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17화 (60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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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들

홋카이도.

두 사람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자 하루카가 나를 반긴다.

"너는 어떻게 내가 올 때마다 바로 그렇게 기다리고 있냐?"

"아키 상이 말해줬으니까요."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하루카. 식탁에 앉아있는 아키는 애써 시선을 피한다.

항상 탐지를 돌리고 있나? 아니면 감이 좋은 거야? 신기하네.

"하루카. 갈 준비 다 했어?"

그렇게 물어보자 하루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아키를 슬쩍 바라본다.

아…. 아키에게 먼저 물어보라는 뜻인가?

그렇게 나를 보는 하루카의 눈빛은…. 몹시 깊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맞는 거 같단 말이지.

근데 모르면 어떠냐. 뭐, 누구나 다 여자 마음을 전부 이해하면서 태어나나?

이렇게 겪으면서 알아가는 거지. 나는 그게 조금 늦었을 뿐이고.

"아키. 가자."

"난 아직 대답 안 했어."

"가자. 나는 니가 필요해."

"하아. 아무것도 아닌 사이면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게다가 강요는 안 한다며."

"그건 어제 일이고."

"진짜 제 멋대로인 사람이야."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

"그래. 잘 생각했어. 가면 후회는 안할 거야. 근데…. 준비는?"

"됐어. 그냥 가면 돼."

아. 맞다. 쟤는 수납이 있었지.

"뭐야. 그럼 어차피 가려고 준비 다 해놓은 거였잖아?"

"아니거든!? 아. 싫어. 안 갈래. 당신처럼 세심하지 않고 마구잡이인 사람은 역시 안돼."

이크. 이건 괜히 말했나. 하여간, 내 입이 방정이네.

"미안해. 앞으로는 조금 더 세심하게 굴게. 그러니 가자."

"하아…. 진짜."

하루카는 아키에게 안 보이는 각도로 몸을 살짝 돌려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바로 얼굴을 활짝 피고 싱긋 웃어줬다.

음….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잘못했고 빨리 사과한 건 잘했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거지?

"하루카는 준비됐어?"

"준비는 됐는데요…. 저 동물들은요?"

투시를 쓰고 동물 축사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아직도 제법 많이 있는 동물들.

소, 닭, 양, 돼지…. 종류도 많고 숫자도 많다.

저걸 다 어떻게 키우고 있었냐. 얘는.

"아쉽지만…. 다 죽여야지."

"네? 아아…."

"그럼? 풀어줘?"

"아뇨…. 그건 또 아깝죠…. 다 식량인데…."

그런 하루카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옆에서 뚱한 표정을 짓던 아키도 참지 못하고 풉하고 웃을 정도.

"어차피 다 잡아서 가져가면 되니까. 가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니가 요리해 줘."

"우웅….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처음부터 식용으로 기른 아이들이니까. 알겠어요."

양을 치고 다니던 애라 그런지 확실히 동물에게 정을 떼는 게 익숙한가 보다.

선을 그을 줄 아네.

"잠깐 있어 봐. 내가 정리하고 올게. 혹시 빼놓고 간 거 없나 확인하고."

"네!"

축사 쪽으로 가서 동물들을 한번 쓱 보고, 전부 수납에 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죽는 데다가 죽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리니 피가 굳거나 사후강직도 없을 테지.

방주로 가면 펜스에 있던 그 도축 영감님이 있을 거니까…. 거기에 가져다주면 될 거야.

숫자가 많다고 해도 담는 건 금방이다.

그렇게 돌아오자 하루카와 아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럼 가자."

방주로 향하는 게이트. 두 여자는 조심스럽게 게이트를 넘어갔고, 드디어 방주의 마지막 인원이 탑승을 완료했다.

방주로 넘어와 바로 근처에 있는 민희에게 향했다.

어차피 부딪칠 거면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먼저 보여주는 게 낫겠지.

"민희."

"아. 왔어요? 음? 뒤에 있는 분들은?"

"방주의 마지막 탑승자. 하루카랑 아키야. 하루카는 요리사고, 아키는 방주의 최종병기야. 두 사람이 머물 곳을 배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최종병기…. 사람을 무슨 무기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는 아키. 그리고 민희는 그런 두 여자를 잠깐 보고는 환하게 웃는다.

"하루카 씨랑 아키 씨. 반가워요. 저는 정민희라고 해요. 두 분은 일본인이신 거죠? 혹시 한국어를 하실 수 있나요?"

민희의 정중한 인사에 아키는 바로 자세를 바로 하더니 대답한다.

"다카하시 아키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어는 못하지만, 다행히도 통역 스킬이 있어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아키. 그리고 하루카는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떠듬거리며 말한다.

