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50화 (5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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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

멀티 벙커.

지난번에 세아와 왔을 때는 찐하게 야한 짓을 했었는데.

오늘은 살짝 서먹서먹하다. 아니. 살짝이 아닌가?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조금 들 정도니 살짝 수준은 아니네. 어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쉽게 입이 안 떨어지네.

침대에 앉은 나와 의자에 앉은 세아. 둘 다 아무 말 없는 침묵.

"미안해."

한참 만에 내가 한 말. 결국은 사과밖에 없다.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지.

"뭐가."

"전부다."

"그러니까 뭐가."

"처음 봤을 때 솔직하게 말할걸. 괜히 내가 장난질을 쳤어. 니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거, 속였던 거, 그걸 이제야 말한 거…. 전부 미안해."

또다시 찾아온 침묵.

이런 침묵은 괴롭다. 조용한 방 안의 공기가 나를 질책하고 있는 기분이야.

차라리 뭐라도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무거운 공기에 압사당할 것 같아.

"나. 화 안 났어."

의외로 담담하게 말하는 세아.

"하아. 나도 미나 언니 말 듣고 생각 많이 했어. 내가 고작 스킬 때문에 오빠를 좋아했을까? 나는 정말 나를 구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을까? 과연 매혹이 없었더라도 오빠를 좋아했을까?"

의자에 앉은 세아의 발은 살짝 공중에 떠 있다. 그렇게 발끝을 바닥에 대고 천천히 좌우로 흔드는 세아.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어. 그리고 결국 알았어. 어쨌든 나는 오빠를 좋아했을 거야. 굳이 그런 얄팍한 수를 안 썼어도 그랬을 거라고. 매혹이 아니더라도 그때 오빠는…. 솔직히 조금 멋지긴 했어. 능력도 좋고 복수도 해주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나름대로 멋지게 살고 있었지. 게다가 그때 당시의 물류 센터에서도 오빠에 대한 평가는 좋았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저런 말을 하니 약간 얼굴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말을 잇는 세아.

"화…. 안 났어. 내가 오빠한테 툴툴거리고 그런 건…. 조금 다른 이유야. 어쨌든 이건 승희가 너무 갔어. 나는 오빠가 그렇게 밉거나 오빠한테 속았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해."

"그건…. 고맙네. 분명 내가 잘못했는데 그걸 괜찮다고 해주니까."

"괜찮은 건 아냐. 화가 안 났다는 거지. 착각하지 마."

"아…. 그래. 미안."

"오빠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

"알아. 그렇게 넘어갈 생각은 없어."

또다시 침묵. 하지만 아까의 공기와는 조금 다르다.

아까는 가만히 있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공기였다면, 지금은 한결 가볍다.

그만큼 내 부담이 사라져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니까.

"한 번만 더 사과해줘. 그러면 더는 신경 안 쓸 거야."

"진심으로 미안해. 내 경솔했던 짓. 사과할게."

"그래. 이걸로 됐어."

어찌 보면 세아답다고 해야겠다. 쟤는 털털한 편이니까. 근데…. 그럼 뭐 때문에 대체 지금까지 툴툴거린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온 세아.

"나 좀 안아줄래?"

"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안아달라고."

"어. 어어."

나는 팔을 벌렸고 세아는 침대에 앉은 내 무릎 위에 옆으로 앉더니 나를 꼭 끌어안는다.

품 안에 들어온 작은 아가씨. 어쩜 이렇게 작을까.

등을 꼭 안아주자 세아가 작게 말한다.

"숨 막혀. 살살 좀 안아."

"미안해. 너무 좋아서."

"하. 정말. 어쩌다가…."

그러면서 수납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는 세아.

"이건…."

받아들고 보니 이건 그거다. 임신테스트기.

실제로 본건 처음이다. 이게 그거잖아? 두 줄이면 임신인 거.

가운데를 보니…. 선은 한 개였다. 의아한 듯 내가 바라보자 세아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생리도 안 하는데 이걸 하는 의미가 없긴 하지만…. 역시 임신은 안되나 봐."

나는 속으로 날짜를 세보았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여기 왔던 게 언제더라.

5월 1일. 그랬던 거 같은데. 오늘이 며칠이지? 17일?

"이제 이주일 조금 지났는데 그렇게 빨리 나오나?"

"그냥…. 해본 거야. 제약 해제 배운 날 배란이 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 몰라. 몰라. 그냥 짜증 나."

