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27화 (52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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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맨해튼, 165 찰스 스트리트. 뉴욕. 미국.

성연의 집.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미국에서 거주했던 집.

제법 좋은 집이다. 하긴, 천하의 대호 그룹의 며느리와 손자가 머무는 집인데, 시시한 곳에서 살 리가 없었겠지.

근데 집안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깨진 화분들도 보이고 상당히 흐트러져있는 모습.

차분하게 가라앉은 두꺼운 먼지들. 근데….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네?

세상이 망하고 4년간을 빈집털이에 몰두했기에 먼지를 보고 사람이 드나들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익혔다.

그런 내가 보기엔 여긴 그동안 완전히 비어있던 집이 아니다. 누군가 왔다 갔다 했어.

누굴까? 설마 이 집에 있었던 사람의 생존자?

하긴 기억으로 봤을 땐 미국에서 고성연 모자를 지원했던 사용인도 꽤 있었다.

만약 미국이 한국처럼 됐었다면 아직 그들이 살아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안 했을 거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보고 알았다. 의외로 고성연의 아들이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뉴욕은 분위기가 어떤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처럼 어처구니없이 몰살당하진 않았을 거 같다.

그럼 이 흔적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 근데 애들 신발 사이즈는 없는 거 같은데.

모르겠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돌아가서 자야겠다. 비행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해.

생각했으면 바로 움직여야지. 뉴욕 저장 위치를 이곳으로 덮어씌운다.

그리고 일단 집으로 순간이동하고 간단하게 씻은 뒤 바로 잤다.

방금까지 환한 오전이었기에 그냥 잠들라고 그랬으면 상당히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캄캄한 벙커인 데다가 어차피 수면으로 잠드는 거니 시차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

참나. 이런 식으로 시차를 극복하다니. 이것도 정말 웃기네.

아침. 눈을 뜨고 바로 준비를 한 다음 수원으로 순간 이동했다.

조용한 벙커. 탐지를 돌려보니 성연과 신영은 둘 다 깨어 있는거 같다.

반사 하나만 몸에 두르고 바로 발소리를 저벅저벅 내면서 인공 정원 쪽으로 걸어가며 크게 외쳤다.

"당장 튀어나와!"

무슨 빚 받으러 온 깡패 같네. 좀 부드럽게 할 걸 그랬나?

성연의 방문이 열리고 마땅찮은 표정의 성연이 나온다.

그리고 신영 역시 절대 곱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나왔고.

하지만 저런 시선 따위를 신경 쓸 내가 아니지. 오히려 좋아. 오싹오싹하거든.

"자살 안 한 거 보니까 미국 갈 생각은 있나 보네? 그럼 가자."

성연의 표정은 정말 웃겼다.

맘에 안 들겠지. 무례하고 오만하고 자기 맘대로 말하는 남자.

게다가 자기 입으로 남편과 시아버지 등을 죽였다고 했으니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표정 안쪽에 묘한 기대감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 어떻게든 가고 싶어 했던 미국.

그걸 미끼로 눈앞에서 흔들어대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런 그녀를 위해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게이트. 그리고 그 너머는 성연이 익히 알고 있는 곳.

게이트를 본 성연의 눈이 커진다. 기억이 삭제되었기에 게이트 스킬 자체도 처음 보는 여자.

근데 지금 스킬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홀린 듯이 게이트 너머로 건너가는 성연.

무슨 뮤지컬 무대 같다. 반으로 갈라진 무대. 한쪽은 지하에 있는 벙커. 다른 한쪽은 뉴욕의 아파트.

게이트 자체가 워낙 커서 그런 분위기가 되네. 참 신기한 광경이야.

"아…. 아아…. 드디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파트의 방문들을 열어보는 성연.

그런 그녀를 두고 성연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짐들. 그대로 수납을 열어 삼켜버렸다.

침대, 화장대, 운동기구, 뭐 그런 것들 전부.

붙박이장까지 열어서 안에 있는 것들을 몽땅 담았다. 나를 따라온 신영이 그러는 나를 보고 빼액 소리를 지른다.

"뭐 하는 거야!"

"이사."

그렇게 성연의 방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담은 나는 바로 신영의 방으로 향했다.

