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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
예전 같았으면 호텔 안에 있는 인간들을 확인하려고 하나하나 들어가서 봐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투시가 있잖아? 얼마든지 멀리에서 확인할 수 있어. 물론 기억 읽기를 하려면 결국은 다가가야겠지만.
그렇게 첫 번째 투시를 하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침대에 누워있는 비쩍 마른 남자. 처음엔 무슨 좀비인 줄 알았다.
근데 자세히 보니 좀비는 아니다. 그냥 야윈 노인. 아니…. 노인이 아니야?
자세히 보니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 그냥 빼빼 마르고 피부가 이상한 남자였다.
그리고 호텔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들, 얼굴들.
퀭한 눈과 바짝 마른 몸, 겨우 움직이거나 침대에 누워있는 인간들.
아. 마약이구나.
기억 읽기를 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마약 중독자들, 그것도 중증이야.
아니…. 어쩌다가 망해버린 도박 도시에 중증 마약 중독자들이 이렇게 몰리게 된 거지?
누가 일부러 모으라고 해도 힘들겠다. 아니…. 잠깐. 설마?
정말 손대고 싶진 않지만 들어가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여자들 위주로 기억을 읽어봤다.
그리고 얼추 생각한 게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들은 누가 일부러 모은 게 맞았다. 나라에서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으거나 이송해놓은 것.
아니…. 질병 해제로 바로 해제되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이동하고 옮기고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어쨌든 미국의 서남부에 있는 사람 중에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로 가면 된다! 라는 말이 있나 보다.
여기 있는 이들은 결국 그런 이야기를 듣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약한 사람들이네. 음. 오래된 말장난이었군.
매일 정오가 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차가 와서 이들에게 식료품과 치료를 병행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한자리에서 치료가 전부 되는 경우는 없나 보다. 하긴 질병 해제가 원하는 병만 딱 고치는 건 아니잖아.
결국, 이들이 가진 병들을 전부 해제하거나 중간에 운이 좋아 마약 중독이 치료돼야 하는 거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래서 이들은 여기서 저렇게 좀비처럼 있다가 치료가 되면 떠나는 거다.
근데 가장 웃긴 건…. 이 짓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기억을 읽은 여자 중에도 두번, 세 번째 오는 여자들이 있었다.
여기서 치료받고,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본다.
하지만 마약의 중독은 사라졌다고 해도 의존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몸의 부작용이 말끔하게 사라졌으니 더 그런 생각이 들 거다.
미친년들. 미친 인간들. 아니, 인간으로 불러줘도 되나 모르겠네.
가장 의아한 건 그거다. 미국 정부의 의도.
대체 왜 이런 약쟁이 새끼들을 치료해주고 식량을 주는 거지?
이게 가장 이해가 안 가네. 그냥 오는 족족 잡아 죽여서 코인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나?
솔직히 그것만큼 깔끔한 처리가 없잖아?
질병 해제로 몸의 중독은 끊을 수 있지만, 마음의 중독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면 빠르게 죽여버리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일 텐데.
모르겠다. 모르겠어. 무슨 인류애나 박애주의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거 같은데.
어쨌든….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다. 게다가 마침 적당히 시간도 됐다.
일단 위치 저장. 다시 동쪽으로 가려면 여기 위치는 저장해야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순간 이동한다. 내가 볼일이 있는 시장님을 마중 나가야지.
시청 위에 떠서 천리안으로 시장을 지켜본다.
이쁜 여자도 아니고…. 저런 곰 같은 남자를 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어휴.
그래도 내가 용건이 있는 건 저자의 기억이다. 어쩔 수 없지. 기다리자. 기다려야지 별수 있나.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 됐는지 시청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간다.
시장도 다행히 야근 같은 건 안 하나 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퇴근할 준비를 하는 모습.
운전기사라도 대동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직접 운전을 한다. 차도 고오급 세단 같은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한 SUV야.
흐음. 신기하네. 상당히 검소해.
그렇게 이동하는 시장을 계속 지켜본다. 굳이 빨빨거리면서 따라갈 필요도 없다. 그냥 차만 놓치지 않으면 되니까.
천리안은 이래서 좋아. 게다가 투시가 없었으면 이 효과가 절대 나오지 않았겠지.
계속 지켜보니 시장은 한 집 앞에 도착했다.
으리으리한 저택일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2층 주택이다. 차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상당히 검소하네.
이유가 있나? 시장 정도면 좀 으리으리하게 살아도 되는 거 아냐?
