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64화 (56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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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것

도쿄 게이트를 열었다. 신영이가 있는 모텔방.

게이트를 타고 넘어가자 신영이 나와 레나를 보고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신영을 본 레나 역시 이 여자는 뭔가 싶은 표정을 짓고 있고.

"오늘부터는 둘이 같이 지내."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동시에 바라보는 두 여자.

"절대 싸우지 말 것. 둘이 사이좋게 지낼 것. 그게 대원칙이야. 만약 그걸 지키지 않는다면 둘 다 다시는 나를 못 볼 줄 알아."

"헉! 안돼! 안돼! 나 잘할게요! 이 여자랑 안 싸우고 잘 지낼게!"

"하아…."

기본적으로 한 사람에게 매혹이 걸린 여자들은 서로를 좋아할 수 없다. 매혹자에 대한 한계치에 가까운 애정 때문에.

매혹에 걸린 여자들은 서로는 방해꾼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라이벌이자 장애물일 뿐.

지금까지 복수의 여자를 매혹했을 때 서로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가장 상태 좋은 게 서로를 없는 취급 하는 거였지.

과연…. 이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 모르겠네.

"내일 자정에 올 테니 그리 알고 있어. 레나 너는 신영이와 함께 여기 도쿄에 남아있는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매혹에 관한 노하우 같은 것들도 잘 알려줘. 쟤는 스킬이 몇 개 없으니까.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로 자정 전에는 무조건 여기 있어야 해. 알겠어?"

"네에…. 그런데요."

"뭐? 질문 있어?"

"네에. 혹시…. 저 안아주진 않으실 거에요?"

"지금은 아냐. 하는 거 봐서."

"히잉."

"난 간다. 내일 보자고."

"아앗! 주인님! 가지 마세요! 아앗!"

한심하다는 듯 레나를 바라보는 신영과 나를 애타게 부르는 레나를 뒤로하고 집으로 순간 이동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안가네.

일단 뭐, 매혹만 풀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처분할 수는 있으니까. 일단은…. 해보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오랜만에 승희가 내 품에 안겨있다.

익숙한 온기. 익숙한 살 냄새.

승희와 바다를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푹 빠져 살았던 것들.

신기한 일이다.

주변에 많은 여자가 생기긴 했지만, 결국은 승희만큼 편안한 여자가 없다.

내 궁상맞은 시절을 전부 봐왔던 여자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단지 그 이유뿐만은 아냐.

승희에겐 다른 특별한 게 있다. 분명히 나이는 가장 어린이지만, 의지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

곤히 잠들어 있는 승희를 보니 아랫도리에 은근히 힘이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안 했지. 어디 오랜만에….

그렇게 옷을 벗기려는데 어느새 승희가 조용히 말한다.

"그냥 안고 있고 싶은데요."

"응?"

"그냥 꼭 안아달라고요."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승희. 나는 약간 뻘쭘한 기분에 다시 옆에 누워 그녀를 안았다.

그러자 승희가 품 안으로 깊게 파고든다. 그러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린다.

"야한 것도 좋긴 한데…. 지금은 이게 더 좋아요. 이러고 있게 해줘요."

"그래? 알겠어."

그러고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바깥에서 다른 여자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승희는 그제야 부스스 일어난다.

"안 했다고 삐진 거 아니죠?"

"그럴 리가. 나는 안 해준다고 삐지느니 억지로 하는 사람인데."

"우와…. 나빴다. 진짜 악당 같네."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승희. 나도 따라 나갔고 우리의 아침은 평화롭게 시작된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잠시 쉬다가 여유롭게 스킬 숙련을 하는 여자들을 보고 말했다.

"잠시 중국 다녀오자."

내 말에 다들 갑자기? 라는 표정.

"코인은 계속 충당해야지. 마냥 놀 수는 없잖아."

이해했다는 듯 다들 별말 없이 나갈 준비를 한다.

그렇게 베이징 주변으로 가서 가볍게 짱개들을 청소했다. 정말, 밥 먹고 잠시 산책하러 나갔다 오는 기분으로 하는 학살.

대신 이번에는 까마귀 말고 쥐를 테이밍해서 코인을 줍게 했다. 까마귀는 너무 요격당할 확률이 높아.

대신 쥐라면 힘들겠지.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차라리 안전하게 줍는 게 낫지.

그렇게 적당히 학살을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도 한 2만 명 죽었으려나?

짱개 녀석들도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또 우리가 나타나서 짜증 나겠지?

어설픈 놈들로 대응하는 건 인력 낭비밖에 안 되고, 그렇다니 더 대단한 놈들을 대기 시켜놓자니 그것도 역시 낭비니까.

