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614화 (599/703)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진짜 방주

청평.

평화로운 삶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물론 이들에게도 불평불만은 있겠지. 근데 아마 그건 사치스러운 소리일 거야.

지금 전 세계로 따져봐도 이만한 삶이면 상위 1퍼센트는 되지 않을까?

승규 형의 위치를 확인하고 바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정 형수, 하율이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란다.

"성철아! 얼마 만이야!"

"성철 씨!"

"와! 젤리 아저씨!"

이크. 역시 기억에 남는 건 젤리구나.

수납을 열어 젤리를 찾아 하율이에게 안겨줬다. 환해지는 표정.

젤리를 받아들더니 유정 형수에게 까달라고 말한다.

내가 받아서 까줬더니 신나는 표정으로 냠 하고 하나를 바로 꺼내먹는 하율.

"하도 안 와서 걱정했어. 아무 일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어디 가서 쉽게 죽을 정도는 아니라서요. 어…. 가족 간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잠시 갈 곳이 있어요."

"지금 바로?"

"네."

"그래. 근데, 누구누구?"

"일단은 형만요. 그리고…. 형수님? 뭐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여기 삶은 괜찮아요? 살만한가요?"

"당연하죠. 여기 벙커도 좋고…. 다들 맘에 들어 하고 있어요."

"또 이사를 해야 한다면요?"

"네? 이사요?"

"적어도 여기보단 좋은 곳인데요."

"저희야…. 성철 씨가 그렇게 말하면 듣지 않을 수가 없죠. 이것도 다 성철 씨가 해준 거잖아요. 더 좋은 곳이니 이사를 말하는 거겠죠?"

"당연하죠. 다들 이제 막 여기에 정붙였겠지만, 이야기 좀 해주세요.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어차피 이쪽을 다시 못 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요."

"알겠어요. 근데…. 지금 바로겠죠? 성철 씨 성격상?"

"저번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할 필요는 없어요. 각자 짐만 챙기라고 하세요. 그럼 승규 형? 가죠."

게이트를 열었고, 승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들어간다.

그런 승규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하율.

부럽네. 역시 아이는 소중하지.

게이트를 넘어가자 승규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그래. 그럴 만하다. 저들이 사는 벙커도 국내 최고급 수준이긴 하지만…. 여기는 아예 급이 다르니까.

"이야….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이제 그거에 대해서 말할 거에요. 잠시만 있어 볼래요?"

나는 바로 게이트를 열어 민희와 정 부장을 데리고 왔다.

결국, 셋이 만나게 됐네. 하하. 이런 날이 오게 되네.

"다들 따라와요."

예전 장룡이 머물던 방. 그곳으로 향하자 민희와 승규, 정부장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슬쩍 봐도 존나게 비싸 보이는 소파. 다들 앉게 하고 수납에서 음료 하나씩을 꺼내 내민다.

내가 음료를 내미는지도 모른 채 방을 보느라 정신없는 세 사람.

"어. 이제 말해도 될까요?"

내가 말하자 셋은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바라본다.

나이도 적당히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귀엽네. 보는 재미가 있어.

"일단, 여기가 좀 화려하죠?"

"어지간한 건 많이 다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좀 대단하네요. 겉보기만 번드르르 한 게 아니고 모든 물건이 하나하나 진짜로 고급스러운 곳인데요?"

"당연하죠. 여기는 세상이 망한 이후 중국을 자기 수중에 넣은 장룡이라는 녀석의 아지트니까요."

내 이야기에 깜짝 놀라는 세 사람. 정 부장은 아까 들었는데도 또 놀라네.

"그 말은…. 성철 씨가 그 장룡인지 하는 사람을 처리했다는…?"

내가 말없이 끄덕거리자 정 부장이랑 민희는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너무나 낯선 거 같은 승규. 하긴, 내가 저쪽엔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하긴 했지.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전부 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말해볼게요. 여기 짱개놈들에겐 가장 윗대가리 셋이 있었어요. 장룡, 고룡, 왕룡. 장룡은 중국을, 고룡은 인도를, 왕룡은 동남아를 담당했던 놈들인데…."

그렇게 스킬에 대한 것들은 빼고 현 상황에 대한 것들을 전부 말해줬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세 사람.

"그럼…. 중국과 인도, 동남아에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뒤져보면 어디든 살아있는 놈들이 있겠죠. 인도는 아직 꽤 남은 거 같고, 동남아도 인도네시아 쪽은 남아있는 거 같고."

"허허…. 그래도 정말 믿기 힘든 소리네요. 그럼…. 성철 씨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까?"

"글쎄요. 아직 돌아보지 않은 세상은 많으니까요. 미국도 건재하고, 중남미 쪽은 아직 보지도 못했고, 유럽도 있죠. 중동이랑 아프리카도 있고."

"그런 곳도 다 둘러볼 생각입니까?"

