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35화 (53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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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학살자

빌런 녀석은 계속해서 난폭하게 경찰들을 쳐 죽이고 있다.

저 스킬 조합이면 어지간한 잡놈들한테는 당할 이유가 없다. 세아 짭이잖아? 저기에서 투명화랑 블링크만 더하면 세아니까.

물론 파워는 더 세긴 하겠지만 아마 세아랑 붙으면 세아가 5초면 잡을 수 있을 거다.

투명화와 블링크의 존재는 그 정도지. 5초가 뭐야? 3초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그렇다 해도 저 스킬 조합이 강력한 건 사실이다.

허접한 경찰들 수준으론 막기 힘들지. 경찰이 전멸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그렇게 경찰을 한참 족치고 있던 녀석이 잠시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리고 나는 봤다. 녀석의 등 뒤에 서 있는 한 놈.

까만 정장을 입고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녀석.

뭐지? 뭐야? 히어로? 다른 빌런? 아니면…. 설마?

새로 나타난 녀석은 당당하게 파괴자 로모도 뒤에서 뭔가 말을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알아챈 놈은 없을 거 같다.

방금 그 녀석…. 경찰들이 별 반응 없는 거 보면 투명화를 쓴 상태였을 거다.

나야 천리안을 쓰고 있으니 보였던 거고.

게다가 로모도의 뒤로 블링크로 나타났잖아? 그거 말고는 저렇게 접근할 방법이 없지.

투시를 배우고 있기에 녀석의 얼굴을 봐둔 게 다행이다.

헤헹. 복면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순진하네.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 정장 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로모도 녀석은 급속도로 의욕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경찰들을 모두 다 때려죽일 것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리저리 난동 피우는 시늉만 하더니 강하게 바닥을 내리쳐 부두를 무너뜨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하. 이거 궁금하네. 아까 그 정장 놈과 저 빌런과의 관계.

아무리 봐도 저건 지시를 받는 것 같잖아?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모습이다. 음모, 배후, 암투와 비밀….

경찰들은 미처 빌런을 쫓아갈 여력이 안 됐기에 떠나는 로모도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비행이 있는 경찰 몇 명이 로모도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 눈에는 이미 사라졌을 테니까.

투명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녀석은 상당히 재주 좋게 도망가고 있다.

주택가 쪽으로 도망치나 싶더니 크게 방향을 돌아 다시 바다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바다를 건넌다. 왜 저렇게 복잡하게 돌아가지?

아. 혹시나 있을 미행을 따돌리려고 저러는 건가.

뭐, 물론 나야 천리안이랑 투시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탐지를 유지하고 있으니 녀석을 놓칠 리가 없다.

녀석이 블링크나 순간이동으로 뿅 하고 사라진다면 모를까, 저렇게 직접 도망가는 거라면 놓칠 이유가 없지.

내가 저 녀석을 당장 잡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아까 그 정장 녀석.

어디선가 그놈도 저 빌런을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 아니, 나라면 지켜볼 거 같다.

그게 맞지. 말만 전달하고 휙 사라진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일 처리를 할 리가 없어.

그걸 염두에 두고 저 빌런 녀석을 포획해야 한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 정장 놈도.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 별거 없다. 그냥 지켜보는 것.

저 빌런 놈은 빈 틈투성이라 언제든지 잡을 수 있으니 크게 걱정 안한다.

결국은 정장 놈이 문제다. 녀석이 또 접촉할까? 아니면 지켜보고 있을까? 지켜본다면 얼마나 오래 지켜볼까?

빌런 녀석은 정말 열심히 도망간다. 바다를 건너 하수구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녀석.

뭐지? 저런 곳이 아지트야? 존나 귀찮네. 하여간 구질구질한데 사네. 빌런은 꼭 저런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거야?

좀 밝고 화사하고 화려한데 살면 안 돼?

그래도 다행인 건 지하로 들어갔기에 녀석을 추격하는 놈들이 누가 더 있나 알아보는 건 쉬워졌다.

있다면 결국 따라 들어가야 할 테니까.

물론 나처럼 천리안과 투시가 있으면 굳이 들어갈 필요 없이 지상에서 눈으로 쫒을 수 있겠지.

하지만 투시는 티어11이다. 개나 소나 얻는 스킬은 아냐. 게다가 천리안을 배워야 하는 조건도 붙는다.

어지간한 놈들은 가지고 있기 힘든 스킬이지. 다행스럽게도.

빌런 녀석이 들어간 곳은 지하철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중간에 한 장소에서 옷을 갈아입는 녀석. 웃긴 건 녀석이 옷을 벗자 덩치가 쪼그라들었다는 거다.

