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57화 (55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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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일단 블링크를 연속으로 써서 거리를 확 벌렸다.

그리고 축소를 쓴 다음 다시 아까 검성 그 여자가 있던 자리로 조심스럽게 향한다.

진작 축소로 다가갈걸. 근데 그래도 좋은 걸 배웠다. 자칫 잘못하면 뒤질 뻔하긴 했지만.

검성이라는 이름과 절대 강자라는 이름을 그냥 얻은 건 아닌가 보다.

가면 그 새끼도 대단하네. 저 여자를 따돌리고 친구를 강간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다시 가서 기억을 좀 제대로 읽어봐야 하나? 너무 대충 기억을 읽었나?

일단은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부터 확인해본다.

아까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있는 검성. 천리안과 투시로 살펴보니 한 비석 앞에 앉아 있다.

비석치고는 상당히 투박한 모습. 그저 네모나게 잘린 회색 돌.

그리고 거기 쓰여 있는 한문은 번역이 안 된다.

비석…. 무덤인가? 친구? 마을 사람들? 암튼 그런 비석인가 보네. 번역이 안 되는 건 이름이라 그런가?

어쨌든 여자는 상당히 초췌해 보인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긴 하지만, 드레스는 이젠 드레스라고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흐트러져있는 모습.

게다가 얼굴이 가관이다. 화장한 얼굴은 눈물을 하도 흘려서 마스카라가 번져 볼에 줄줄 흘러있다.

후회하고 있는 건가? 슬퍼하면서 자책하고 있는 모습인데.

친구와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어쨌든 이 나노화가 적용된 지금의 내 상태는 감지 못하나 보다.

하긴, 이 정도 거리면 거의 작은 점처럼 느껴지겠지. 이걸 감지하면 인간의 범주가 아닐 거야.

이대로 가서 무효화를 쓰고 수면을 걸까? 역시 묶어놓고 이야기 하는 게 빠른데.

하지만 시작을 그렇게 삐딱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일단은 대화를 해야 하잖아.

매혹? 매혹을 걸면 적어도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근데…. 매혹을 건 상태에서 뭔가 제대로 된 대화가 안될 텐데.

아. 오늘 배운 개씹사기 스킬을 써보자.

스킬 사용 불가 지대. 이걸 쓰면 저 여자도 저렇게 날뛰진 못하겠지.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역시 폴터가이스트는 든든하네.

여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블링크. 그리고 바로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썼다.

내 축소도 풀리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눈치챘지만 움찔하고 마는 검성.

"검성 씨?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이야기 좀 하지?"

내 말을 들으며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검성.

그런 그녀는 나에게는 들리지 않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린다.

스킬을 확인해보는 건가? 근데 될 리가 없지. 녀석도 그걸 알아챈 거 같지만 표정 변화는 없다.

신기하네.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아. 절멸. 그렇지. 절멸의 선행 스킬에는 성역이 있지.

그럼 저 여자도 스킬 사용 불가 지대에 익숙하겠네.

"카멘사마. 그놈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하지만 갑자기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검성. 그리고 그녀의 손에 빛나는 검이 들린다.

얼래? 저거 빛의 검 아냐? 근데 지금은 스킬을 못 쓸 텐데?

상당히 빠른 달리기. 빛나는 검을 들고 내 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다.

하지만 별걱정 안 한다. 내게는 폴터가이스트가 있잖아?

빛의 검이 어떻게 스킬 사용 불가 지대에서 써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건 천천히 알아보고 나를 공격하려는 저 여자를 제압하는 게 우선이야.

보이지 않는 염력이 검성을 잡기 위해 뻗어 나간다. 먼저 빛의 검을 들고 있는 손목부터.

하지만 검성은 자신의 팔을 뭔가가 잡는 걸 느끼자마자 바로 다른 손에 빛의 검을 하나 더 만들어내더니 빠르게 염력을 끊어버린다.

허. 씨발. 저게 된다고?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염력을 보냈다.

팔, 다리, 목, 몸통, 여러 개의 촉수가 뻗어서 검성을 붙잡지만 번번이 양손의 빛의 검에 잘려나가는 모습.

솔직히 말해서…. 여자의 움직임은 상당히 아름다울 정도였다.

마치 춤을 추듯 양손의 검을 휘두르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보이지 않는 염력을 잘라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염력이 보이나?

그럴 리가 없다. 염력은 천리안으로 볼 수 없어. 저건…. 순전히 감각으로만 막아내는 거야.

"너랑 싸우려고 온 게 아냐. 대화 좀 하자고."

하지만 검성은 나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염력을 모두 막아내면서도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

음…. 말이 안 통하네. 무슨 상처 입은 짐승 같잖아.

