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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스트로피
그렇게 가만히 앉아 미나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 안나가 일어났다.
나와 미나를 보더니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짓고는 자기도 안기는 안나.
그러면서 실수로 승희를 밟았고, 승희가 으악 소리를 내며 일어난다.
급하게 사과하는 안나, 괜찮다고 하는 승희.
미나와 안나가 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밟힌 곳을 몇번 문지르더니 자기도 끼어든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다들 잠 없니?"
승희의 비명과 아옹다옹하는 세 여자의 뒤척임에 결국 잠에서 깬 세아.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작게 에휴 하고 한숨을 쉰다.
겉보기엔 한심하다는 눈치지만…. 내가 보기엔 자기도 낄까 말까 고민하는 걸로 밖에 안보이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결국, 세아는 끼어들지 않았고 우리는 전부 다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간단하게 차려 먹은 브런치. 그리고 느긋한 휴식.
그러면서 나는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이야기해줬다.
물론 위치스에 대한 건 이야기 못 했지만, 뇌제와의 전투는 제법 상세히 설명했다.
상당히 흥미롭다는 듯이 이야기를 듣는 네 여자.
하긴, 얘들도 그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알아야지. 그래야 목숨을 건지지.
"그건 그렇고…. 너네도 스킬 다 마스터 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승희와 안나. 그리고 세아.
하긴, 저번에도 전부 같은 날 마스터 했지. 편하고 좋네. 이게 여자들의 공감과 동조인가.
"어. 그럼 승희부터 할까? 수납 마스터 한거지?"
"네에."
"으음…. 그럼 이제 뭘 찍는다."
어디 내놔도 부족할 게 없는 승희다.
이제 티어18이 된 거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승희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거 같다. 어쨌든 우리에겐 수납 킬이 있으니까.
게다가 염력이랑 폴터가이스트도 있어서 스킬 사용 불가 지대에 걸리더라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고.
하지만 다른 특색이 없는 게 조금 아쉽다. 진동파와 EMP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제대로 못 보고 있으니까.
음…. 뭐가 좋지. 뭔가 스페셜한걸…. 아. 카타스트로피. 그거 못 배우나?
"승희야. 너 기본 스킬 몇 개지? 어디 보자…. 힐, 투명화, 비행, 폭발, 진동파, 보호막, 반사, 탐지, 잠금 해제, 염력. 9개네?"
"네. 맞아요."
"아. 아쉽네. 한 개만 더 배우면 카타스트로피 배우는데."
"아아. 그 재난? 그거 조건이 기본 스킬 열 개였나요?"
"어. 맞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미나와 세아가 말한다.
"저도 아홉개네요. 기본 스킬."
"나도 아홉 개인데?"
"썽철?"
아쉽다는 듯한 미나와 세아와는 달리 황당한 표정의 안나.
"어?"
"저…. 기본 스킬 열한 개인데요?"
"어?"
나를 비롯한 승희와 미나, 세아가 깜짝 놀라 안나를 바라봤다.
"열한 개? 잠깐만…. 탐지, 투명화, 비행, 바람 칼날, 반사, 보호막, 번개 주먹도 있지? 독무랑 출혈에…. 상태 회복이랑…. 염력. 얼래? 진짜네? 뭐야 왜 안나를 놓치고 있었지? 아. 데스 윈드에 정신 팔려서 다른 거 배울 생각을 전혀 안 했구나!"
"그럼…. 이거 배워요?"
"어. 당연히 배워야지! 안나 너 염력 마스터하고 패시브는 다 찍었지? 폴터가이스트 까지?"
"네."
"그럼 배워. 어차피 그것도 숙련 필요 없는 스킬일거야. 배우면 바로 끝나."
"알겠어요. 배울게요."
"맙소사. 안나는 완전…. 생물재해급 여자가 됐네."
데스 윈드와 카타스트로피면…. 솔직히 말해서 답이 없다.
나도 안나와 파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붙을 방법이 없으니까.
만약에 안나와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내가 쟤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마 지금 지구 최강자는 안나가 아닐까?
중장거리는 노쿨 데스 윈드, 근거리는 번개 주먹, 게다가 염력도 있으니 쉽지 않을 거다. 게다가 쟤는 탐지랑 보호막, 데미지 감소에 반사도 다 있어.
적이 아니라는 게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쟤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다행이고.
"배웠어요."
"그럼…. 쓰러 가보자. 지금 스킬 찍고 있을 때가 아니네. 효과는 어느 정도 알긴 하지만 아는 거랑 실제로 써보는 건 다르지. 그리고 만족스러우면…. 넷 다 카타스트로피 가자."
그러고 보니 나도 아홉 개네. 이번에 기본 스킬 하나만 배우면 다음번에 카타스트로피를 배울 수 있어.
일단, 그건 테스트를 하고 나서 생각하자. 지금은 일단 효과부터 봐야지.