키도 조금 줄어든 거 같은데? 아마 저 옷이 그런 소재인가보다. 신발도 그렇고.

우락부락한 근육처럼 보였던 건 결국 보형물이었네. 씨발. 약쟁이보다 더 심하네.

아무리 위장 때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몸매를 사기 치는 건 좀 심하잖아.

어쨌든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은 녀석은 파괴자 로도모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 체격이 되었다.

그냥 미국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덩치 있는 녀석? 그 정도?

사기꾼 새끼. 이제 저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건가?

그렇게 지하도를 조금 더 움직인 녀석은 지하철 출입구를 통해서 지상 밖까지 나왔다. 그리고 유유히 걸어나가 한 건물로 들어간다.

평범한 주택. 거기 들어간 녀석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하나 꺼내더니 뚜껑을 따고 입에 들이붓는다.

진짜 평범하네. 생긴 것도 평범하고. 누가 봐도 빌런이라고 의심되지 않을 녀석이야.

그렇게 녀석이 집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내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며 다른 지켜보고 있는 놈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정장 놈의 존재를 알았으니 절대 방심할 수 없다.

가장 두려운 상황은 그거다.

녀석이 나보다 수준이 높고, 지금도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스스로 확신이 들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어.

어떻게 찾은 빌런인데, 어떻게 만난 빌런인데.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다.

아니, 기회를 날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당하는 게 문제지.

확신을 갖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한 여섯 시간 정도.

인내심 싸움은 자신 있다. 잠을 안 잘 자신도 있고.

그래서 그렇게 마냥 기다렸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잠이 들고 새벽이 깊어지는데도 가만히 기다린다.

그렇게 여기 시간으로 대충 새벽 네 시 반 정도 되었을 때, 그때야 확신이 들었다.

정장 녀석은 없다는 걸.

페이즈 아웃. 로모도 녀석의 집으로 들어간다.

주변에 페이즈 아웃을 쓰고 있는 놈은 없는 걸 확인하고 침대로 다가간다.

한점 전에 잠든 녀석. 스킬을 쓰고 잤어도 오래전에 풀렸을 거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 염력으로 입을 틀어막고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면서 바로 무효화와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게이트. 녀석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통하는 게이트에 빠졌다.

나 역시 게이트를 타고 넘어갔고 바로 닫았다.

고요한 주변. 그저 도시에서 나는 미세한 소음만 들릴 뿐.

후우. 지친다. 지쳐.

사실 정장 놈은 아까 파괴자 이놈에게 말만 전달하고 돌아간 뒤 지금은 자신의 침대에서 꿀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 확률이 더 높겠지. 지금 이렇게 조심한답시고 지랄을 한 내가 오바한게 맞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놈인걸.

내가 그런 식으로 남들을 잡아 죽였는데 어떻게 내가 방심하겠어. 말도 안 되지.

어쨌든 됐다. 빌런은 내 손아귀에 들어왔고 이제는 기억을 뒤지기만 하면 되는 시간.

바로 기억을 읽는다. 제발 뭔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힘들게 빌런을 잡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정말 실망할 거야. 진짜로.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도시는 다시 깨어났다.

출근하는 차들과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멀리서 봤을 때는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이는 도시.

근데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더 사람이 많았다는 거지? 역시 대도시는 비슷비슷하네.

서울에 살면서 익숙했던 풍경이잖아? 뭐, 이제는 다신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아직 잠들어있는 파괴자 모로도. 녀석을 바라본다. 음…. 더는 필요 없겠지. 그냥 죽이자.

염력으로 만든 랜스가 녀석의 머리를 찍었다. 빛이 터지고 코인 주머니가 나오고 다가가서 그걸 주웠다.

[421,828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다른 놈들보단 많지만 그래도 시시한 수준인 건 비슷하네.

뉴욕의 히어로를 다 죽였으면 뭐해. 죽인 놈들도 찔끔 가지고 있었겠지.

어쨌든 녀석으로부터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다. 근데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의심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은 것. 그 정도.

이 녀석이 빌런이 된 이유는 자연스러웠다. 녀석이 가지고 있던 불만, 동기…. 뭐 그런 건 부자연스러울 게 없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고 그럴 이유가 있었어. 근데 중요한 건 그거다. 정장 녀석. 그놈의 도움. 그게 문제야.

정말 자연스럽게 접근했고 친해졌으며 교묘하게 옆에서 녀석을 코칭했다. 스킬에 대한 조언, 동기 부여, 정보 제공….

