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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사용인 남자의 이름은 진우. 여자의 이름은 상아.
뭐, 이름까지 외워야 할 사람들은 아니다. 여자도 차분하게 생기긴 했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고.
어쨌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리 중요한 건 없었다.
세상이 망하고 다들 뿔뿔이 떠나는 와중에도 성연의 아들, 민후가 신경 쓰여 남은 두 사람.
그런 거 보면 저 두 사람은 제법 대단하다. 나이도 그렇게 많은 거 같진 않은데 남의 집 애까지 맡아 키우다니.
그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물론 그 아이가 대호 그룹의 차기 후계자라는 게 컸을 거다.
어떻게 보면 안 그래도 좆된 세상에서 든든한 라인을 잡을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에게 불행이었던 건, 대호에서 보낸 구출대와 조우하지 못했던 거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구출대가 진짜 미국에 도착했었는지도 확실하진 않지.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거야 뭐 알 바 아니고.
어쨌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 나름대로 노력해 지금까지 민후를 지키고 있던 그들.
그런 그들에게 찾아온 성연. 드디어 그들의 노력은 보답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건 힘들어졌다.
대호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그 대호를 박살 내버린 건 바로 나고.
근데 성연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지? 미국에 데려다줘서?
그건 셈이 안 맞는다. 뭐 어쨌든 나는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건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와 미국의 현실.
"되는대로 일하는 거죠. 어쨌든 집에서 놀고먹는 것만 아니라면 어디든 일할 거리는 있으니까요. 보수로 돈을 받거나 식량을 받을 수 있으니 놀지만 않으면 굶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상아의 스킬이 위스키 생산이라 그걸로도 어느 정도 식량 교환이 가능하고요."
아. 미국에선 소주 생성이 위스키 생성인가 보지? 근데 위스키가 미국 거인가? 스코틀랜드 아냐?
잘 모르겠네. 생각해보니 미국의 전통주가 뭐지? 얘들이 전통주라는 게 있나? 대표 술이라고 할만한 게 뭔지 모르겠네.
어쨌든 위스키라고 하니 뭐 그런가 보다. 거기까지 내가 따지고 들일은 아니니까.
성연과 대화하고 있는 남자. 아. 이름 벌써 까먹었다. 암튼 그 남자는 성연에게 그렇게 대답한다.
그래. 궁금한 거 하나는 해결했네. 근데 미국의 현실 같은 이야기는 지금 나올 상황은 아닌거 같긴 하지?
그럼 내 볼일만 적당히 보고 이제 가야지.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으니.
"이봐."
내가 부르자 남자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경계까지는 안 한다.
성연을 도와줘서 그런 걸까? 하긴, 그냥 봤을 때는 아군처럼 느껴지겠지. 아직 내 실체를 모르니까.
"여기 뉴욕에도 그 슈퍼 히어로인가 하는 놈이 있나?"
내 질문에 남자는 얼굴을 좀 굳히지만 바로 대답한다.
"있었…. 죠. 지금은 공석이지만. 근데 곧 다시 파견된다고 합니다."
"있었다고? 죽었나?"
"네."
"슈퍼 히어로가 죽어? 그럼 누가 죽였는데."
"파괴자 로모도요."
"이름하고는. 그래서 그놈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네? 그건 저도 모르죠…."
하나하나 질문하기엔 너무나 귀찮다. 게다가 나는 얘들 스킬도 아직 뭔지 모르네.
하여간, 자꾸 이렇게 긴장이 풀리면 안 되는데. 이놈들이 갑자기 나를 공격할 이유야 없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다짜고짜 무효화. 그리고 모두 재웠다.
그런 다음 성연의 집 게이트를 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옮겨 놓았다.
그리고 기억 읽기.
남자와 여자의 기억에서 필요한 것들을 읽는다. 일단 스킬부터.
남자는 괴력, 여자는 아까 말했듯 위스키 생성.
이런 스킬로 잘도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그럼 꼬맹이는? 투명화야? 얘는 시작이 좋네.
아까 빌런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파괴자 뭐? 모로도?
직접 마주친 일은 없기에 이들도 들은 정보가 다지만 어느 정도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됐어.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났고.
아. 수납에 이 여자들 짐이 있지. 그건 놓고 가야지.
방 하나에 신영의 짐들을 몽땅 꺼내놨다. 정리가 안 돼서 엉망이지만, 그건 알아서 하겠지.
가장 큰 방, 딱 봐도 성연의 방인 곳에도 성연의 짐을 다 내려놨다.
방이 커서 침대 하나랑 운동기구까지 내려놔도 널널할 정도네.
