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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과 검
다음날.
아침을 먹고 승미세안과 느긋하게 베이징을 돌았다.
간밤에 들어온 코인은 40만. 얼추 4천 명.
카타스트로피나 데스 윈드나 파괴력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음…. 근데 또 그렇게 생각하면 카타스트로피가 이득이긴 하네.
데스 윈드는 배우는 데 선행 스킬이 너무 많잖아? 게다가 활용되지 않는 스킬이 너무 많다.
독무나 출혈 같은 건 솔직히 단독으로 쓸 일이 없지. 스킬 낭비야.
하지만 카타스트로피는 아니다.
기본 스킬 10개가 번거롭긴 하지만, 결국 배우다 보면 기본 스킬은 열 개가 되게 돼 있다.
특히 히든 스킬이 있는 것들은 무조건 배우는 게 이득이니까.
따로 노리지 않았는데도 승희와 미나, 세아가 9개씩이나 된 거 보면 역시 카타스트로피가 이득이긴 해.
랜덤으로 나가서 문제지.
그렇게 뭔가 더 효과적으로 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해안가로 가기로 했다.
역시 자연재해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땅, 물, 불, 바람.
땅은 지진으로 어제 했고 불은…. 화산? 화산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바람은 토네이도랑 데스 윈드가 있으니….
남은 건 물이지…. 홍수, 아니면 해일. 한파나 폭설.
텐진. 거기에서 안나가 카타스트로피를 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보고 있기만 해도 불알이 쪼그라드는 느낌이네.
저걸 직격으로 맞으면 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해일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해안가에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피해를 준다.
그렇게 시작한 해안가 투어.
가끔 해일 말고 지진이나 생물 재해도 나가긴 했지만, 대체로 해일이 잦았다.
아무래도 주변 환경에 따라 나오는 빈도가 달라지나 보네.
그렇게 중국의 해안가를 쓸어버리며 한참을 이동하다 보니 역시 드는 생각은 그거다.
코인 줍기. 어휴. 이 많은 코인은 또 언제 줍고 있냐.
테이밍 한 동물들이 과로 좀 해야 할 거 같네. 어차피 뭐…. 과로로 죽으면 새로 테이밍 하면 되니까.
게다가 세아도 게이트가 생겨서 내가 없더라도 알아서 테이밍을 리필 할 수 있게 됐고.
"나 없을 때는 절대 조심해야 해. 아무리 만만해 보여도 싸우지 말고 될 수 있으면 피해. 파티는 걸려있는 데다가 이건 내가 해제하거나 너희가 제 손으로 나가기 전에는 절대 안 풀리니까 만약 흩어지게 되면 세아가 이동하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가. 기왕이면 바다나 호수 위 같이 바닥이 없는 곳까지 계속. 그런 다음에 안전한 게 확인되면 게이트를 열고 빠르게 도망을…."
"아. 정말 쫑알쫑알 말 진짜 많네. 왜 그리 걱정이 많은 거야?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워?"
참다못한 세아가 터졌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쩝. 이게 문제네. 이게 문제야.
나 없는 곳에서 따로 움직이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그게 승미세안 네 여자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인 거야. 하아. 나도 참 드럽게 웃긴 새끼네.
"못 미더운 게 아니야. 걱정하는 거지. 알잖냐. 한번 삐끗하면 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또 또 말 길어진다. 우리도 우리 목숨 소중한 거 알아. 그러니 너무 걱정 좀 하지 마. 나도 오빠 놔두고 먼저 죽고 싶지 않…. 뭐야 표정 왜 그래? 왜 이리 음흉하냐?"
"아냐 아냐. 계속 말해. 끝까지 말해줘. 나 놔두고 먼저 죽고 싶진 않다고? 그렇게 말한 거지?"
"캬악! 진짜! 능글거리기는!"
옆에 있던 승희와 미나, 안나도 그런 세아를 보면서 킥킥거린다.
어어. 세아 저거 얼굴 빨개진 거 같은데? 여기서 한 번 더 놀리면 더 빨개지겠지?
근데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다. 재밌긴 한데 너무 찌르면 또 터진단 말이지.
밑에서는 짱개들이 물에 휩쓸려 죽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하늘에서 이렇게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나 하고 있다.
참…. 비현실적인 장면이야. 정말 누군가 보고 우리를 사이코패스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어.
그렇게 하루 만에 산둥반도의 끝까지 깔끔하게 해일로 쓸어버린 우리는 까마귀들을 테이밍 해서 코인을 줍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패시브가 늘어서 이제는 서른세 마리가 된 까마귀들.
괜히 의심받지 않게 최대한 퍼뜨려 놓긴 했는데…. 뭐, 잘하겠지.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테이밍으로 강화돼있기에 어지간한 천적에도 당할 리 없잖아? 당한다면 오로지 인간뿐이다.