하지만 저 여자의 기세가 아무리 흉흉해도 이 싸움은 끝이 정해져 있다.

폴터가이스트를 운용하는 데는 그 어떠한 소비도 없다. 하지만 저 여자는 다르지.

나를 경계하면서도 끊임없이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

저 여자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이 짓을 영원히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미 나를 만나기 전에도 상당히 초췌한 상황이었다.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

그리고 염력은 두꺼운 촉수만 있는 게 아니다.

촉수로 검성을 계속 붙잡으려 하면서 얇은 염력 실을 뽑아 몇 가닥을 날렸다.

염력 실이 아무리 가늘어도 한번 잡히기 시작한 이상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

곧 한쪽 팔이 잡히고 다른 팔과 양쪽 발, 몸, 목, 허리…. 온몸을 염력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후. 겨우 잡았네."

"한국인…. 이 왜 나를 찾지? 그리고 카멘 그놈은 어떻게 알고?"

"붙잡히니까 대화냐. 그러니까 진작에 처음부터 대화했으면 얼마나 좋아."

"큭…."

근데 내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뭐 티가 나는 게 있나?

"암튼, 나는 너랑 대화하고 싶어. 그러니까 풀어주면 얌전히 대화할래?"

"닥쳐…."

"내가 가면 그 새끼를 잡아놨거든? 그래서 너한테 주려고 온건에…. 그래도 대화하기 싫냐?"

내 말에 흠칫하는 여자. 하지만 다시 표정이 사나워진다.

"개소리하지 마…. 그딴 말을…. 누가 믿을 줄 알고?"

생각해보니 내가 쟤라도 안 믿겠다.

일단 가면 그 새끼 때문에 친구와 마을 사람을 다 잃은 여자다.

근데 갑자기 나타난 놈이 가면에 대해 이야기 하면 경계할 만하지.

그래. 내가 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긴 하네. 내가 경솔했어.

"하아. 그럼 조금 난폭한 짓을 할 건데.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짓이니까 조금만 참아. 적어도 니가 손해 보는 짓은 없을 거야. 알겠지?"

"죽어…. 읍."

염력 촉수가 검성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혀를 붙잡고 입안 가득 채운다.

입을 봉하고 온몸을 붙잡았으니 쓸데없는 짓은 못하겠지.

바로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해제한 다음 바로 매혹을 걸었다.

입이 벌려진 채로 침을 흘리며 웃는 검성.

아…. 좀 그러네. 안 그래도 번진 화장에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좀…. 기괴할 정도야.

어쨌든 매혹을 걸었으니 잡은 걸 풀어도 괜찮겠지? 근데 약간 불안하다. 저 정도 분노면…. 매혹을 무시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다른 여자들에게 그렇게 매혹을 걸어댔지만, 저 여자는 마음이 안 놓인다.

날파리 년 같은 경우도 있었잖아. 그래도…. 괜찮겠지?

일단 모든 버프는 다 걸고 잔뜩 경계하면서 염력을 풀어줬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됐지만 다소곳하게 서 있는 검성.

"그거 빛의 검. 그것부터 치워라."

"네."

바로 양손에 있는 빛의 검이 사라진다. 매혹은 제대로 걸렸는데…. 자꾸 찜찜하네.

"하아. 그리고…. 너 그 드레스 말고 다른 평범한 옷은 없냐? 가서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얼굴의 화장도 지우고. 아니다. 아예 샤워라도 하고 와라.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한 건물로 향하는 검성.

집 안으로 들어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훌훌 벗고 바로 욕실로 들어간다.

음…. 몸매는 좋네. 가슴은 살짝 아쉽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어디 가서도 꿀리는 정도는 아냐. 내 주변 여자들 가슴이 큰 편인 거지.

그렇게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묘하다.

그냥 들어가서 한번 하고 싶지만…. 참는다. 아니다. 기억 삭제도 있는데 한번 해?

됐다. 그정도로 굶주리진 않았어. 일단은 놔두자. 하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검성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한참 말린다.

엉덩이까지 오는 하얀 머리. 탈색이겠지? 가면 놈의 기억에서 봤을 때는 가발인 줄 알았는데.

진짜 머리였네. 근데 왜 정수리에 까만 머리가 없지?

주기적으로 탈색하나? 이런 세상이 됐는데도 탈색을 유지한 거야?

컨셉에 진심이네. 하긴, 검은 드레스를 고집하는 것부터가 일반인의 범주는 아니지.

그렇게 머리를 다 말린 검성은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다른 옷장으로 가더니 옷을 꺼내 입는다.