"당연하죠. 아무튼…. 제 이야기는 됐고, 이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하죠. 일단 각자 소개부터 해드릴게요. 이것부터 해야 했는데, 제가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직 안 하고 있었네요."

민희가 작게 웃었고, 정 부장과 승규는 그런 민희를 힐끔 바라본다.

"먼저…. 이분은 승규 형이고요. 어…. 형이 김 씨였던가요?"

"김승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승규가 인사하자 민희와 정 부장이 꾸벅 인사한다.

와. 이거 드럽게 어색하네. 뭔가 멋지게 척척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아.

"승규 형은…. 지금 청평에서 스무명 정도를 이끌고 있어요. 리더쉽 있는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고요."

살짝 민망하다는 듯 목덜미를 긁는 승규.

다음에 나는 정 부장을 보고 말했다.

"이분은 정 부장님. 이름은…. 어. 부장님 성함이 선균이었죠?"

"네. 맞아요. 정선균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도 서로 인사하는 세 사람.

왠지 사회인들이 만나서 서로 인사하는 모습 같네. 굉장히 자연스러워. 나는 어색해 죽겠는데.

"이분은 현재 동두천에서 펜스라는 곳을 운영하고 있어요. 전체 인원은…. 지금 몇 명이죠?"

"400명 정도 됩니다."

음…. 북한 공략하면서 100명 정도 죽은 건가? 그 정도면 상당히 피해가 적네.

"그렇데요. 그리고 이쪽은 정민희. 캐슬을 이끌고 있죠. 인원은 200명 정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민희라고 해요. 맞아요. 그 정도 되죠."

또다시 인사. 그럼 이 정도면 됐고….

"민희야. 정 부장님이 너희가 사는 의정부, 거기 원래 주인이야."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쓰고 있어요."

"아하. 의정부 빈 곳에 들오시겠다고 한 분들이 이쪽이시구나. 근데…. 캐슬이면?"

"맞아요. 성채 그놈 잡아 죽이고 민희가 성주가 됐죠."

"아이참. 그 성주 소리는 하지 말라니까요."

살짝 부끄러워하는 민희.

나와 둘이 있을 때랑은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내가 모르는 민희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왠지 낯설긴 한데…. 저것도 좋네.

아마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겠지. 그녀는 어엿한 사회인이었으니까.

"어쨌든, 제가 세 사람을 부른 이유는 다른 거 없어요. 여기 이곳은 중국 청두의 서쪽 산속에 있는 아주 시크릿한 벙커에요. 벙커 수준을 한참 넘은 비밀기지 같은 곳이지만, 어쨌든 이곳은 지극히 안전해요. 시설도 넓고, 이 안에서 자급자족도 가능해요. 300명은 넉넉히 유지 했던 거 같은데 시설 크기나 여유분을 보면 세 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번 기회에 실행하는 거예요. 굳이 따로 떨어져서 위험하게 살 필요는 없죠. 다 같이 뭉쳐있는 게 나으니까."

"그런데…. 취지는 이해하겠는데."

승규 형의 조심스러운 말. 나는 그를 바라봤고 승규는 계속 말을 잇는다.

"내가 여기 낄 자리는 아닌거 같은데. 규모로 따져도 여기 두 분이 이끌고 우리 청평은 그냥 조용히 들어와야 하는 게 맞지 않아?"

"하여간…. 다들 어떻게든 겸손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 같다니까. 제 생각에는 아니에요. 형은 여기 이 두 명이랑 같이 여기를 이끌어야 해요. 그건 내가 정하는 거니까 다들 군말 없이 따라줘요. 여기 이름은 방주. 리더는 여기 모인 셋이에요."

"리더는 성철 씨죠."

정 부장이 말했고, 민희와 승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게 필요하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모든 실무를 맡아서 하는 건 세 사람이라고요. 사람들을 배치하고 식량을 생산하고 남은 삶을 문제 없이 살 수 있게하는 것. 그건 셋이서 할 일이에요."

"그냥 하던 거 계속하면 되는 거잖아요? 더 안락한 곳에서 더 편하게?"

깔끔한 정 부장의 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세 분은 이제 여기 내부를 파악하고 거주지 배치와 인력 배치, 보안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정해야 할거에요. 제가 지금 바로 여기 최하층에 각 지역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고 갈 거니까 서로 오가면서 배치가 끝나면 바로 이주해주시고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자 내 말을 기다리는 세 사람.

"하아. 어디 보자. 내일…. 정오로 하죠. 펜스에서는 외부조 전원, 캐슬에서는 예준이랑 도현이, 청평에서는 민준이랑 동현이, 진영이, 승주랑 중현이…. 그리고 그 뭐냐. 윤재현 그놈까지. 그렇게 모여주세요."

"외부조 전원요. 알겠습니다."

"예준이랑 도현이. 알겠어요."

"민준, 동현, 진영, 승주, 중현, 재현. 알겠어."

"그럼 따라와요. 최하층으로 내려가죠."