그거 말고는 죽을 일이 없지.
그렇게 집에서 쉬다가 나는 홋카이도로 넘어갔다.
이제는 깔끔해진 집으로 완전히 이사하게 된 하루카와 아키.
둘은 생각보다 잘 맞았는지 상당히 친하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하루카에게는 천연스러움과 선함이, 아키에게는 강자에게서 볼 수 있는 여유와 진중함이 있으니까.
어찌 보면 둘은 상당히 어울리는 분위기다. 뭐랄까.
학원물에서 보는 여주들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 그 둘은 목도를 들고 휘두르고 있었다.
웬 목도야? 검술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뭐해?"
"천사님!"
내가 나타나자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하루카. 웃. 눈부셔. 나처럼 죄 많은 놈은 저런 해맑은 미소를 보면 양심에 찔린다고.
거의 안나급의 해맑음이잖아? 근데 뭐랄까. 안나가 산전수전 다 겪은 차분함이라면, 얘는 그저 천연스러운 느낌이다.
그래서 더 해맑을지도?
"하루카. 천사가 아니래도."
"나도 알아요. 아키상. 그래도…. 그냥 천사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뭐지? 뭔가 좀 바뀐거 같다? 아키가 옆에서 열심히 세뇌를 풀었나?
아니지. 하루카는 천연덕스러운 거지 바보가 아니잖아. 어휴. 내가 쟤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네.
"하루카 짱?"
"네. 천사님."
"굳이 천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에에…."
"그래. 나도 니가 원하는 거 같기에 맞춰준 거지…. 니가 정말로 나를 천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거지?"
"헤헤. 네에. 맞아요. 그래도…. 천사님은 제게 정말 천사 같은 분이에요."
"그건 고맙네. 하지만 굳이 천사님이라고 부르진 않아도 돼. 그건 아키짱 말이 맞으니까. 그래. 이렇게 된 거 호칭 정리나 해야겠네."
"네?"
"하루카 짱?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야."
"한국? 아아…. 정말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유창한 일본어를…."
"통역이라는 스킬이 있어. 하루카. 그걸 배우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어."
옆에서 아키가 껴들어서 말한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루카.
"어쨌든, 한국에서는 나이 어린 여자들은 나이 많은 남자한테 보통 '오빠'라고 부르지."
"아! 알아요! 오빠라는 말! 저도 좋아하는 한국 남자 아이돌 그룹이 있었어요!"
그래. 하루카도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꿈많은 소녀였겠지.
스물하나라고 했던가? 그럼 세상이 망할때는 열여섯이었겠네. 승희나 세아랑 같은 나이.
그럼 한창 그런 거 좋아할 나이긴 하지.
"그러니까 앞으로 오빠라고 부르면 될 거 같아. 내가 남자 아이돌들만큼 잘생긴 건 아니지만."
"헤헤. 아니에요! 저에게는 천사님…. 이 아니고 오빠가 더 멋진걸요!"
얼마나 콩깍지가 쓰였으면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참…. 대단하네. 얘는 너무 천연이야. 확실히 보호가 필요해.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름 뒤에 뭘 따로 붙이진 않아. 그래서 나는 하루카 짱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루카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좋아. 그게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아…. 그래요. 그렇구나. 헤헤."
"그리고 이건 아키 너도 마찬가지야. 물론 너는 별로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아키라고 부를 거야. 너도 나를 오빠라고 불러."
"에엑.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완전 제멋대로인 남자네."
"그치. 나는 제멋대로인 남자 맞아. 내 맘대로 가면 놈을 잡아다가 니 앞에 던져놨고, 너도 여기로 데려왔지. 그리고 호칭도 이제 내 마음대로 될걸?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던 것도?"
아키의 입에서 내가 좋다고 말하게 하는 것. 그걸 생각해냈는지 약간 허둥대는 모습.
음. 저런 걸 보면 약간 가망이 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하…. 그래. 대단하네. 근데 나는 마음대로 안 될 거야."
"글쎄.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근데. 뭐 하고 있었어? 검술 훈련?"
"네! 아키상이 저를 가르쳐주고 있었어요! 자신이 지켜주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본인이 본인의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요!"
"흐음. 그건 뭐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지금 와서 배우는 건 너무 늦지 않나? 크게 효과는 없을 거 같은데?"
"배움에 늦음이란 없어.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는 꼭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키의 표정은 뭔가 선생님 같은 모습이다. 아니. 선생님이라기보단…. 사범?
그래. 검도를 했다고 했지? 그럼 검도 사범이 맞겠네.
근데 본인이 생각하고 말한 게 아니라 누군가 말한 걸 그대로 따라 한 듯한 느낌?