게릴라와 기습은 장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 시간도 그 범주에 속하는 거다.

방어하는 쪽을 몇 배나 귀찮게 하는 공격.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후려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오빠. 근데 오늘은 일본 안 가요?"

승희가 물어봤고 나는 느긋하게 대답한다.

"갈 거야. 이제 가야지."

"그 뭐야. 무슨 강자? 절대 강자?"

"어."

"그 사람들은 강해요? 우리도 필요해요?"

"음…. 절대 강자가 7명 있거든?"

내 이야기에 다들 슬금슬금 모여든다. 하긴 이런 이야기는 궁금하겠지.

"그중에 넷은 해결했어. 앞으로 남은 건 셋. 패왕이라는 놈이랑, 뇌제, 무명. 이렇게 셋만 남았네."

"엥? 벌써요?"

"생각보다 시시하더라고. 아무래도 구석탱이에 처박혀있는 섬나라 놈들이니 한계가 있겠지."

"그래도….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애초에 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해도 난 여기 있소! 하고 드러내는 순간 이미 끝이야. 이렇게 한번 스쳐도 죽는 세상에서 명성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괜히 이렇게 숨어 사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발견만 하면 오빠가 바로 이길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자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 다 빼고 냉정하게 판단해도 질 거 같은 생각은 안 들어. 나는 아니다 싶으면 바로 튀니까."

"아. 하긴. 오빠 성격이 그렇긴 하죠."

"승리나 명성, 정정당당, 명예로운 대결….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죽으면 끝이지."

"오빠가 같은 편이라 다행이지…. 적이었으면 진짜 몸서리치게 싫었을 거야."

"아닐걸? 내가 적인지도 모를걸?"

"아…. 그러네."

"그게 핵심이야. 나 같은 놈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 순간 사망 확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거거든."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여자들이 각자 스킬 숙련을 하러 가는 걸 확인하고 홋카이도로 순간 이동했다.

탐지를 돌려보니 느껴지는 기척 두 개. 근데 하루카의 집이 아니네?

뭐 하는지 투시로 살펴보니 하루카와 아키는 집 하나를 치우고 있다.

근데…. 아키 쟤도 괴력이 있었나 보네. 여자 둘이 무거운 짐들을 번쩍번쩍 들어서 옮기는 모습이 좀 웃긴다.

"뭐해?"

집을 치우고 있는 두 여자에게 다가가 말하자 하루카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키 쟤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나? 안 놀라네? 뭐…. 내가 대놓고 오긴 했지만.

"아! 천사님!"

"하루카상. 저 사람은 천사님 아니라니까요."

"아키상!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제게는 천사님이에요!"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친해졌나 보네. 이야기도 많이 한 거 같고.

아마 저 둘의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아키는 하루카에게 나의 본질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한 거 같다.

그리고 하루카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겠지.

사이비가 괜히 무서운 게 아니야. 한번 빠지면 답이 없다고.

"근데 너희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아키상이 조금 더 깨끗한 집으로 옮기자고 해서요. 지금 있는 집은 축사랑 너무 가까워서 비위생적이라고 해서…."

"그래? 그건 맞긴 해. 잘 생각했네. 근데 아키 너 수납 없냐?"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라니까?"

"아. 미안. 아.키.짱."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키. 놀리는 맛이 있어.

"수납 없냐고."

"수납 있는데?"

"근데 왜 그러고 있냐?"

"뭐?"

수납을 써서 물건 옮기는 걸 보여주자 상당히 놀란 눈치다.

희한하네. 다들 왜 수납을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을 안 하지? 다들 상상력이 빈약한가 봐.

아니. 내가 망상력이 높은 것일 수도 있지.

내가 한 걸 보고 바로 수납을 열어 따라 하는 아키. 몇 번 해보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됐지?"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하루카상 미안한데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밖에 나가서 커다란 물건들을 수납에 넣어보는 여자.

그걸 따라가서 지켜본다. 신기하긴 한가 보네. 그리고 왠지 신난 거 같기도 하고.

근데 한참을 보다 보니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기본 수납 크기…. 이상으로 키우질 않네?

"아키짱."

"으…."

"야. 부르기만 했는데 그렇게 싫어하면 내가 조금 마음이 아프지 않겠냐?"

"싫으니 싫어하는 거지. 제발 다카하시 상이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싫은데? 그리고 너 왜 존댓말 안 하냐. 하루카랑은 서로 존대하면서."

"하루카상이랑 그쪽이랑은 다르니까."

완고하네. 근데 오히려 즐겁다. 뭐랄까. 세아 초창기 때 모습이랄까?

물론 지금도 세아는 툴툴거리긴 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이런 여자가 나중에 나를 향해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면…. 참 기분 좋을 텐데 말이지.