세아의 투덜거림은 단지 내 매혹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구나.

은근히 기대했던 자신의 바람. 하지만 역시나 그게 불가능한 꿈인 것을 알고 투덜거린 거였어.

그걸 알았다고 해도 내가 해줄 말은 없다. 그저 끌어 안아줄 뿐. 말없이.

"우리는 죽어가는 걸까?"

내게 몸을 기댄 세아의 독백은 이상하리만큼 슬펐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

우리는 활활 타고 있는 불 위에 놓인 냄비. 그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탈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은 뜨거움을 못 느끼겠지.

하지만 곧 물이 끓을 것이고 그제야 실감할 거다.

영원히 이곳에 있지 못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죽어버릴 거라는 것을.

"세아야."

"왜."

"만약에."

"말해. 뭘 그리 뜸 들여."

"만약에 우리가 세상이 망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좀…. 끝까지 들어보고 태클 걸어주면 안 될까?"

"...알았어. 말해."

"나도 이게 헛소린 건 알아. 그래서 만약에라고 했잖아. 만약에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몰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는…. 그때 열여섯이었지?"

"어."

"와. 열여섯이면 중3이네. 만나도 문제가 되겠네."

"그게 뭐가 문제야. 내가 그때랑 지금이랑 키가 비슷하다는 게 문제지."

"난 이렇게 품에 쏙 들어오는 니가 좋아."

"키가 컸으면 나 처음 만난 날 죽였을 거야?"

"어? 그건 아니지. 그래도 좋아했겠지."

"뭐야. 그럼 켜는 상관 없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키는 별로 상관없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데는."

잠시 말이 없는 세아.

"말이라도 못하면…."

그러더니 내 품에 꼭 안긴다.

"아…. 중학생 세아라니. 보고 싶은데."

그러자 나를 안았던 손을 풀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 사람 이거…. 위험한데."

"지금이랑 비슷하다며."

"아니. 그래도! 그때면 오빠는 몇 살이야. 스무 살? 대학생? 대학생이 중학생을? 미쳤네! 진짜."

"음…. 나 동기 중에 그런 놈 있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법 어쩌고 이러면서 괜찮다고 보호하던…."

"미쳤어. 미쳤어. 어…. 근데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닌가? 생각해보니 나 중학생 때도 그런 애들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세아를 안고 이야기를 했다.

다녔던 중학교, 가족 관계, 친구들, 취미, 좋아했던 것들…. 그런 걸 말하는 세아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냥 발랄한 아가씨. 순수한 모습. 츤츤거리는 것도 없고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재잘거리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을 정도로.

조금 더 세아를 알게 된 거 같다. 그동안 우리는 망한 세상에서나 살았다.

마치 흑백 세상 같은 곳.

삭막하고 잔인하고 혹독한 세상이다. 상식을 벗어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곳이잖아.

하지만 추억을 회상하는 세아의 모습은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그거다. 가능성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세아의 모습.

그 일부분이나마 조금 엿본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보다 더 세아를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나답지 않게 엄청 떠들었네."

신나게 말해놓고서는 인제 와서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녀석. 어휴.

"세아야."

"왜."

"진짜 안으면 안 돼?"

"...싫어. 오늘은 그냥 이러고 있어."

"알겠어. 그럼."

그리고 말없이 세아를 안는다. 그렇게 품 안에 느껴지는 소중한 온기를 차분히 느낀다.

얼마 뒤 우리는 서로 알몸으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세아는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서로 이렇게 될 걸 알았다.

작고 가녀린 몸, 하지만 풍만한 가슴. 얇고 가는 허리와 그에 비교하면 커 보이는 골반.

그런 작은 세아의 몸이 부서져라 내 허리를 움직인다.

잔뜩 커진 물건을 좁은 세아의 안쪽 끝까지 꾹꾹 밀어 넣고 자극한다.

"하악…. 더 안아줘…. 더 깊게 해줘…. 안쪽까지. 하윽. 임신시켜줘."

조르다시피 애원하는 세아 덕분에 평소보다 더 우람해진 물건.

괜찮은지 걱정이 들 정도지만 격렬하게 신음을 내는 세아를 보니 걱정은 안 해도 될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나를 걱정해야겠는데. 이건…. 무슨 쥐어짜이는 느낌이야.

허리는 내가 움직이고 있지만, 세아의 몸이 내 물건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는 것 같다.

"윽…. 쌀게."