"거긴 왜 들어가!"

"이사."

신영의 방은 조금 더 작은 데다 짐이 별로 없어서 담기가 편하다.

이것저것 보이는 족족 수납에 쑤셔 넣는다.

"미친놈아! 함부로 건드리지 마!"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역시 붙박이장을 열어 안에 있는 걸 다 털어 넣는다.

그렇게 서랍 안에 있는 물건도 집어넣는데 신영의 팬티가 보인다.

"귀여운 거 입네."

"닥쳐! 미친놈아!"

몽땅 다 담은 나는 느긋하게 신영을 보며 말한다.

"자. 건너가."

"내…. 내가 왜!?"

"그럼 죽던가."

입술을 깨물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신영.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춤거리며 게이트 너머로 건너간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건너가고 게이트를 닫았다.

끝. 이제 수원에 있는 벙커는 텅 비게 되었네. 내가 잘 써먹어야지. 여러가지로.

우당탕!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성연이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후다닥 밖으로 나온다.

"민후! 민후가!!!"

그러면서 신발장을 뒤지더니 아무거나 하나 꺼내 신고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뭐야? 왜 저래?"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성연.

"야. 어디가."

"나. 말리지 마요. 나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우리 민후 보러 가야 해요. 그러니까 나 말리지 마. 말리지 말라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모습. 항상 차분했던 그녀의 처음 보는 모습.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퀸즈…. 플러싱. 137번가…."

"그렇게 말해야 어딘지 모르겠고. 가까운 곳이야? 걸어가게? 그러고 갈 수 있어?"

그제야 성연은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벙커에서 편한 복장으로 있다가 넘어왔기에 그녀의 복장은 외출복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게다가 이동 수단이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성연이 저 꼴로 나가는 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그걸 보면서 움찔하지만, 방금 내가 했던 말 때문인지 꼼짝 못 하는 그녀.

"집에 들어가 있어. 주소 나한테 주고. 내가 가서 열어주지. 방금처럼."

그 짧은 사이에 상당한 고민을 하는 거 같다. 하긴 그럴 만 하지.

이 여자에게 나란 놈은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니다.

이런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

"기껏 미국까지 와서 아들 만나기도 전에 안 좋은 일 당하고 죽을래?"

내 말이 결정적이었나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성연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보여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퀸즈…. 플러싱 지역이라고….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곳이 있어요….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요. 8마일? 그 정도…. 137번가에…."

그렇게 손에 쥔 노트를 보며 주소를 말해준다.

얼핏 보니 거기엔 방금 말했던 주소가 적혀있었고 '보고 싶어요. 엄마.'라는 문구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여 있다.

설마. 저건 성연의 아들이 써놓은 건가?

그러자 어제 먼지가 생각났다.

누군가가 계속 드나들었던 흔적. 그건 성연의 아들이 만나보네. 5년 전에 7살이라 그랬으니 지금은 12살일 텐데.

혼자 다니는 건 아닐테고 같이 다니는 사람이 있나?

근데 또 마냥 그렇게 믿을 수는 없다. 함정일 수도 있잖아? 누군가가 성연을 노리고…. 에휴. 아니다.

한국에 있는 게 뻔한 성연을 미끼로 누가 함정을 판다는 거야. 이건 좀 너무 비약이 심했네.

근데 그 아들이라는 녀석도 대단한데? 엄마가 자기를 잊지 않고 찾으러 올 거라는 생각을 한 건가?

모르겠다. 일단 직접 가서 보면 알겠지.

"아들 이름이 민후?"

"네."

아직도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성연. 자기 입으로 원수라고 말한 이에게 부탁하는 느낌은 어떨까?

뭐, 그런 건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도록 하고.

"집 안에 있어. 금방 게이트가 열릴 거니까."

그리고 바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 해제 후 비행과 투명화를 비롯한 모든 버프를 켠다.

동쪽이라 그랬지? 근데 어디가 동쪽이지?

스마트 폰을 꺼내 지도를 켜본다. 퀸즈랬지. 퀸즈. 플러싱? 아. 여기군.

지금 내 위치가 대충 맨해튼 여기니까…. 아. 저쪽인가 보네.