어휴. 망상이 심하긴 하네. 매혹 안 쓰고는 쉽지 않겠지. 에휴.

"아무튼, 너 왜 수납을 더 크게 안 써?"

"무슨 소리지?"

내가 수납을 열자 아키는 깜짝 놀란다.

패시브 덕분에 가로세로 30미터 정도 되는 수납.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크기.

이 안에는 대왕고래도 들어가는 사이즈잖아? 아키가 놀랄만하다.

"이…. 이게 뭐야? 이것도…. 수납이야?"

"보시다시피."

"어떻게 이렇게…?"

"너 티어 몇이냐?"

"뭐? 티어? 티어가 뭐야?"

"아. 마스터 한 스킬 몇 개냐고."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내 생각엔 20개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이 여자의 탐지 거리 능력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된다. 정확하게 거리는 측정 못 했지만, 얼추 그 정도는 될 거야.

"뭐야…. 어떻게 알았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하긴 뭘 해. 사실 얼마든지 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 짓도 안 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기억 읽기라는 스킬이 있어. 니가 잠들었을 때 너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고. 근데 안 했어. 니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쓰는 아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추측한 건 니가 날 탐지하고 달려든 거리를 얼추 계산해서 말한 거야. 근데 궁금한 건, 왜 한계 돌파를 안 찍었느냐 이거지. 그걸 찍었으면 니 수납이 그정도로 작을 리가 없는데. 내 수납을 보고 놀랄 이유도 없고."

"한계 돌파…. 그게 그 효과였나."

"뭐야? 몰랐어?"

"설명도 하나 없는 스킬을 보고 대체 어떻게 알겠어?"

"그건 그렇긴 하지. 이 빌어먹을 놈들의 가장 큰 문제기도 하고. 물론 그래서 이득 보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찍어보면 알 거 아냐? 패시브는 어지간하면 좋은 거 몰라?"

"코인이 없었어."

"엥?"

"코인이 없었다고. 스킬 반경 증가 패시브 찍는 것도 겨우 찍고 있는데…."

"아…. 설마 너 코인 벌러 밖으로 사냥 나가고 그러진 않은 거야?"

"나는…. 나를 위해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하진 않아."

저 말 하나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씹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량한 옛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아직 제대로 자신의 정점을 찍어보지 못한 여자.

그야말로 고지식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게 정상적인 사고일지도.

"그럼 스킬 최대 수치 증가도 안 찍었겠네? 아니, 못 찍은 거겠지?"

"그건…. 별로 찍을 필요를 못 느껴서."

"아. 하긴 그럴 수는 있겠네. 근데 너 게이트도 없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 아키. 아. 답답하네. 그냥 스킬 뭐 있는지만 기억 읽기로 알아낼 걸 그랬나?

아냐. 참자. 자기 입으로 줄줄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여간…. 인내심은 자신 있는데 이런 건 왜 못 참지? 나도 진짜 이상해.

"어쨌든…. 너는 반쪽짜리 검성이었네."

내 말에 살짝 발끈하는 거 같았지만 바로 참는듯한 모습.

하긴, 유틸성이 부족해서 그렇지 무력 자체로는 크게 상관없으니까.

비행속도가 굼벵이 같을 뿐이지만 그거야 블링크로 해결하는 거 같고.

"근데 뭐, 여기서 하루카를 지키는 데는 크게 문제없겠지. 암튼 수납은 그렇게 써라. 힘들게 괴력으로 일일이 옮기고 있지 말고."

그렇게 하루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아키가 입을 연다.

"당신은…."

"음?"

"나를 살려둔 게 변덕 때문이라고 했어. 그리고 하루카 상을 지켜주라고 나를 살렸다고 했지. 근데 그건 말이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를 살려두지? 그렇게 자신의 실력에 자신 있는 거야?"

"왜? 니가 나를 죽이고 싶은 이유가 없잖아?"

"내가 코인을 노리고 공격할 수도 있는 거잖아?“

”방금 니가 니 입으로 그런 거 안 한다며.“

”아….“

웃기는 여자야.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네.

"뭐, 뭐든 상관없어. 공격하려면 해봐. 그럼 나는 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많아질 뿐이니까."

"무슨…."

나는 아키에게 다가갔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만, 이 여자의 앞에 이렇게 서는 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한 고스족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은 모습. 이쁘장한 여자.

"나는 니가 나에게 수줍어하면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걸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내 말을 듣자 벌레 보듯 나를 바라보는 아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큭큭 하고 웃었다.

"절대 그러는 일은 없을 거야. 꿈도 꾸지 마."

"그래.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언젠간 그렇게 된다는 뜻이네.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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