안쪽, 정말 깊은 안쪽에 격렬하게 사정했다. 만약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이건 빼박 임신이었을 거야.

하지만…. 세아는 이걸로 만족하진 않은 거 같다.

괴력을 썼는지 아직 내 물건을 넣은 채로 나를 끌어당겨 눕히고 자기가 올라탄다.

그러더니 바로 자신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끝없이 갈구하는 모습.

그렇게 우리는 정말…. 많이 했다. 오랜만에 살짝 한계를 느낄 정도로.

그것도 밤새도록 이 아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여러 번을 한 거라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세아와 나 사이에 있던 자잘한 앙금 같은 건 어느새 다 사라져버렸으니까.

나도 세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됐다고나 할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정말 어지간히 운 좋은 놈이네. 이런 여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우리가 벙커로 돌아간 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나와 세아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는 승희.

하지만 세아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나 보다.

금세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고 웃는 얼굴이 된다.

"잘했어요."

나한테 와서 작게 말하는 승희.

"어? 뭘?"

"세아 표정이 밝은 거 보니 잘 해결한 거 같네요."

"저게…. 밝아?“

평소와 다름없는 뚱한 표정인데?

"세아가 저 정도면 좋아서 공중제비 돌고 있는 거랑 마찬가지인 건데."

승희의 말을 듣고 세아를 바라봤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다.

대체 어디가? 뭐가 다른 점이 있는 거야?

그런 우리에게 미나가 다가오자 승희는 미나에게 아쉬운 듯이 말한다.

"언니는 나중에 나가야겠네."

그 말을 들은 미나는 나를 쓱 바라보더니 승희에게 말한다.

"그러네, 그래도 괜찮아. 오늘은 세아가 전세 냈다고 생각해야지."

그러더니 둘이 이야기하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뭐지? 뭐야? 무슨 일이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둘이 무슨 대화를 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이해 못 했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들은 슬쩍 보기만 해도 뭔가를 알아채는 능력이 있는 건가?

세아가 뭐가 달라졌는지, 나를 슬쩍 보고 뭘 알아낸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이건 무슨…. 감전 트랩을 밟았을 때나 야쿠자 놈에게 등짝을 찔렸을 때보다 오싹하네.

그렇게 그날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다시 평화를 되찾은 벙커. 세아는 툴툴거리는 게 확 줄었고, 그걸 바라보는 승희와 미나, 안나의 표정은 밝다.

근데 여기에서 나 혼자만 불안해하는 거 같다. 나만 발가벗겨져 있는 기분?

내가 내 딴에는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이 여자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

"나는 그럼 볼일을 조금 보고 올게."

저녁을 먹고 내가 말하자 다들 흔쾌히 알았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볼일은 있지. 하루카가 있는 곳은 확인해야 하니까.

가면 녀석이 왔는지는 확인해야지. 소홀히 할 수는 없지.

그렇게 홋카이도로 순간이동. 그리고 확인. 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

가면 새끼는 진짜 죽었나? 벌써 5월 중순도 다 지나가는데.

어쨌든 확인했으면 됐다.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의정부. 새로운 캐슬.

오랜만에 찾아온 민희는 약간 심통을 부리는 듯했지만 금방 웃는다.

"여자들이 남자들의 비밀을 알고 있냐고요? 질문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뜻인지는 알잖아."

낮의 일로 뜨끔한 나는 민희를 안고 있는 게 아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다.

잠시 생각하는 민희.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여자가 남자의 모든 비밀을 알지는 못하죠. 여자가 무슨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고."

"아니. 근데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글쎄요. 남자랑 여자의 차이가 있죠. 남자는 비밀을 알면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내색하고 싶어 하죠."

"어…. 그런가?"

"근데 여자는 안 그래요. 필요한 순간까지 절대 모르는 척하죠. 그 점이 차이랄까?"

"음…."

"함께 사는 여자들 이야기에요?"

"응…. 응?"

잠깐. 내가 민희에게 승미세안의 이야기를 했던가? 방금 들…. 이라고 하지 않았어?

"후후. 이럴 때 나는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나. 당신의 편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같은 여자 편을 들어줘야 하나?"

의정부에서 조금 더 있으면서 민희와 이야기했지만 결국엔 민희에게서도 아무것도 얻어내질 못하고 벙커로 돌아왔다.

맙소사. 트루먼 쇼가 따로 없네. 왠지 모든 여자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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