게이트가 열리고 우리는 여지 없이 베이징에 섰다.
영원한 샌드백, 코인 밭, 죽여도 죽여도 아직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는 바퀴벌레 소굴.
우리가 그렇게 잡았는데도 그렇게 티도 안 난다.
정말…. 죽이고 죽이고 죽이다가 지칠 것 같은 곳.
"일단…. 짱개들 밀집해있는 곳으로 가자. 근데, 카타스트로피가 아무리 강해도 데스 윈드 보단 효율이 좋을 거 같지는 않은데."
어차피 스킬 효과의 범위는 정해져 있고 범위 안에서의 살상력이라면 데스 윈드를 이기긴 힘들다.
보호막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죽여버리는 데스 윈드. 게다가 티어도 높잖아.
그걸 능가하기는 쉽지 않겠지. 그게 되려면 스킬을 쓴 다음에 후폭풍이 더 거세거나 그래야 하는데…. 음.
한파, 해일, 지진, 메뚜기 떼. 지금까지 알아낸 효과는 그렇다.
물론 그것들도 끔찍한 효과긴 하지만…. 데스 윈드 만큼 빠르고 확실한 효과는 없지 싶은데.
"일단 써보자. 써보면 알겠지."
"여기서 쓸까요?"
"응. 해보자."
"알겠어요. 카타스트로피."
안나가 짧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지? 쓴 거 맞지?"
"네. 근데 아무 반응이 없네요. 제가 발음을 잘못 한 걸까요?"
"글쎄. 잠깐 기다려보자. 이거 뭐 쓴지 안 쓴지 바로 효과가 안나오니 답답하네. 데스 윈드 처럼 검은 원이라도 나오면 좋은데."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아래쪽 지상에서 서서히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다.
그그그그 하는 소리. 마치…. 대지가 고통을 못 이기고 몸부림치는 듯한….
"어…?"
그래. 내가 경솔했다. 내가 좀 성급했어. 조금만 더 기다릴걸.
안나의 가벼운 한마디에 대지가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재난 영화에서만 봐오던 그 장면. 무섭도록 땅이 흔들리다가 결국…. 땅이 쩌적하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허…."
갈라지는 땅, 솟아오르는 땅,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터지는 작은 폭발들, 갈라진 틈 사이로 떨어지는 온갖 잡것들.
끊어지는 고가도로, 쓰러지는 빌딩, 무너지는 건물, 혼란, 아비규환, 그리고 죽음.
공중에 떠 있는 우리가 느끼기에도 심상치 않은 지진이 베이징을 덮쳤다.
시전자의 수준이 높을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걸까?
아니면 원래 지진이란 게 이렇게 무자비하고 끔찍한 걸까?
데스 윈드랑 비교 한 게 약간 민망할 정도다.
물론 사람들만 죽인다면 데스 윈드가 더 좋을 수는 있지. 하지만 공포의 스케일이 달라.
데스 윈드가 조용한 죽음이라면, 카타스트로피가 만든 지진은 절규하는 죽음이다.
대지가, 인간이, 문명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는 모습.
"심하네…."
내가 쥐어짜 내듯이 한마디 했지만 다들 말이 없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서진 건물을 세는 것보다 멀쩡한 건물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의 피해.
그리고…. 목숨을 건진 자들의 아우성.
"음. 효과는 확실하네. 이건 뭐…. 몇 번 당하고 나면 정신없겠는데? 그러면…. 한 번 더 써보자. 원래 카타스트로피는 하루에 한 번이거든? 근데 안나는 제약 해제가 있으니 또 쓸 수 있을 거야. 그거 말고는 별다른 제약이 없을 테니까."
내 말에 깜짝 놀라는 네 여자.
그 표정들은 '이런 짓을 또?'라는 표정이다.
쯧. 무뎌. 약해. 하긴. 얘들은 나랑 같이 학살에 동참하긴 했지만…. 나 정도로 미친 건 아니니까.
"안나. 또 써봐."
"네. 카타스트로피."
놀랐긴 했지만 망설임 없이 한 번 더 쓰는 안나.
그래. 이런 게 좋은 거다.
'어떻게 이런 짓을!' 이라던가,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신 안 해요!' 라던가….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는 여자들은 아니니까.
역시나 잠잠한 주변. 아, 지상에 살아남은 이들의 아비규환이 가득 차 있으니 잠잠한 건 아니지.
어쨌든 두번째 카타스트로피의 효과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기다린다.
금방 나오겠지. 이번엔 설레발 떨지 말고 잠자코 기다리면 돼.
그리고…. 미증유의 재난이 지진 피해를 입었던 곳에 다시 한번 덮쳤다.
어디선가 나타난 회색 물결. 그래. 저건 회색 물결이었다.
뭔가 해서 천리안으로 살펴보니…. 하. 이건 씨발…. 좀 심하네.
