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22화 (60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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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아무것도 안 하고 온종일 느긋하게 앉아서 숙련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따지고 보면 지금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다.

압도적인 경쟁자도 제거했고, 그동안 불안하게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방주로 다 몰아 넣어놨다.

서민준 녀석이 뜻대로 되지 않긴 했지만, 녀석은 제어 하에 놓여있으니 별 문제가 안 되고.

승희, 미나, 세아, 안나도 충분히 강해졌기에 그녀들의 걱정도 크게 할 필요 없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가 강해지고 있다는 거.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로 항상 해왔던 생각이긴 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성장하는 것을 게을리하진 않았지.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

역시나 괴물 같은 놈들은 많았고…. 지금은 그 증거까지 확인됐다.

Q&A.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다. 그게 문제야.

분명 나도 최고 속도로 스킬 숙련을 하고 있지만, 어디에선가 최소 한 명 이상은 나보다 강한 놈이 있다는 것.

그게 걱정 되는 거다. 결국, 나는 그놈을 꺾어야 하는 거니까.

그 부담감, 그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는 거야.

제발…. 별거 아닌 놈이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 뭐가 됐든 이만큼 까지 올라왔는데 시시한 놈일 수는 없어.

그리고 또 하나.

원트를 배울 때까지 발전 없이 답보 상태라는 것. 그게 맘에 안 든다.

근데 뭐 이건 어쩔 수 없지. 나만 이런 건 아닐 테니까.

게다가 이런 걱정을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잡생각 안 하고 얌전히 숙련이나 하는 게 맞지.

"굉장히 재미없어 보이네요?"

내 옆에 슬쩍 앉는 안나.

젠가 모양으로 콘크리트를 생성해서 쌓고 있는 나를 보며 말하는 여자.

표면이 까슬까슬하기에 뺄 수는 없는 블록. 그저 쌓기만 할 수 있고 언젠가는 무너지는 탑.

내 허리만큼 쌓았던 탑이 와르르 무너졌고, 쏟아지는 블록을 피해서 안나는 발을 살짝 뺀다.

"다치지 않았지?"

"이런 거에 부딪힌다고 다치진 않죠."

"하긴, 그렇긴 하지."

바닥에 작은 우한 게이트를 열어서 블록들을 싹 치워버린 나는 다시 콘크리트 생성을 하며 또 쌓기 시작한다.

"저 침묵 마스터 한거 자랑하려고 왔는데."

"오? 정말? 잠깐. 너 티어24지?"

"네."

"이야…. 그럼 패시브부터 빨리 찍어. 그리고 초인의 체력도."

"후후. 알겠어요."

결국, 가장 먼저 티어24를 찍은 건 안나네.

하긴 안나가 숙련 안 해도 되는 스킬이 조금 많았지. 미나랑 비슷한 수준이었으니까.

숙련 스킵이 있는 스킬을 하나도 못 배운 세아가 지금 티어19인걸 생각하면 확실히 차이가 크긴 하네.

"세아야! 너는 멀었니!?"

"거의 다해가! 95퍼!"

95퍼면 뭐…. 쟤도 금방 하겠네.

"찍었어요."

"그럼 이제 봉인 차례네."

"네. 배울게요?"

"응. 축하해. 너도 이제 사기 캐릭이 됐구나. 아. 앞으로는 스킬 80번 쓰고 회복 포션 대 먹으면 돼."

"네. 알겠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안나만큼 사키 캐릭이 없네.

일단 스킬 사용 불가 지대 위에서 쓸 수 있는 스킬이 많다. 특히 다른 것보다도 데스 윈드가 사기지.

봉인이 없을 때는 스킬 사용 불가 지대가 데스 윈드를 지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야말로 개사기 콤보.

근데…. 상태 회복을 패시브 화 시켜버리면 영향은 안 받겠네. 출혈이 안 걸리니까.

"그럼, 저 이거 확인 좀 하고 올게요."

"그럴래? 어디로 가게?"

"그냥 조금 떨어진 곳에서요."

"아아. 사람 없는 곳에서 해보려고? 근데 그럼 확인이 안 되잖아."

"간단하게 확인만 하려는데 꼭 타인의 생명을 뺏을 필요가 있나요."

"그래. 뭐, 나야 상관없지. 어차피 파티 걸려있으니까. 다녀와."

"네."

그러더니 안나는 내 뺨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싱긋 웃고 하늘로 둥실 떠오른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떨 때는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자보다 이런 가벼운 키스가 더 자극적이라는 게.

"다 했다! 아! 힘들었어! 얼래? 안나 어디 갔어? 아? 저쪽으로 갔네?"

"봉인 배운 거 확인해 본다고 갔어."

"아아. 암튼! 나도 마스터했다! 침묵!"