집에 들어가 옷을 훌훌 벗고 목욕을 하길래 시선을 돌렸다.
아. 씨발. 눈 버렸네. 남자의 알몸 같은 걸 보다니. 이런 부작용이 있었어.
투시에 자동으로 필터링 같은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남자 알몸 같은 건 자체 모자이크가 됐으면 좋겠네.
그렇게 한참 뒤에 다시 시장을 바라보니 그는 침대에 앉아서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음? 뭐지? 어? 우나?
시장은 분명히 울고 있었다. 복받치는 설움과 눈물을 참지 못한다는 듯 서럽게 울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고 있던 건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올려진 사진이었다.
아마…. 부인과 자식인가 보네. 근데 그들은 집에 없다.
이혼? 아니면 죽었나? 이혼이면 저렇게 서럽게 울진 않을 거 같네.
아무래도 죽은거 같은데. 쯧. 안됐어. 보고 있자니 가슴이 조금 아플 정도야.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시장은 그리 할게 없었나 보다.
한참 청승을 떨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가져와 집의 2층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 캔을 홀짝거린다.
상당히 쓸쓸하고 처량한 모습이다. 기분이 별로 안 좋네.
아까 시청에 있었을 때는 상당히 정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집에 오니 저렇게 축 처져 버리네. 무리해서 기운 내고 온 건가? 그리고 그런 그를 받아주는 건 차가운 캔맥주 하나뿐이고?
그렇게 맥주를 다 마신 남자는 약통에서 약을 꺼내 먹더니 정말 이른 시간인데도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 9시도 안된 거 같은데. 이렇게 일찍 자?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대단하네.
그래도 뭐 나야 고맙다. 알아서 잠들어주면 기억 읽기는 편하겠지.
근데 뭐 시장이 저러냐. 이해가 안 갈 정도네.
조금 더 화려하고 조금 더 보안이 철저해야 하는 거 아냐?
저건 아무리 봐도 그냥 불쌍한 홀아비잖아.
어쨌든 남자가 침대로 들어가고, 나는 바로 시장의 집으로 향했다.
보안이라곤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단순한 집.
자신을 보호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인다. 그래도 시장이면 나름 중요한 사람인데.
애초에 주변에서 저런 사람을 이렇게 프리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는데. 그것도 신기하네.
혹시나 함정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탐지에 걸리는 기척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혹시나 잠복해있는 경호원 같은 게 아닐까 확인한다.
근데 딱 붙어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저렇게 멀리 있을 리는 없다. 지키지 못하는 경호원은 말이 안 되지. 언어도단이야.
함정은 없다. 있어도 의미 없다. 안 걸리면 되니까.
안에 최첨단 보안시스템이 있어서 시장 외의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레이저 건 같은 게 튀어나와 자동으로 나를 요격하는 게 아닌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
페이즈 아웃. 그리고 바로 시장의 옆까지 이동. 해제와 동시에 무효화와 수면.
현 위치를 빠르게 저장하고 게이트로 라스베이거스를 연 다음 염력으로 시장을 들어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러고 게이트를 닫으면? 끝. 납치 완료.
밤에도 별로 안 추워서 다행이다. 하긴 라스베이거스 여기는 사막이니까. 오히려 더위를 걱정해야지.
어디 들어가고 그러고 싶진 않다. 그냥 주변을 탐지 한번 돌려본 다음 조금 으슥한 곳으로 이동만 했다.
어차피 주변에 있는 건 죄다 마약 중독자들밖에 없으니까. 이정도로 충분하지.
바로 기억 읽기를 시작한다. 혹시나 모르니 주변 경계는 철저하게 하면서 기억을 읽는다.
한참을 그렇게 스킬을 쓴 뒤 다시 게이트를 열었다.
시장의 집. 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침대.
시장을 냅다 던졌다. 출렁이면서 침대에 떨어졌지만 깨지는 않는다.
"하아."
게이트를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삽질. 삽질. 결국은 삽질이네.
결론적으로 얻은 건 없다. 시장은 아예 히어로와 빌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권한도 없고 접점도 없고 그냥 아예 언터쳐블이다.
그건 시장뿐만이 아니라 경찰청장이나 뭐 그 누구도 상관없다. 오로지 히어로는 히어로 협회의 지시만 따른다.
귀찮네. 정말. 결국, 원점이야.
빌런을 잡던지, 아니면 히어로 협회의 누군가를 잡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정말, 이놈들 이런 거 관리는 잘한단 말야.