"너네. 절대 동물 탐지는 하지 마라."
"네?"
"엥?"
"갑자기요?"
동물 탐지를 가지고 있는 승희와 세아, 안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어봤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손을 들어 회색 물결을 가리켰다.
회색 물결. 그건 달려오는 쥐 떼였다. 어찌나 숫자가 많은지 물결로 보일 정도.
"히익."
그제야 지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챈 승희가 끔찍하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킨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미나와 세아. 입을 틀어막고 있는 안나.
그래. 너희는 그냥 징그럽고 말겠지.
하지만 천리안과 투시를 쓰고 있는 나는 지상의 상황이 그대로 보인다.
쥐 떼에게 공격받아 빛이 돼버리는 짱개들.
와씨…. 끔찍하네. 저런 개죽음이 어딨냐. 쥐 떼에 휩쓸려서 죽어? 어휴.
그렇게 두번의 카타스트로피가 끝나자 지상은 정말…. 만신창이가 됐다.
지진만 지나갔었으면 그래도 사상자가 많았겠지만, 생존자도 많았을 거다.
그냥 생활 기반만 박살 나고 목숨은 건졌겠지.
하지만 쥐 떼가 치명적이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그 많은 쥐 떼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쥐 떼도 전부 사라진 건 조금 아쉽네. 그대로 남아서 주변까지 싹 휘몰아쳤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더…. 안 해도 되겠죠?"
"응. 된 거 같다. 돌아가자. 아. 코인은 주워야지. 쥐나 까마귀 테이밍하러가자. 근데 쥐 떼가 저렇게 돌았는데 쥐들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네."
결국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쥐들을 테이밍하고 불러와 코인을 줍게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말이 없이 조용한 모습.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나?
"성능은…. 나쁘진 않네. 로또성이 강하긴 하지만, 어쨌든 위력은 있으니까. 게다가 한 명이 여러 번 쓸 수 있으니 전부 다 배울 필요는 없긴 한데…. 어차피 히든 스킬을 노리려면 기본 스킬들은 찍어야 하니 기회 되면 찍자."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좋아. 그럼 카타스트로피는 됐고.
"승희 하다 말았지? 으음. 그럼 승희는 뭘 배우나."
"내가 배우고 싶은 거 배워도 돼요?"
"당연하지. 니가 배우고 싶은 게 우선이지."
"그럼 나 스킬 사용 불가 지대요."
"오? 이유는?"
"오빠가 저번에 침묵이랑 봉인. 그거 이야기한 적 있었죠?"
"아. 야쿠자의 왕? 그치."
"그거는 결국 오빠가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셀프 봉인하면 옆에서 누군가가 써줘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그렇지?"
"내가 써줄게요. 필요한 순간에 오빠가 게이트 열고 나 부른 다음 써주고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스킬 사용 불가 지대 깔리면 게이트는 사라지는데…. 아. 아니지. 나는 스킬 쓸 수 있구나. 사라져도 다시 열면 되네."
"그쵸. 그러니 결국은 누가 옆에서 써줘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남이 깔아 놓은 걸 쓰는 게 아닌 이상은."
"음…. 괜찮겠어? 그거 숙련하는 거 굉장히 짜증 나. 일단 넌 집에서 숙련 못 해. 어디 나가서 해야 해."
"아. 그러네요. 내가 숙련하면 미나 언니나 세아, 안나가 숙련 못 하는구나."
"어. 그래서 나도 밖에서 숙련하고 오는 거고."
"괜찮아요. 그 정도야 뭐. 아니면 다들 잘 때 나만 숙련해도 되고."
"으음. 그래.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해."
빙긋 웃는 승희. 그러더니 허공에 손을 놀려 스킬을 찍는다.
고마운 녀석. 이뻐죽겠네.
"다음은…. 미나는 마그마 샷 찍었고. 세아는 순간이동 마스터 한거니까 당연히 게이트지?"
"어."
"그래. 잊지 말고 패시브 다 찍고. 아. 드디어 게이트가 하나 더 생겼네."
이제 슬슬 거처를 옮길 때가 됐네. 나 말고도 게이트가 하나 더 있으니 이젠 한국에 꼭 있을 필요가 없지.
어디든 공기 좋고 날씨 좋은 곳에 짱박혀서 살 수 있겠어.
"안나는 카타스트로피 찍고 또 스킬 찍을 수 있지? 뭐할래?"
"수납이요."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는 안나. 그래. 수납은 필수지.
"그래. 와. 그럼 안나 지금 티어 21인가?"
"네."
승희가 티어18, 미나가19, 세아가17, 안나가21.
이야…. 안나가 진짜 무시무시하네. 거의 결전 병기 같은 수준이야.
나도 빨리 숙련해야겠다. 이대로 가다간 따라잡힐 것 같네. 분발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