이야. 여기 땅값이나 집값은 어마어마했을 텐데. 역시 대기업 며느리라 이런 집도 살고. 대단해 정말.
진짜 볼일 끝. 지금은 이제 더 볼 일이 없다. 지금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나은지, 아니면 여기에 남아있는 게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어진 한국이나 빌런이 나다니는 미국. 솔직히 어느 게 더 낫다고 말 못 하겠어.
근데 그나마 여기가 더 나을 거 같다. 한국에선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까.
사실 여기에서도 성연과 신영이 먹고살 방법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모르겠다. 그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다 끝내놓고 페이즈 아웃을 썼다. 잠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간 뒤 페이즈 아웃을 해제했다. 그리고 버프를 걸고 하늘로 솟아오른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느꼈던 그 살인의 냄새. 역시 맞았어.
빌런이 히어로를 모두 죽였다고? 그래서 여기는 지금 무법지대인 거야?
이거…. 고담이네? 그럼 또 다크 히어로가 등장해야 하나?
일단 경찰 서장부터 만나야겠네. 아. 아니지. 처음엔 서장이 아니었구나. 의협심 넘치는 일반 경찰?
아. 웃기네. 이러니 내가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어.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가능하지. 빌런이 히어로도 막 죽이고 그럴 수 있지.
근데 너무 작위적이다.
각 도시에 몇 명씩 히어로를 보유하고 있는 그 히어로 협회가 있는데 빌런 나부랭이가 히어로를 다 죽일 때까지 내버려 둔다고?
말이 안 돼. 말이. 이건 내가 의심병이 있는 게 아니야. 너무 작위적이라고.
그럼 의도를 한번 생각해보자. 왜 히어로를 다 죽였을까?
빌런은 병신 머저리가 아니다. 히어로를 죽이는 건 악수 중의 악수지.
오히려 상대하기 편한 히어로라면 적당히 저주는 척하면서 잡히진 않고 실제로 실속을 빼먹는 게 훨씬 현명하잖아.
경각심? 그런 게 필요한 걸까?
뉴욕에 사람이 너무 많았나? 음. 빌런이 뭐라 그랬지? 파괴자?
구시가지 같은 걸 부수고 새로 짓고 싶었나?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앞으로 100년도 더 못살 텐데.
일단은 돌아다녀 본다.
미국행도 끝났기에 당분간은 할 일이 없다. 하루카쪽을 살펴보며 가면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지.
아. 코인은 모아야 하니까 짱개도 쳐 죽이러 가긴 해야 하는데.
그건 일단 안나가 데스 윈드를 배운 다음 가보고.
그때까지 이 미국을 돌아다녀 봐야겠다. 일단은 여기를 좀 더 살펴보자.
빌런과 접촉해봐야지. 그래야 녀석들의 진위가 뭔지 알아내지.
뉴욕.
세상은 망했지만, 그 건물들과 유명한 장소들은 그대로 있다.
서울처럼 방치된 곳이 아니라서 거리도 건물도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어디를 가볼까? 센트럴 파크?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뭐, 다 가보면 되지. 어차피 여기 근처에 다 모여있을 테니까.
센트럴 파크 부터 가보자. 조깅하고 있는 쌔끈한 언니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라는 건 내 망상이었고요.
생각해보면 빌런이 히어로를 죽일정도로 치안 상태가 엉망진창이라는 이야긴데.
그런 상황에서 여기에 와서 빵디를 흔들면서 조깅하고 있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 내가 멍청했네. 한심한 망상이었어.
그렇게 쌔끈한 언니들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센트럴 파크는 나름 분위기가 좋았다.
역시 사람은 녹지를 봐야 한다니까. 수술 가운이 괜히 녹색인 게 아냐.
사람은 녹색을 봐야 한다고. 마음이 평화로워지잖아?
근데 보통 이런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으면 뭔가 와장창하면서 빌런이 나타나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야 하는데.
왜 안 나타나지? 뭔가 플래그가 부족했나?
어쨌든 그렇게 공원에 앉아서 수납을 뒤지며 먹을 걸 찾아본다.
오. 샌드위치. 회귀하고 수납 안에 넣었기에 유통기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음식.
그걸 까서 한 손으로 들고 우적우적 먹으면서 간만의 평화를 느낀다.
음. 좋네. 살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건 처음이야.
노을이 지고 있는 것도 맘에 든다. 역시 밤이 편해. 낮 보다는 밤이 좋지.
적당히 여유 좀 부려봤으니 이제 다음 할 일을 찾아본다.
빌런. 얌전히 있을까? 빌런이 사고를 치면 가장 먼저 소식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경찰이겠지? 그럼 일단 경찰차를 찾자. 경찰차가 급하게 가는 곳이 있으면 거기에 빌런이 있을 거야.