하긴 국가 특수 조직 만드는 건 이골이 나 있는 놈들이잖아. FBI니 CIA니 뭐 그런 놈들.
이거라고 다르지 않겠지. 하아. 진짜 귀찮네.
일단 돌아가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미국에 와서 처음 본 광경들 때문에 이래저래 흥미가 생겼었지만, 쉬운 일이 하나 없어서 그런지 급격하게 관심이 식는다.
아. 가기 전에 하루카나 보고 가야겠다.
바로 순간이동. 음…. 별일 없네. 가면 이 새끼는 오긴 하는 거야?
멀리서 확인해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껴서 접근을 안 하는 건가? 조심성 많은 놈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잠이나 자야지.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적당히 준비하고 라스베이거스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날아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북동쪽? 동북동? 암튼 간.
다섯 시간쯤 날다 보니 눈 아래 커다란 도시가 나왔다. 간판을 살펴보니 덴버라고 쓰여 있다.
음. 그래. 그렇군. 별 감흥이 없다. 그냥 스쳐 지나간다.
저기에도 수많은 사람이 살아있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른 놈들도 있고 히어로도 있겠지.
근데 관심 끈다.
그래. 알아서 잘 살겠지. 이렇게 많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어.
하나하나 신경 쓰다간 내 할 일을 못 해. 지금은 무시하자.
또 다섯 시간을 날았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열 시간째 비행.
그래도 심심하진 않아서 이렇게 날 수 있는 거 같다. 날씨도 좋고. 볼 것도 많고.
조금 더 가니 엄청나게 큰 도시 하나가 나왔다.
시카고.
이야. 시카고!
여기도 가보면 많은 일이 있겠지. 많은 사연이 있고 많은 사람이 있고 암튼 그럴 거야.
무시. 무시한다.
저들을 한 번에 몰살시킬 방법이 없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넘어가자. 무시하자고.
이만큼 비행했으면 이제 쉬러 가야겠지만, 기왕 온 거 그냥 간다.
오늘 아예 뉴욕을 찍겠어. 뉴욕을 찍고, 수원에 있는 여자들을 던져놔야지.
해야 할 일은 해놓고 여유를 부리자. 궁금한 거, 알고 싶은 거는 그때부터 알아가도 충분해.
그렇게 집에서 나온 지 거의 16시간 만에 나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뉴욕까지의 주파를 완료했다.
거리로 3,500킬로미터.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무슨 트럭 운전도 아니고.
어쨌든 내 눈 앞에 펼쳐진 도시. 뉴욕.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는 아니겠구나. 가장 유명한 도시면 몰라도.
뭐가 됐든 도착했다는 게 중요하다. 정말 미친 짓이었어. 또라이 같은 짓이지.
지금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 100명을 잡고 물어봐도 99명은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할 거다.
'비행으로 한국에서 뉴욕까지 날아갔어요' 이런 소리를 한다면 대부분은 '에이 농담도' 이런 반응을 보일 거야.
그리고 진짜라고 그러고 보여주면 으아악 하고 소리 지르며 도망갈 거 같다.
존나 제정신 아니고 위험한 놈이 분명하니까.
뭐, 상관없다. 뭐가 됐든 일단 위치부터 저장한다.
아. 이제 이거 저장해놓은 것도 조금 정리 좀 해야겠네. 너무 중구난방이야.
자. 일단 저장은 했고. 그럼….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당연히 거기겠지?
어…. 적어놓은 거 봐야겠다. 어디 보자. 어디다 놨더라.
아. 여깄네. 맨해튼. 165 찰리 스트리트.
그렇게 그 장소를 찾아보는데…. 찰리 스트리트가 없다.
뭐지? 씨발? 왜 없어?
그렇게 한참을 찾아보는데, 결국 드디어 찾았다. 아 씹…. 찰리 스트리트가 아니고 찰스 스트리트구나.
Charles St. 를 찰리 스트리트라고 읽는 게 아니었어? 찰스 스트리트 였어?
어휴. 이래서 영어공부가 중요하다니까. 쓸데없이 고생했네.
뭐든 됐어. 찾았으니 됐지. 근데…. 여긴 인기척이 그렇게 많지는 않네?
대도시들을 다 훑어보고 왔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이곳은 기척이 적다. 없는 건 아닌데 적어.
그리고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내가 지난 5년간 맡은 냄새. 살인의 냄새?
뭐…. 한번 둘러보면 되겠지. 일단은 할 걸 마무리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