한옥도 관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티가 나진 않네.

"좋다."

미나와 함께 한옥 건물 하나로 들어와 대청마루에 사이좋게 앉아 아아를 먹고 있으니 미나가 맘에 든다는 듯 짧게 말한다.

"다행이네. 만족하는 거 같아서."

"살아있는 것도 감사한데, 이런 것까지 하면…. 당연히 좋죠. 고마워요."

그러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미나.

아. 내가 조금만 더 잘생겼다면 사극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아깝네. 아까워.

"오빠."

"응?"

"웃기죠?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 정작 죽은 맴버들의 명복을 빌어준다는 게?"

"웃기긴.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거야. 내가 소중한 사람의 목숨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목숨은 전혀 동등하지 않으니까."

"모르겠어요. 나는 아직도 이런 게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참 비겁해요. 그런 어려운 건 그냥 오빠 핑계를 대고 넘어가 버리거든요. '오빠가 말한 거니까 옳은 거야' '오빠가 말했으니까 괜찮아' 이런 식으로요."

"원래 책임 회피는 인간의 본능이긴 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런 거라면 나는 아무런 상관없어. 사실 맞는 말이니까. 너희들이 한 일에 대한 모든 죄는 내가 받는 게 맞아. 내가 시킨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나도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있어요."

"미안한 일이긴 하지. 너희들에게 잔인한 일을 많이 시켰으니까. 그건 언제나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괜히 오빠를 불편하게 만든 거 같네요. 미안해요."

"아냐 아냐. 괜찮아. 나는 상관없어. 나는 그저 너희들이 이것 때문에 따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니까."

잠깐의 정적.

이제는 제법 더워진 날씨와 처마 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 안에서 얼음이 녹으며 덜그럭하는 소리.

"너희들 말고 너라고 해줘요."

"응?"

"지금은 저하고만 있잖아요."

그러면서 씨익 웃더니 다시 내 팔짱을 낀다.

방금 미나의 표정에서 보였던 욕심. 아마도 그건 독점욕.

승희와 세아, 안나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미나 역시도 사람이고 여자라는 거지.

그리고 그런 독점욕이 나에게 향한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착하고 이쁜 여자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과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아. 한복…. 다 좋은데 조금 더워요."

"그치? 나도 이거 좋긴 한데, 오늘은 좀 덥네."

"재밌게 놀았으니 이젠 벗을래요. 이거 수납에 좀 넣어줄래요? 맘에 드니까 가져가야지."

저고리를 풀고 치마를 벗는 미나.

그런 그녀를 보고 흠칫 하긴 했지만, 안에 아까 입고 있던 얇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기에 기대는 살짝 아쉬움으로 변했다.

"왜요? 아…. 설마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줄 알았어요?"

"아니. 아까 입는 거 봤는데 뭘. 그냥 흠칫했을 뿐이야."

나도 도포를 벗고 미나의 한복과 함께 전부 수납에 집어넣었다.

한결 가벼워진 옷으로 따가운 초여름의 햇살을 느끼는 미나.

"음. 너무 더운데…. 시원한 곳 갈래요? 샤워도 하고 싶고."

아무리 둔한 나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바로 승희와 세아, 안나의 위치를 살펴보고 몰디브 쪽에 없는 걸 확인한 다음, 게이트를 열었다.

내 손을 잡고 일으킨 그녀는 게이트를 넘어갔고 시원한 바닷소리를 들으며 숙소로 들어간다.

"안아줘요. 사랑을 담아서."

옷을 벗으며 유혹하듯이 나를 바라보는 미나.

이쁜 애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반칙 아닌가? 거의 범죄 수준인데.

자연스럽게 범죄에 가담하는 나.

그런 미나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가슴에 입을 가져간다.

평소에는 미나와 섹스를 하게 되면 상당히 조심하는 편이다.

조금 과격하게 되면, 그녀의 몸 자체가 깜짝깜짝 놀라며 거부하게 되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당했던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미나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잖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 자신이 마음의 짐을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아마 오늘 소속사에 다녀온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그녀는 이제 과거를 벗어버리고 싶은 거다.

있었던 일들이 영원히 지워지진 않겠지만, 더는 거기에 눌려있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

약간 야해진 미나의 모습은…. 솔직히 사기다. 사기야.

미나의 가느다란 허리와 가슴이 흔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생각.

내 위에 올라타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확실히 자극적이긴 하다.

그렇게 많이 안았는데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좋네. 즐거워. 이런 모습들은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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