결국, 녀석은 자기 뜻대로 빌런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그 정장 녀석에게 놀아난 거였다.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는 상당히 격차가 나기 시작했다.

정장 녀석의 한마디에 바로 자리를 이탈한 것만 봐도 그렇다.

어제의 난동. 거기서 나타난 정장 녀석이 로모도에게 한 말은 간단했다.

'한 달 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요. 당장 돌아가세요. 그리고 죽은 듯이 있으세요.'

그 말만 들어도 누가 우위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뉴욕의 히어로를 모두 죽인 대단한 빌런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장기 말처럼 다루는 녀석. 결국, 빌런을 조종하는 놈들은 있던 거다.

'히어로도 빌런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 있다.'

그걸 확인했으니 됐다. 결국, 내가 처음부터 생각한 게 맞았어.

참나. 이 별거 아닌 걸 확인한다고 괜히 고생했네. 뭐, 어쨌든 확인했으니 됐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냐는 건데.

미국의 음모. 이놈들이 꾸미는 일들. 이런 건 사실 나랑은 상관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

히어로와 빌런을 조종하면서까지 사회 유지를 하는 이유.

궁금하긴 하지만 쉽게 다가가긴 힘들 거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래도 호기심은 생긴다. 그래. 그게 문제지. 호기심. 호기심은 고양이와 사람을 죽인다고.

아…. 코인이 많이 벌리는 일이면 코인 핑계를 대면서라도 파헤쳐볼 텐데….

이건 코인 벌이는 안 되는데 일만 더럽게 귀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하면 할수록 적자를 보는 손해 보는 장사가 될 것 같다고.

근데 '미국의 음모' 이 단어의 조합이 너무 강하다.

하. 진짜. 이걸 어떻게 참아. 어떻게 무시해.

미국이란 단어와 음모라는 단어가 묶여있는데 과연 쉽게 외면할 사람이 있을까? 과연?

한참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앉아서 도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사실 가장 좋은 건 미국은 더 신경을 안 쓰는 거다.

코인 벌이도 시원찮은 데다가 가만히 둬도 알아서 잘살고 있는 놈들. 이런 놈들을 들쑤실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결국은 찝찝함이 문제다.

찝찝함. 녀석들이 꾸미는 것, 그리고 녀석들의 중추부라고 할 수 있는 곳, 거기에서 알고 있는 것, 녀석들의 수준.

그런 것들이 언젠간 내 발목을 잡는 게 두려운 거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어느 정도는 마음을 정리했다.

일단…. 녀석들이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깃장은 놓자.

히어로, 빌런, 경찰…. 닥치는 대로 죽이며 일단 코인이라도 얻는 거야.

그리고 이놈들이 유지하려는 사회를 뒤흔드는 거지.

그렇게 요란하게 흔들면 급해진 녀석들이 뭔가 빈틈을 보일 거다.

그렇게 급해지고 빈틈이 생기면 녀석들의 의도와 하려고하는 일들을 알아낼 방법이 생기겠지?

딱 실리만 얻고 간만 본다고 해야 할까? 아직은 손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좋아. 생각이 정리 됐으면 이제 움직이자.

아직 하루를 마감하기엔 이르다. 그러니 어제 하려다 못한 짓을 마저 하러 간다.

백악관. 거기는 보고 가야지. 어쨌든 거기가 미국의 중추인데. 설마 뭐라도 있겠지.

그래서 그대로 날아갔다. 워싱턴 DC로.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보러.

그리고 나는 실망했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없다.

왜 없지? 왜 백악관이 비어있지? 이건 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왜 백악관을 비워놔? 여기 상징성 있는 곳 아니었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있었다. 근데 중요한 사람들처럼은 안 보인다.

그냥 관리하는 사람들. 그 이상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있는 척하는 기분을 내는 정도?

씨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을 비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는데.

왜놈들이 임진왜란에 한양에 와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걔들도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생각을 못 했을 테니까.

황당하네. 이건 너무 의외인데. 좋아. 그럼…. 거기에 가보자. 펜타곤.

거기라면 뭔가 있겠지. 거기도 유명한 곳이잖아? 높은 놈들이 잔뜩 있는 곳이고?

조금 헤맸지만 결국 찾아간 펜타곤. 그리고 나는 또 실망했다.

펜타곤 안에서 기척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정도 크기의 건물에 저 정도 기척이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봐야 할 거다.

생각해보니 펜타곤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군인들이 전부 사라졌다면 펜타곤은 텅텅 비는 게 맞을 테니까.

그래…. 그리고 여길 다시 안 쓴다면 그것도 이해한다.

제길. 그럼 미국의 중요 인물들은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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