"고생했어. 패시브 다 찍고…. 너 침묵 마스터 했으니 기본 스킬 열 개 됐지? 이제 카타스트로피 배울 수 있겠네?"

"어? 어…. 잠깐만. 어…. 맞네? 그러네?"

"카타스트로피 배우고 패시브 다 배워."

"오케이. 알겠어. 잠시만."

세아는 기분이 제법 좋아 보인다. 왜지? 딱히 좋은 일은 없어 보이는데.

음…. 이유가 있겠지. 이유 없이 이러는 애는 아니니까.

"했어!"

"봉인 찍어."

"찍었어!"

"올. 그래. 너도 이제 사기 캐릭이다."

"음…. 어디 보자…. 봉인을 쓰고."

"야. 여기서 쓰지 마라."

"스킬 사용 불가 지대."

"야. 쓰지 말라니까."

"왜? 어차피 오빠나 승희, 안나, 전부 다 봉인 있잖아? 미나 언니는 멀리 있고."

"어…. 그러네? 이제 상관없구나."

"다 생각하고 쓴 거거든?"

"어휴. 그래. 우리 세아 똑똑하다."

그러면서 세아의 엉덩이를 툭툭 쳐줬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애 취급하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어야 할 애가 이상하게 오늘은 조용하다.

"오빠야."

그러면서 내 옆에 앉는 세아.

"오빠야라니. 너 그거 방금 조금 귀여웠다. 한 번 더 해볼래?"

"오빠야."

"뭐야…. 너 누구야. 너 세아 아니지?"

"우씨…. 왜 맨날 반응이 그 모양이니?"

"뭐야…. 너 왜 이래. 너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있지?"

"흐응. 내가 너무 티 냈나?"

"당연하지. 너 만나고 처음 들어보는 오빠야 소린데. 방금 너 경상도 여잔 줄 알았잖아."

"하여간, 오바는."

"그래서. 뭔데?"

"음. 오빠 일본 게이트 있지?"

"있지. 큐슈하고 홋카이도."

"어? 다른 곳은 없어?"

"있었는데 지워졌어."

"음…. 큐슈나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있나?"

"아…. 너 료칸이 목적인 거냐?"

나를 보고 싱글싱글 웃는 세아. 역시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살가웠구나?

"나 살면서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야. 게이트 좀 열어줘."

"뭐, 열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지금 료칸들 가봐야 관리가 5년 동안 안돼서 엉망일 텐데?"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근데 지난번 뇌제 놈이 숨겨놨던 가인을 데리러 갔을 때 봤던 료칸을 보고 내 기대를 바로 접었지.

관리할 사람이 없어져서 들어갈 상태가 아닌 온천물.

그냥 수영장이면 물 빼고 청소라도 해보겠는데 온천은 뭐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답이 없기에 깔끔하게 포기했고.

"아? 아…."

"아쉽지만 그냥 뜨거운 물 받아서 목욕해라. 답이 없다."

"으…. 이렇게 내 꿈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안쓰럽네. 뭐 방법이 없을까?

일단 내가 아는 게 없는 데다가…. 일본엔 이제 사람이 없으니 아예 답이 없다.

관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매혹을 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현해 보겠는데 말이지.

"어쩌겠어. 답이 없다."

"음…. 오빠."

"엉?"

"일본은 망한 거지?"

"뭐…. 망했지. 예전 인구의 만분의 일이나 있을까? 아니지. 만 명 정도는 있을 거 같긴 하다. 천분의 일 정도?"

"일본에 있는…. 그 뭐라 그랬지? 절대 고수?"

"절대 강자. 절대 고수는 뭐야. 무협지야?"

"아이. 그거나 그거나. 암튼. 그 사람들은 이제 없다고 했지?"

"그치. 이제 일본엔 절대 강자는 없지."

거짓말은 아니네. 하나는 방주에 있고 하나는 미국에 있으니까.

"그럼, 나 게이트 열어줘."

"일본?"

"어."

"왜? 찾아보게?"

"어."

"정말 가고 싶나 보구나? 그래라. 니가 찾아내면 우리도 좋지. 어차피 거긴 위험한 곳도 아니고. 지금 열어줘?"

"어. 일단 가서 저장하고 오게."

"큐슈? 아니면 홋카이도?"

"큐슈가 남쪽 맞지? 홋카이도가 가장 북쪽이고?"

"어."

"그럼 큐슈."

게이트를 열어주자 세아는 고맙다는 인사 하나 없이 바로 넘어간다.

나쁜 가스나. 적어도 키스는 해주고 가야지.

그렇게 게이트를 닫으려는데 갑자기 세아가 게이트를 휙 나오더니 나에게 다가와 내 양쪽 뺨을 잡고 키스를 한다.

"그냥 갈뻔했네. 이따가 돌아올게!"

그러더니 다시 게이트를 넘어갔고, 세아의 기척은 저기 남쪽으로 이동했다.