세 사람을 데리고 이제는 장룡의 아지트가 아닌 방주가 된 곳의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활주로와 비행기, 헬리콥터, 비어있는 커다란 공터를 본 세 사람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잠시만 있어 봐요."

최하층의 공터를 저장한 나는 먼저 동두천으로 순간 이동해서 비어있는 적당한 곳을 찾아 방주 쪽으로 게이트를 썼다.

그렇게 캐슬과 청평도 반복한 나는 다시 방주로 돌아왔고, 세 곳의 게이트가 나란히 서 있는 걸 확인한 뒤 말했다.

"이제 시작이에요. 게이트는 어지간해선 닫힐 일 없을 거예요. 유지시간이 꽤 길거든요. 그러니 마음껏 오가시면 되고, 민희는 세 곳 다 저장해놔. 필요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럼, 잘해보세요. 세분의 능력을 믿어요."

"크…. 역시. 이렇게 던져놓고 바로 가시는 건가요? 성철 씨 답네요."

"아. 혹시 이 사람 거기에서도 이랬나요?"

짓궂은 표정의 민희. 정 부장은 동지를 만난듯한 표정을 짓는다.

"네. 물론이죠. 그리고 맨날 도망치듯 떠나요."

"어. 그건 저희도 매번 당하던건데."

이번엔 승규 형. 아…. 이거 왠지 빨리 여기를 떠야겠는데.

"그럼 내일 정오에 봅시다. 저는 할 만큼 했어요. 여러분들을 믿어요."

그리고 도망치듯 순간이동 했다.

어휴. 저런 분위기는 힘들어. 아무리 낯익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말이지.

내가 순간이동 한 곳은 홋카이도. 한참 만에 온 곳.

방주를 만들었으니…. 탑승 인원은 마저 챙겨야지.

한데 모아놓긴 했지만, 저들만으로는 불안하다.

저들이 아무리 모여도…. 특수 파견대 한 놈에게도 다 썰릴 수 있으니까.

확실한 무력이 필요해. 그리고 거기엔 아주 적합한 사람이 있지.

"오빠!"

하루카와 아키가 있는 집으로 가자 하루카가 나를 발견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와락 안긴다.

얼래? 얘는 왜 이리 혼자 신파를 찍고 있어.

"다시는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엥? 내가 왜?"

"그때…. 그렇게 그냥 가셔서…."

"나중에 보자고 하고 가지 않았냐? 별걱정을…."

하긴, 그때 분위기는 조금 그렇긴 했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하고 나가긴 했으니까.

그렇게 울먹이는 하루카를 다독여주는데 아키가 쓰윽 하고 나타났다.

나를 바라보는 복잡한 표정. 쟤는 또 왜 저렇게 나를 보는 거야?

"일단, 앉아.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어."

하루카와 아키가 식탁에 앉았고, 나는 하루카가 말한 내 자리에 앉았다.

막상 말하려니 상당히 어색하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두 사람. 홋카이도를 떠나서 한국인들과 어울려서 살 생각이 있어?"

단도직입적인 내 질문에 하루카와 아키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그녀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중국과 인도, 동남아의 간단한 상황이랑 내가 만들어낸 생존자 그룹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걸 한자리에 모은다는 이야기까지.

"근데 거기에 왜 나와 하루카를?"

"거길 지켜줄 강한 사람이 필요해서."

"단지 그 이유로?"

"그 핑계로 계속 보고 싶은 이유도 있고."

사실…. 이건 미친 짓이긴 하다.

민희. 그리고 펜스의 다섯 여자, 게다가 청평의 여자들까지.

그 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대체 어떤 꼴이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내 평판은 최악으로 꼬라박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그런 곳에 하루카와 아키까지 데려가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필요한 일이다.

방주. 그곳은 딱 내가 설정해둔 경계선.

그 밖에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죽일 수 있다는 각오 같은 것.

승미세안 네 여자를 방주에 데려갈 생각은 없다.

내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네 여자. 그리고 남겨놔야 할 방주.

이렇게 딱 두 가지로 나누고 싶은 게 내 생각이니까.

"저는 갈래요."

하루카의 거침없는 대답. 얘는 이럴 줄 알았지.

“그럼…. 아키는?”

"모르겠어."

"그래. 당장 대답을 달라는 건 아냐. 내일 정오. 그때까지 생각해봐. 그리고 나는 니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모르겠다고."

"알았어. 강요는 안 해. 그럼 내일 정오에 보자."

"어? 이대로 가시려고요!? 식사는요!"

"내가 있으면 아키가 생각하는 데 방해 될 거야."

"히잉…."

"그럼 가볼게. 내일 보자. 하루카."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내일 보자. 아키."

"하아. 알겠어."

한숨을 쉬며 나에게 대답하는 아키.

근데 말은 저렇게 해도 갈 거 같은 느낌이 드네. 왠지 느낌이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