무난한 면티에 청바지. 근데 조금 커 보인다? 아. 설마 가지고 있는 옷이 드레스밖에 없나? 그래서 그 죽은 친구의 옷을 입은 건가?

사이즈를 보니 대충 그런 거 같다. 그 죽은 친구가 저 여자보다는 키가 컸지.

그렇게 옷을 다 입은 여자는 신발을 신으려다가 또 멈칫한다.

어휴. 가지가지 하네. 신발도 구두 밖에 없는 거야?

잠깐 고민하던 여자는 크록스 같은 걸 신고 나온다. 진짜…. 힘들다. 힘들어.

그렇게 밖으로 나와 내 앞까지 온 검성.

근데 이렇게 해놓고 보니 제법 이쁘장하다. 아니…. 대체 왜 그런 화장이랑 드레스를 하고 다니는 거야? 이렇게 이쁜 애가.

어쨌든 훨씬 보기 좋으니 됐어. 그럼 이제….

"게이트."

게이트를 열었다. 목적지는 홋카이도.

"타."

"네."

매혹이 걸려서 그런지 망설임 없이 게이트에 타는 검성. 나도 따라 들어갔고, 바로 하루카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하루카?"

"어머! 천사님 오셨어요! 어…. 뒤에 계신 분은…."

"많이 힘든 사람이야. 식사 좀 차려주겠니?"

"식사요!? 물론이죠!"

검성이 누군지 궁금할 법하지만 내 말에 바로 식사 준비를 하는 하루카.

"앉아."

내가 조용히 말하자 가면과 내가 앉았던 자리에 이번엔 검성이 앉는다.

"지금 바로 차릴게. 카레밖에 없는데…. 괜찮으시죠?"

"물론이지. 하루카가 차려주는 건 뭐든 상관없단다."

"네!"

금세 식탁을 차려온 하루카. 뚝딱 차려 나온 것 치고는 상당히 맛있어 보이는 카레.

"먹어."

검성에게 조용히 말하고 나도 숟가락을 든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자 느껴지는 진한 풍미.

아. 역시 하루카는 소중해. 절대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솜씨야.

"너는 안 먹니?"

"저는 조금 전에 먹었어요."

"그렇구나."

그렇게 정신없이 그릇을 비우며 검성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카레를 먹고 있다.

당연하지. 매혹에 걸려있다고 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다.

게다가 꼴을 보아하니 뭔가를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있던 거 같은데 이런 게 입에 들어가면 저렇게 눈이 돌아갈 만하지.

식사는 금방 끝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나 고맙구나. 다음번에는 꼭 생선을 구해오도록 할게."

"정말요? 와. 알겠어요! 근데…. 벌써 가시나요?"

"그래. 저 사람과 할 일이 있어서. 미안하구나. 같이 오래 있어 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잘 있으니까요."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는단다."

"네. 감사해요. 천사님."

그런 하루카를 두고 아까 열어둔 게이트로 다시 검성을 데리고 간다.

"뭐해. 타."

하루카에게 하는 말과는 천지 차이네. 뭐, 어차피 의도하고 하는 거지만.

그렇게 다시 돌아온 검성의 마을. 게이트를 닫고 다른 게이트를 연다.

이번엔 수원. 살짝 넘어가 염력으로 가면 녀석을 들고 다시 넘어온다. 그리고 검성 녀석의 앞에 가면을 던져놨다.

매혹이 걸려있음에도 눈이 커지는 여자. 하긴, 매혹에 걸렸다고 타인에 대한 복수심이나 원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매혹 시전자에 대한 감정이 변할 뿐 다른 건 그대로니까.

"자. 나는 너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어. 니가 하도 저돌적이라 매혹을 걸었지만, 이제 그 매혹을 풀어줄 거야. 만약 매혹을 풀고 나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면, 나도 더는 참지 않아.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해. 순식간에 나를 죽일 자신이 없다면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나는….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아직도 모른다.

이게 내 최선이다. 내 딴에는 정말 죽어도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다.

이 정도 실력이 되는 여자를 프리로 풀어주는 일 따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지만, 그래도 시도해본다.

이 여자가 그나마 사리 분별은 하길 바라면서.

물론 이것도 다시 제압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짓이지만.

내 의지가 있으면 매혹을 풀 수 있다고 했지? 굳이 무효화 같은 걸 안 써도?

그렇게 매혹을 풀어준다고 생각하자 검성의 머리에 떠 있던 매혹 시간이 사라졌다.

그리고 혼란스러워지는 눈빛.

"당신…. 대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야."

오. 호칭이 바뀌었네. 말투도 상냥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대감은 없다.

게다가 바로 공격하지도 않고.

음…. 나쁘지 않은 시작인가? 그래도 다행이네 생각한 대로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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