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54화 (55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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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새벽.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잠을 못 이뤄서 충혈된 눈으로 몸부림치던 시간이었다.

세상이 망한 후에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충혈된 눈으로 돌아다니던 시간이었고.

지금도 세상이 망한 건 그대로지만, 느낌이 조금 다르다.

여유로워진 시간. 스킬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여유.

애초에 뭔가가 잔뜩 결핍됐던 나를 채워준 건 스킬이 아니었을까?

또 또 잡생각을 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다.

고급 92퍼센트. 얼마 뒤면 축소 마스터. 잡생각 하지 말고 숙련이나 하자.

하지만 또 잡생각이 든다. 아. 안돼. 분위기를 환기시켜야겠어.

가서 하루카 자는 모습이나 보고 오자. 그리고 마스터 찍자고.

바로 홋카이도로 순간이동하고 탐지를 돌렸다.

그리고 머리가 쭈뼛 섰다. 기척이 둘? 설마?

바로 확인해보니…. 있다. 가면. 씨발 새끼. 드디어 찾았다!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게 느껴진다. 하. 씨발. 얼마나 기다린 거야. 거의 한 달을 기다렸는데.

뭘 하면서 처 놀다가 이제야 낯짝을 들이민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녀석을 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이 늦은 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 가면.

그리고 그 밥을 차려준 하루카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가면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 뭔가를 물어보는 듯한 녀석. 하루카는 허물없이 녀석에게 대답한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아. 맞다. 페이즈 아웃. 이제 소리도 들리지.

블링크를 쓰고 바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혹시나 몰라서 벽에 몸을 반쯤 담그고 머리만 집 안으로 들이민다.

"그래서 천사님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저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분이에요. 자주 뵀으면 좋겠는데. 자주 안 오시는 게 흠이지만."

"이상하군. 그 천사님이란 사람…. 믿을 만한 녀석 맞아?"

"그런 건 몰라요. 천사님은 천사님이에요. 그러시는 가면 님은 믿을만한 분인가요?"

하루카 저녀석. 저런 이야기를 잘도 하는구나. 게다가 천연덕스럽게 한 마지막 말은 가면 놈의 뭔가를 건드렸나 보다.

음식을 집었던 젓가락을 잠시 멈출 정도로 잠시 생각하는 녀석.

놀라운 건, 녀석이 가면을 벗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얼굴에 가득한 화상.

아. 화상 때문에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거였네.

나는 정체를 숨기려고 쓰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필요할 때만 가면을 쓰고 평상시엔 벗고 다니면서 일반인 척하는 것.

나쁘지 않잖아? 게다가 특촬물 주인공 같기도 하고.

근데 아니었네. 그냥 가리기 위한 용도였어.

그리고 녀석은…. 젓가락질이 몹시 서툴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알아챘다.

헐렁한 옷 사이로 드러난 오른팔. 팔꿈치 아래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감겨있는 붕대와 핏자국.

붕대가 감겨있다는 건 잘린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다. 아니 굳이 그렇게 추측할 필요도 없지.

촌장의 기억에서 봤던 가면 녀석은 두 팔이 온전했었으니까.

아마…. 저 녀석이 평소보다 이곳에 늦게 온 이유가 저 잘린 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내 머리로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드는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루카 저 녀석. 가면이 오면 잘 대해주라고 했긴 했지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냐?

이 밤중에 고기까지 구워줬네. 저 정도면 정말 극진한 대접이지.

게다가 저 가면 녀석도 웃긴다. 하루카의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앉아서 밥을 먹지?

이미 하루카가 자신의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파악한 건가?

매혹이 걸려있지는 않은 거 같고…. 둘 사이의 분위기는 몹시 평온하다.

누가 보면 늦게 들어온 오빠에게 밥상을 차려준 여동생인 줄 알겠네.

어쨌든 녀석을 발견했으니 이제 사로잡아야지.

문제는 어떻게 잡냐는 건데.

일본에서 절대 강자 소리를 듣는 놈이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위험할 거야.

그리고 불리하면 그대로 도망가겠지.

그러니 신중해야 해. 일단은 녀석이 최대한 방심한 상태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봤다.

밥을 거의 다 먹은 가면 녀석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

금방 다시 화들짝 잠에서 깨어 주변을 살피고 하루카를 노려보지만 하루카는 그저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피곤하신가요? 하긴, 얼굴이 별로 좋아 보이시진 않네요. 몸도 불편하신 거 같고. 자리를 깔아드릴게요. 거기에서 주무세요."

"아니. 아니야. 나는…."

가면이 아니라고 손을 흔들지만 하루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어있는 옆방으로 가서 이부자리를 깔기 시작한다. 그런 하루카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면.

"자리가 다 됐어요. 바로 주무실 수 있게 해놨어요. 만약 씻고 싶으시다면 그 옆에 욕실에서 씻으시면 돼요. 다행히 온수는 나오니까 씻는 데 문제는 없으실 거에요."