하긴, 저 나이에 사범씩이나 되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흐음. 그래? 그럼 나도 안 늦었나?"
"뭐? 그쪽도?"
"그쪽이라니. 오.빠.라고 해. 따라 해봐. 오.빠."
"은근슬쩍 기대하지 마. 아직은 그럴 마음 전혀 없어."
"오오. 그래? '아직은'이라고? 그럼 언젠가는 할 마음은 있다는 거네?"
"뭐…. 뭣?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냐! 말이 잘못 나온 거야!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어!"
재밌는 여자다. 고지식하고 속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여자.
세아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근데 대체 저런 여자가 고스족 드레스는 왜 입은 거야? 이상한 화장까지 하고.
그게 가장 궁금한데…. 그건 지금 물어봐도 절대 이야기 안 해주겠지?
"뭐든, 나도 배우면 좀 강해지나?"
"그거야 그쪽이 하기 나름이겠지."
"흐음. 글쎄. 휘두르는 건 많이 휘두르긴 했지. 언제나 목을 내리치는 데만 쓰긴 했지만."
수납을 열어 마체테를 꺼냈다. 요즘엔 염력질을 하면서 거의 안 꺼냈지만, 근 5년 동안을 나와 함께 해온 마체테.
그간 열심히 날을 세워주기도 했지만, 회귀가 생긴 이후로는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언제나 처음 만들어진 그 상태로 돌아가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마체테는 상당히 반짝반짝한 느낌이다.
수많은 사람의 목을 쳤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거…. 좀 볼 수 있겠어?"
"이거? 물론이지."
마체테 손잡이를 염력 촉수로 잡아서 아키의 앞에 쓰윽 가져다줬다.
칼이 공중에 떠서 오자 흠칫 놀란 모습이지만 태연한 척하며 받아드는 아키.
"휘둘러 봐도 될까?"
"어휴.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돼. 그건 그냥 캠핑용품점에서 가져온 그리 대단하지 않은 공산품 칼이라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무기를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쓸 수는 없어."
안 그래도 고지식한 면이 있는 여잔데 저런 쪽으로는 확실히 더 엄격하네.
"얼마든지. 그 마체테도 나같이 징그러운 남자가 휘두르는 것보다 이쁜 여자가 잡고 휘둘러주면 더 좋아하겠지."
내 말에 인상을 쓰더니 마체테를 바로 잡는 아키.
그리고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앞을 향해 휘두른다.
"와아…."
하루카의 탄성. 그리고 나도 내색은 안 했지만 하루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몇 년이나 들고 휘둘렀지만, 저 마체테가 저런 궤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 내 손에서는 그저 날붙이였던 거야. 백정의 도축칼 같은 거였지. 그저 사람 목을 치기 쉽게 하기 위한 도구.
하지만 아키의 손에 쥐어지자 비로소 검의 모습이 살아났다.
공기를 가르며 무언가를 베는 무기. 그리고 그 이상.
"멋지네. 그간 마구 휘둘렀던 마체테한테 미안해질 정도로."
"나도…. 놀랐네. 그쪽이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굉장히 좋은 칼인걸? 무게중심도 잘 잡혔고. 길이도 적당하고…. 무게도 그렇고."
"그거야 당연하겠지. 석박사들이 머리 싸매고 만들어낸 제품이라고. 공산품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거야."
"으음. 그렇지. 그건 그래."
그러면서 이번에는 사선으로 그어본다.
그리고 다시 전방, 이번엔 몸을 돌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리기.
그 궤적이 상당히 아름답다. 확실히 저게 배운 사람의 움직임이라는 거구나.
그렇게 검을 몇 번 휘두른 아키는 조심스럽게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나에게 내민다.
"마체테 녀석. 호강했네."
마체테를 염력으로 받아들여 바로 수납에 넣었다. 아마 당분간은 다시 나오기 힘들겠지.
"그쪽도 할 테야?"
그러면서 자신의 수납에서 목검을 하나 더 꺼낸다. 으음. 어쩔까?
하는 게 저 여자의 호감도를 쌓는데 더 유리하겠지?
"됐어. 그 시간에 스킬 숙련을 하지."
기껏 권했는데 내가 거절하자 살짝 표정이 안 좋아지는 아키.
하지만 나는 내가 노력하면서 저 여자의 호감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렇게 정했으니까.
게다가 이제 와서 하기엔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여전하고.
"관둬. 그럼."
다시 목검을 수납 안에 집어넣는 아키.
"그럼, 우리는 계속할까? 하루카?"
"네. 아키상."
그렇게 옆에 앉아서 두 여자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본다.
할걸 그랬나? 한 10분 만에 후회가 들긴 했지만…. 인제 와서 하겠다고 하는 건 더 웃기잖아.
그냥 내가 하고픈 대로 해야지. 차라리 그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