"에…. 나는 이시카와 하루카 임니다."

"오. 뭐야. 지금 한국어로 말한 거야?"

"으에. 이…. 이상했나요?"

"아냐. 잘했어. 근데 일본어로 말해도 돼. 내가 중간에서 통역해주면 되니까. 민희. 들었지? 이쪽은 이시카와 하루카. 보다시피 한국어는 서툴러."

"알겠어요. 그럼…. 방을 배정해달라고요? 근데, 지금 정오가 거의 다 됐는데. 지금 바로 해요?"

"아. 그러네. 그럼 조금 있다가 하자. 안 그래도 저기 슬슬 오고 있네."

저쪽에서 청평 쪽 애들이 승규와 함께 다가오는 게 보인다.

제일 처음 마트에서 만난 민준이와 동현이, 소주 생성의 진영이, 미래와 함께 온 승주와 중현 그리고 김포에서 온 재현.

근데…. 지연이 쟤는 왜 오냐. 부른 적 없는데.

"아! 저깄다. 형!"

진영이가 반갑다는 표정으로 다가왔고, 다른 녀석들도 우르르 다가온다.

그리고 뒤따라서 어슬렁거리며 오는 재현과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지연.

아…. 쟤는 나를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무섭게.

"형! 여기 뭐에요!? 완전! 대박!"

"오바하지 말고. 암튼, 청평에선 오라는 사람은 다 왔네. 안 부른 사람도 하나 있긴 하지만. 이따 전부 이야기 해줄 테니 잠시 기다려."

그렇게 말하는 데 저쪽에서 펜스 쪽 사람들이 온다.

처음 캠프를 칠 때부터 함께 했던 윤서, 송이, 지원이와 지아 자매 그리고 정연이.

내 쪽으로 다가오다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머뭇거리는 그녀들.

하지만 내가 손짓을 하자 다들 이쪽으로 다가온다.

"다들 잘 지냈어?"

"대장!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다가…. 갑자기 이게 뭐예요? 그리고 여긴 대체 뭐에요?"

역시나 가장 말이 많은 지아가 바로 물어봤고, 그녀의 언니인 지원이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다 이야기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으니까. 저기 오네."

예준이와 도현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민희를 보더니 바로 이쪽으로 온다.

캐슬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을뻔하다가 이제는 제법 팔자가 핀 예준, 그리고 일산을 혼자 전부 쓸어버린 도현이.

"동생은 잘 있지?"

"네. 덕분에요."

아직 어린 녀석들이지만, 제법 의젓해진 두 녀석.

좋아.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거 같네.

"자. 다들. 나를 따라와."

이들은 이제 이곳을 지킬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사정을 알고 있어야지.

모두를 데리고 장룡의 거처였던 곳으로 데려갔다.

물론, 이제는 내 방이다. 여기서 지낼 일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곳은 내가 주인이다.

이들에게 그걸 확실하게 인지해줘야지.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생각이 들어도 바로 포기할 수 있도록. 아니 아예 그럴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장룡의 방으로 가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번 와본 민희와 정 부장, 승규 형만 놀라는 모습의 사람들을 보면서 반응을 즐기고 있는 모습.

"다들 편하게 앉고."

회의실처럼 만들어진 방으로 데려가서 모두를 앉게 했다.

탁자도 의자도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상당히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물건들.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는 이들의 행동이 조심스러운 게 상당히 웃긴다.

그렇게 나의 왼쪽에 펜스 쪽 사람들, 오른쪽에 청평의 사람들. 정면에는 민희와 꼬맹이 둘이 앉았다.

"하루카랑 아키는 여기 내 옆에 앉아."

특별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지만, 자리 배치가 그렇기에 어쩔 수 없네.

아니지. 아키는 특별 대우를 해줘야지. 어쨌든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키 혼자도 한 10분이면 전부 주살해버릴 수 있으니까.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일 거고, 이미 들어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말해볼게요."

모여있는 이들에게 중국과 인도, 동남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간단히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워낙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이야기를 전부 해주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람들은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좋아. 이제 배경 지식은 됐고.

"굳이 이런 걸 밝힐 필요는 없지만…."

내가 뜸을 들이자 다들 나를 보는 표정이 경악에서 호기심으로 바뀐다.

아. 이런 건 뭔가 짜릿하네.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 같잖아.

"저는 스킬이 30개가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의 파장은 상당히 컸다.

평양을 접수한 펜스의 외부조. 쟤들이 스킬 7개라 그랬나? 지금은 8개쯤 되나?

일산을 혼자 쓸어버렸던 도현이도 스킬은 8개였다. 지금은 몇 개인지 모르지만.