"대체…. 너는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천사님이 그러셨거든요. 가면 님은 중요하신 분이라고. 그래서 만약 찾아오면 잘 대접해드리라고 했어요."

"대체 그 천사님이 누구길래…."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그분은 좋은 분이에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가면. 결국, 녀석은 힘겹게 자리를 일어나더니 절뚝거리며 방으로 향한다.

"편히 주무세요."

하루카의 해맑은 인사. 가면 녀석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 인사를 받는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잠시 바깥쪽을 바라보던 녀석.

하루카를 보는 건가? 녀석도 투시가 있나 본데?

하지만 하루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면이 먹었던 음식들을 치울 뿐이다.

그렇게 정리를 다 하고 불을 끄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하루카.

바로 자신의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눈을 감는다.

거기까지 바라본 가면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피가 잔뜩 묻고 흙먼지와 풀들이 묻어 잔뜩 더러워진 코트를 한 손으로 힘겹게 벗고는 그대로 이부자리 옆에 앉았다.

계속해서 하루카 쪽을 바라보는 녀석.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하루카는 진짜 잠들었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 저건 자는 척이 아니야. 진짜 자는 거야.

하지만 가면 녀석은 아직 믿기지 않나 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하루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방문 앞까지 살짝 떠서 조용히 날아간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지켜보더니 천천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녀석.

뭐야. 꾸벅꾸벅 졸더니 덮치려는 건가? 하긴, 하루카가 좀 이쁘긴 하지.

이런 곳에 있기 힘든 외모긴 해.

그렇게 자는 하루카 옆에 선 녀석은 짧게 중얼거렸다.

"기절."

그리고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그러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녀석.

뭐야? 왜 쓰러져?

페이즈 아웃 상태이기에 벽을 건너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혹시 모르니 여전히 벽에 몸을 반쯤 넣고 머리만 내민 상태로 녀석을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기 시작하는 가면. 하. 자는 거야? 진짜로?

녀석이 나의 존재를 알아채고 연기를 하고 있을 확률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진짜 중증의 강박증 환자거나 피해망상 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강박증에 피해망상이 맞지.

그렇게 녀석을 더 지켜본다. 30분 정도.

녀석은 진짜 자고 있다. 마치 며칠은 못 잤던 사람처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녀석의 정확히 등 쪽에 서서 심호흡을 한번 했다.

페이즈 아웃 해제. 무효화. 수면.

녀석의 머리에 잠들었다는 시간이 떴다.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버린 제압.

하. 진짜 왜 잡았는데도 성취감이 없냐?

근데 나는 그 이유를 알 거 같다. 이건 하루카가 다 했으니까.

한 점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순수함. 그리고 천진난만함.

의심 덩어리에 사람을 믿지 않는 내가 봤을 때도 혹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이 여자애가 나를 속일 리 없어. 이 여자애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저 의심 많고 조심성 많은 가면 놈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다.

비록 안전을 위해 기절을 걸긴 했지만, 그건 뭐 이해한다.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여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저 정도 안전장치는 해야지. 나라도 그렇겠네. 물론…. 나라면 이런 곳에서 잠드는 멍청한 짓은 안 할 테지만.

어쨌든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가면 놈을 잡았지만…. 그래도 할 건 한다.

수납에서 테이프를 꺼내고 녀석의 입부터 막는다.

그리고 팔…. 을 묶어야 하는데 한쪽 팔이 없네?

이런 놈은 어떻게 묶어야 하나. 조금 당황스럽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몸통에 묶자니 나중에 빠질 거 같고. 좀 꺾을까? 아잇…. 별 거지 같은 거로 고민하네.

염력으로 녀석을 들어 올리고 그냥 꽁꽁 묶었다.

한쪽 팔이고 나발이고 그냥 아예 미동도 못 할 정도로 꽁꽁.

입도 한 번 더 막고…. 암튼 뭐 어쨌든 철저하게 묶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다. 이제 이놈은 됐어. 그리고….

하루카의 방으로 가서 무효화를 써줬다. 기절이 풀렸지만 자고 있어서 그런지 깨지는 않는다.

어휴. 기특한 자식. 이뻐 죽겠네.

뭔가 칭찬을 해주고 싶지만 자고 있으니 그냥 두자. 잠은 소중하니까. 편하게 자야지.

깨지 말라고 아예 수면까지 한 번 더 걸어줬다. 이러면 적어도 거의 다섯 시간은 안 깨겠지.

모든 준비가 됐으니 이제 가면 놈의 기억을 들여다볼 시간.

이미 내 머릿속에서 짱개놈들은 저기 구석 한쪽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래. 절대 강자 중 한 놈을 잡았는데 지금 그게 문제냐.

그렇게 기억 읽기를 시작한다. 아. 두근두근하네. 무슨 기억을 엿볼 수 있을까나.