뭐지. 내 생각이 읽히나? 깜짝 놀랐네.

게이트를 닫아버리고 저 멀리 남쪽에서 느껴지는 세아의 기척을 바라본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세아의 기척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 음…. 다른 여자들이 내 기척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까?

근데, 뭔가 느낌이 새롭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이 부모가 아이에게 첫 심부름을 시킬 때의 느낌이 이럴까?

분명 일본에서 세아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절대 강자급이 아니더라도 은둔하면서 사는 은둔 고수가 있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봉인과 스킬 사용 불가 지대 콤보면 뭐, 은둔 고수고 뭐고 그저 순삭이지.

어쨌든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나도 이런 기분에 익숙해져야 한다.

언제까지 싸고돌 수는 없잖아? 그러니 내가 익숙해지는 게 맞지.

잠시 세아의 기척을 더 바라보자, 기척이 조금씩 움직이는 거 같기도 하다.

음…. 그래. 뭐 잘 하겠지. 원래도 혼자 잘 다니던 애였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그럼 미나는 여기서 숙련해도 되겠네. 미나나 불러와야겠다.

바로 미나의 기척을 찾아 그쪽으로 블링크 했다.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 미나.

"나 보러 왔어요?"

근처에 있는 하천 옆에 세워진 정자 같은 곳에 앉아있는 미나는 그야말로 싱그러운 꽃 같은 모습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느낌.

"세아랑 안나가 봉인을 찍었어. 이젠 집에서 숙련해도 될 거 같아."

"아아. 그래요? 근데 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 하긴, 그렇겠네."

그러면서 미나 곁에 앉았다. 그러자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는 미나.

"근데, 이런 곳에서 하면 벌레 많을 텐데. 괜찮아?"

6월 말이라 날씨도 덥고 이제는 낮에 모기도 날아다닐 정도다.

게다가…. 여긴 주변에 풀도 많고 물도 있어서 벌레가 엄청 많을 텐데. 왜 이런 곳에서 하냐.

"괜찮아요. 이미 아까 번개 구체 몇 번 돌렸어요."

"어? 아…. 전기 파리채 대용인가…. 그것참 벌레들에겐 재앙 같은 일이네."

그렇게 잠시 아무 말 없이 흐르는 하천을 바라본다.

딱히 뭔가 하거나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나는 복에 겨운 놈이라니까. 행복한 놈이지.

"오빠."

"응?"

"우리 데이트 언제가요?"

나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하는 미나.

"지금 갈까?"

"그럴래요?"

"그래. 지금 가지 뭐. 말없이 가면 다들 걱정할 수 있으니 가서 승희에게 나간다고 말하고 가자. 근데…. 어디 가려고?"

"가요. 내가 앞장 설 테니까."

벙커로 가서 순간이동 숙련을 하는 승희에게 세아와 안나의 이야기를 해준 다음 미나랑 나갔다 온다고 하자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준다.

섭섭해하거나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기색은 안보인다. 다행히도.

그렇게 벙커를 나온 나와 미나.

미나는 내 손을 잡더니 하늘로 날아올랐고, 나는 그런 그녀와 속도를 맞추며 날았다.

"어디 갈 건데?"

"서울요."

"서울?"

"네. 저만 따라와요. 오빠는 그냥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데이트하는데 코스를 짤 필요가 없다고? 어…. 괜히 긴장했네. 한 번도 안 해본 거라 걱정 많이 했는데.

미나는 그렇게 빨리 날지는 않았다.

아마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함께 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된다.

깍지낀 손과 부드러운 비행.

그렇게 우리는 한강을 따라 날다가 서울에 접어들었고, 그렇게 가다가 잠실 운동장이 있는 쯤에서 강남 쪽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미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있는 걸 봤으니까.

그렇게 강남 시내로 온 미나는 약간 헤매는 듯했지만, 이내 방향을 잡더니 막힘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도착한 곳. 주택가 사이에 있는 5층 정도 돼 보이는 한 건물.

"뉴엘이? 여기는…."

"네. 제 소속사 건물이죠."

그제야 미나가 왜 얼굴이 살짝 굳었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페어리나인. 천국의 문을 썼을 때 나타났던 여자들. 그녀들과의 추억이 있는 곳.

하지만 미나에게는 이곳이 그렇게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장소는 상관없지. 여기서 알던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던 거지 여기서 당한 건 아니니까.

뭐가 됐든 그때의 기억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을 거다.

근데 그런 미나가 결국, 자신이 앞장서서 이곳으로 온 거다. 아마도…. 많은 생각과 결심이 있었겠지.

"너무 걱정 마요. 들어가죠."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는 미나. 하지만 깍지낀 손은 아직도 놓지 않는다.

여자 아이돌이 소속사에 남자 손을 잡고 들어가다니…. 이것도 참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하네.

물론, 세상이 망했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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