바로 날아간다. 그리 먼 곳은 아니라 금방 도착한 퀸즈. 하긴 8마일이라고 하면 12킬로 정도 되는 거리다.

블링크를 썼으면 10초 컷도 가능한 거리.

137번가라…. 아. 여기네. 그리고 뒤에 주소가…. 31번지에…. 어…. 여기네.

소박한 건물.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을 만한 건물.

게다가 앞에 도로도 그렇고 서 있는 차들도 그렇고 상당히 위화감이 없다. 여기 뉴욕 맞아? 광진구 이런 곳 아니지?

투시를 써서 건물 앉을 살펴본다. 수염이 정리 안 된 남자 하나, 머리를 차분하게 가르마를 탄 여자 하나. 그리고 애 하나.

셋 다 아무리 봐도 한국인이다. 그리고 저 애는…. 낯이 익다.

새끼. 쟤가 성연이 아들인가 보네. 이름이 뭐라고? 민후? 7살 때 얼굴이 그대로 있네. 나 같은 놈도 딱 알아볼 정도면.

흠…. 어쩐다. 쟤를 납치해가면 되나? 근데 같이 사는 저 한국인 두 명. 쟤들은 뭐지? 사용인인가? 뭐. 물어보면 알겠지.

페이즈 아웃.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사각에서 해제. 그리고 버프를 건 뒤 무효화와 수면 세 방.

남자와 여자가 옆으로 풀썩 쓰러지고 꼬맹이 역시 쓰러진다.

당연히 재워야지. 열두 살이면 스킬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잖아?

열여섯에 일산을 다 잡아먹은 도현이 같은 놈도 있는데, 방심할 수 없지. 이런 건 오히려 애들이 더 무서워.

"게이트."

성연의 집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자 후다닥 성연이 튀어나온다. 그 뒤를 마지못해 따라오는 신영.

낯선 곳이라 두리번거리던 성연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민후를 보더니 벼락 맞은 듯 제자리에서 부르르 떤다.

그리고 정말 무릎이 깨지든 말든 쏜살같이 달려나가 쓰러진 민후를 감싸 안았다.

"민후야! 민후!!!우리 민후!!!"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무효화를 썼다.

수면에서 깨어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뜬 민후. 그러더니 자신을 안고 있는 성연을 보고 눈이 커진다.

"어…. 엄마?"

"그래! 민후야! 엄마야. 엄마. 엄마가 민후 보러왔어. 어허어엉."

"엄마? 엄마!"

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잠들었다 깨어난 이 집에 있던 남자와 여자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본인들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겠지. 한국에 있어야 할 성연이 여기 이렇게 떡하니 와있으니 말야.

그러든지 말든지 성연과 민후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아들의 얼굴을 만져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끌어안는 성연.

열두 살 치고는 제법 크지만 이 순간엔 어린아이랑 다른 바 없는 민후.

그걸 바라보고 있는 신영과 사용인 남자, 여자는 눈시울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뭐…. 좀 감동적이긴 하네. 사실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았지.

정말 많은 우연과 기적이 얽혀서 만들어낸 결과잖아?

그러니 저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당연히 좋겠지. 아마 성연에게는 지금 이 순간보다 좋은 순간이 없을 것이고.

한참의 눈물바다가 지나가고 겨우 진정된 모자.

성연은 다시는 아들을 잃지 않겠다는 듯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다.

그러면서 그제야 사용인 남자와 여자를 보고 감사 인사를 한다. 어쨌거나 저 둘이 지금까지 자기 아들을 돌봐줬으니까.

그녀에겐 더없이 고마운 은인 같은 이들이겠지.

서로 모여 앉아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세 사람.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큰둥하게 그 이야기를 듣는다.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참고할만한 게 있나 싶어서.

신영 역시 나랑 비슷하게 서 있다. 사실 이 여자는 성연에게 큰 관심이 없다.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거니까.

반쯤은 나에게 떠밀리듯이 왔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래도 이야기는 흥미가 있는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자 신영이 나를 노려본다.

음. 저렇게 노려보는 표정이 상당히 자연스럽단 말이지. 평소에 저러고 다녔나 봐.

근데 저러고 있어도 이쁘긴 하네.

역시 여자는 외모가 최고야. 뭔짓을 해도 미모로 커버가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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