하는 김에 정의감 넘치는 경찰도 찾고. 그래야 녀석이 건물 옥상에서 라이트를 켜주지.
아니지. 아예 경찰 무전을 들으면 되잖아?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장소든 뭐든 뜨겠지?
크. 좋은 생각이야. 그럼 바로 실행해봐야지.
한참 돌아다니다가 찾아낸 경찰차. 신호대기에 걸려있을 때 페이즈 아웃으로 살짝 뒷자리에 탔다.
그리고 빠르게 해제랑 투명화. 다행히 앞 좌석에 탄 경찰 두 녀석은 눈치 못 챈 거 같다.
쯔쯔.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경찰 맞아?
계획은 좋았으나…. 문제는 내가 경찰 무전을 들으면서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거다.
지명도 너무 어렵고, 무엇보다 지명을 들어도 어딘지 잘 모른다.
아. 진짜. 시도는 좋았는데. 아이디어도 좋았고.
차라리 여경이 있는 차를 찾아보는 게 낫겠다. 매혹하는 게 차라리 낫지.
경찰차를 떠나 다른 차들을 찾아봤다.
근데 여경은 잘 안 보인다. 없는 건 아닌데 여경만 타고 다니는 경찰차는 없네.
쯧. 생각했던 대로 잘 안 되네. 빌런 마주치는 게 이렇게 힘들었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뉴욕을 바라보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앉았다.
크. 이런 영화 같은 짓을 하다니. 이런 건 누구에게 말해줘도 잘 안 믿을 거야.
민희나 정 부장 정도만 믿어주겠지? 그래도 자랑할만한 사람이 둘이나 있네. 리액션이 벌써 기대된다.
히어로가 없어서 그런가? 경찰차들은 여기저기로 사이렌을 울리면서 싸돌아다닌다.
이젠 하나하나 따라다니기도 귀찮다. 그냥 여기 앉아서 천리안과 투시로 지켜본다.
잡범. 잡범. 잡범.
경찰들의 대응은 정말 재밌다.
무장강도든 소매치기든 하여간 범행이 확실하고 범인이 확정적이면 사살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
일단 테이저건을 발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범인이 보호막이 있지 않은 한 그 선에서 그냥 정리된다.
즉결 사살이라니. 정말 야만의 극치네.
연행이 없는 게 정말 충격적이야. 저런 경찰이 있는 데도 범죄를 저지른다고?
아직 범죄자가 남아있는 게 진짜 신기할 정도네.
그렇게 시시한 체포가 아닌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악의 소탕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글렀네. 빌런 새끼는 나올 기미가 안 보여.
마냥 이러고 있기엔 너무 지루하다. 좀 더 재밌는 짓을 하러 가야지.
순간이동. 목적지는 성연의 집.
그녀들이 이곳에 있는 한 나를 벗어날 수는 없다. 도착하자마자 탐지를 돌린다.
아까 내가 각자의 짐을 놓은 곳에 기척들이 느껴진다. 성연의 방에서는 두 개의 기척이.
신영의 짐을 놓은 곳에서는 하나의 기척이.
셋? 아까 그 남자랑 여자는 돌아간 건가? 하긴 여기 같이 있기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
걔들도 집이 있었고.
나야 잘된 일이다. 뭐 사실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긴 하지만.
신영의 방으로 먼저 가본다. 문을 열자 짐을 정리하고 있는 신영.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 나는 한번 씨익 웃고 무효화와 수면을 날렸다.
풀썩 쓰러지는 신영. 염력으로 들어서 수원에서 가져온 그녀의 침대에 올려놓는다.
너는 잠시 이러고 있으렴. 다 차례가 오니까.
성연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잠든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고 얼굴을 굳힌다.
무효화와 수면. 하지만 수면을 건 것은 성연이 아니다. 이미 잠든 그의 아들에 수면을 걸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잠든 아들이 깰까 봐 목소리는 높지 않다. 낮게 깔리는 뾰족한 목소리.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아들을 만나서 기분 좋아?"
아들 쪽으로 몸을 옮기는 성연.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잠들어 있으니 걱정 하지 마. 내가 깨울 때까진 일어 날일 없으니까."
나를 노려보는 저 눈빛. 아. 중독될 거 같아.
아들이 옆에 있는 이상 성연은 아무 짓도 못 한다. 그저 하는 말을 따라야 하는 한 여자일 뿐.
"쓰레기 새끼…."
저 가시 돋은 모습이 너무 좋다. 그리고 그걸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이렇게 좋은 장난감이 생겼는데 그냥 장식장에 넣어놓고 구경만 할 필요가 없지.
장난감은 가지고 놀라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