기억 읽기를 마친 건 해가 뜨고 난 뒤 한참이 지난 후다.

중간에 하루카에게 한 번 더 수면을 걸 정도.

웬만해선 쟤한테 이 녀석이 이렇게 칭칭 감겨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다.

설명이 복잡해지니까. 차라리 재우는 게 낫지.

어쨌든 읽을만한 기억은 다 읽었다. 어두웠던 일본 쪽 맵의 안개 일부가 확 걷힌 느낌.

자…. 이제 이놈을 어쩐다. 죽여도 되긴 하지만…. 더 좋은 처리 방법이 생각났으니 일단 녀석은 살려둔다.

수원 게이트를 열고 녀석에게 수면을 한 번 더 건 뒤 던져놨다.

그리고 게이트를 닫은 뒤 하루카에게 향했다.

바로 무효화.

자연스럽게 잠자는 시간이 초과해서 그런지 하루카는 무효화가 걸리자마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환한 표정으로 외친다.

"천사님! 오셨어요!? 천사님이 말씀하신 가면 님이 왔어요! 그래서 저쪽 방에…."

"알고 있단다. 하루카. 네가 그를 친절하게 대해준 덕분에 나도 그를 만날 수 있었어. 고맙다."

"역시! 천사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군요! 아차. 그럼 아침밥 차려야 하는데…. 히익! 벌써 시간이 이렇게!"

"아니야. 하루카. 괜찮아. 그는 내게 중요한 임무를 받고 급하게 떠났어. 그러니 차리지 않아도 된단다. 아 참. 그가 전하더구나. 어젯밤에 먹은 그 밥은 정말 맛있었다고. 살면서 그렇게 맛있었던 밥은 처음이라고 하더구나."

"어머…. 정말요? 아이참…. 별로 차려드린 것도 없었는데…. 아! 그럼…. 혹시 천사님도 식사를 하시나요? 만약 하신다면 제가…. 식사를 차려드려도 될까요?"

식사를 하냐니…. 나를 정말 인간 이상으로 보는 거야? 놀랍네. 정말.

사실 밥 생각은 별생각 없었지만, 저런 모습의 하루카를 보니 괜히 궁금해졌다.

한번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래 주겠니? 그럼…. 기대해도 될까?"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요!"

어제 가면이 앉았던 자리. 그 자리에 나를 앉힌 하루카는 신나는 표정으로 식사를 준비한다.

새로 밥을 하고 고기를 굽고…. 고기라니. 아침부터. 뭐, 나야 좋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뚝딱 식사를 차린 하루카.

시간상으로는 30분이 조금 넘은 거 같은데 차리는 모습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한 5분밖에 안 지난 거 같다.

따끈한 밥 그리고 장국, 고기 요리하나. 이건…. 시금치인가? 색은 시금치인데.

그리고 이건 그거네. 매실 장아찌. 우메보시라고 하던가?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들.

"그럼 잘 먹을게."

부담스러운 하루카의 눈빛을 감당하며 젓가락을 들었지만, 몇 입 먹고는 그 눈빛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정말…. 게걸스럽게 먹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아. 진짜 존나 맛있네. 왜 이렇게 맛있지?

순식간에 그릇들을 전부 싹 비우자 하루카는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진짜 맛있네. 하루카에게 날마다 밥 얻어먹으면 진짜 행복하겠는데?"

이크. 오죽 맛있었으면 컨셉질하던 말투도 안하고 그냥 말했네.

"정말요!? 감사해요! 천사님!"

근데 하루카는 크게 눈치 못 챈 거 같다.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

이야. 천연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쟤 앞에 있으니까 나는 완전 오물 덩어리 같은 느낌이네.

"잘 먹었단다. 이렇게 맛있는 건 정말 오랜만에 먹었어. 종종 찾아와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물론이죠!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아. 해산물만 구할 수 있었어도 조금 더 좋은 걸 해드릴 수 있을 텐데. 아쉬워요."

해산물이라고? 이거 이거…. 구해와야겠네. 대체 얘가 뭘 해줄지 궁금해서라도 구해와야겠어.

"고마웠단다. 그럼…. 나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구나."

"아…. 벌써 가시나요?"

"자주 들리마. 네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와야지."

"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천사님. 아 참. 그럼 가면 님은 식량을 가져가시지 않는 건가요?"

"음…. 그렇지. 그렇게 됐단다."

"아…. 그럼 저 고기들은 어떻게 하지."

"문제라도 있니?"

"네. 아직 훈제 안 한 고기랑 숙성된 고기들이 있어서요. 그럼 그건 다 훈제해야겠네요. 근데 저 혼자는 다 먹기 힘든 양인데."

"그럼 내가 가져가마."

"정말요? 천사님이? 알겠어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하루카의 고기까지 챙기고 나는 하루카를 떠났다.

이야. 이거 오늘 얻은 게 많네. 개이득이네. 개이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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