나를 처음부터 봐왔던 청평 사람들이나 내 이야기를 전부 들었던 정 부장, 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민희까지도 깜짝 놀라는 모습.

게다가 절대 강자라고 불리던 아키마저도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긴, 스킬을 그만큼 찍었으면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더 잘 알겠지. 놀라는 게 당연해.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전 세계의 남은 지역들을 마저 정리할 겁니다. 제 목표는 이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없애는 거거든요."

다들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

이거 좀 재밌네. 하긴, 남자라면 이런 반응을 즐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그게 남자라는 생물의 본능이잖아?

강함의 과시. 하지만 너무 과하면 오히려 반감이 커지는 일.

"이 근처의 어지간한 위협은 다 정리해놨으니, 방주는 웬만해선 위협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협이 제로는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몸이 살짝 떨리는 느낌이다.

그래도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돼. 그런 모습을 보일 거였다면, 이런 자리는 아예 안 만드는 것이 나았을 거다.

"여기는 아까 말한 중국의 넘버원이었던 장룡이라는 놈의 아지트였어요. 그리고 특수 파견대라는 놈들. 아까 말했죠? 그놈들은 다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어딘가 빼먹고 못 죽인 놈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 아지트로 오는 게이트 좌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녀석들이 하나만 들어와도…. 여러분들은 다 죽어요.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해가 막심하겠죠."

복잡해지는 사람들의 표정들.

"그러기 위해서 여기 아키를 데려왔어요. 여기 아키는…. 일본 사람이에요. 그리고 스킬이 스무 개 정도 있죠. 아마 일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을 거에요. 검성이라는 호칭도 있고요."

놀란 표정으로 아키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러자 아키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다.

"오늘부터 아키가 방주의 모든 방어를 담당합니다."

아키가 나를 바라보며 '이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잖아?'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한다.

"물론, 얘 혼자서 이 넓은 곳을 전부 방어하진 못해요. 그러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온 겁니다. 이곳 방주의 주인은 접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관리는 정 부장님, 승규 형, 민희. 이렇게 셋이서 할거에요. 방어조의 메인은 아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원 방어조입니다. 아. 하루카는 빼고. 얘는 방어하는 것보다 요리하는 게 더 이곳의 행복 수치를 올려줄 테니까요."

갑자기 언급된 하루카 역시 조금 전의 아키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일본 애들은 다 이러나? 아니 여자들은 다 이런 건가? 반응이 비슷하네.

"근데….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수준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원인은 결국 코인이에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그래.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코인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줄 게 있어요. 자. 다들 따라와요."

나는 몸을 돌려서 게이트를 열었다. 여러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게이트.

내가 게이트로 들어가자 다들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왔고, 우리는 장룡의 연구소가 있던 곳에 도착했다.

바로 탐지를 돌렸고 우리들 말고는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 확인했다.

바로 투시를 써서 구덩이 아래쪽과 연구소 안쪽을 살펴보니 코인들도 그대로 있다.

음. 다행이네.

"자. 이제부터 보물찾기 시간이에요. 저기 보이는 연구동, 저기 보이는 숙소, 공장. 거기를 돌아보면 곳곳에 코인이 떨어져 있을 거예요. 가서 주으세요. 적은 양은 아닐 테니 부지런히 주워야 할거에요. 자. 그럼 시작!"

내 말에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내가 어서 가라고 손짓하자 그제야 뿔뿔이 흩어진다.

그렇게 전부 다 흩어졌지만, 코인을 주우러 가지 않은 세 명이 있었다.

민희, 아키, 하루카.

"너희는 왜 안가?"

"저는 많이 있잖아요. 지난번에 얻어준 것도 있고."

민희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거론 부족해. 좀 더 주워."

하지만 민희는 그저 생글 웃으며 내 옆에 계속 서 있다.

하. 이 여자. 앙큼하기는. 나를 믿는다는 건가? 하긴, 민희 정도면 저번처럼 내가 언제든지 구해줄 수 있으니까.

"아키 너는?"

"나는 많이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얘는 6,500만인가 얻었지? 그럼 됐고.

"하루카 너는?"

"저는…. 요리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후. 그래. 너도 여기 있어라. 어차피 저 구덩이 거 하나씩 쥐여주면 되니까. 아. 그럼 셋이 여기 잠시 있어 봐요. 나는 저기 감옥 쪽에 다녀와야 하니까."

"다녀와요. 우리는 여기 있을게요."

싱긋 웃는 민희의 대답. 음…. 왠지 불안한데.

여자 셋을 한자리에 놓고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현명한 일일까?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별일 없겠지?

살짝 찝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세 여자를 놔두고 감옥의 자물쇠들을 열어 놓기 위해 그쪽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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