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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여자의 기억을 더 돌려본다.
이틀 전, 사흘 전, 나흘 전…. 근데 특별히 변하는 건 없다.
아무래도 가정주부라 단조로운 일상인 거 같네.
됐어. 여자는 그만 보고 그럼 남편을 보자.
남편의 기억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아침에 일찍 나와 차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향한다.
남자의 일터인듯한 곳. 사무실. 거기에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다시 차를 탄 뒤 교외로 빠져나간다.
주택단지인듯한 곳인데…. 거의 빈집인가보다. 집들 상태가 묘하게 안 좋다.
게다가 일부는 깨끗하게 밀려있다. 아마 해체하고 있는 듯한 모습.
남자의 직업은 그거였다. 해체업자? 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러면 건설업자인가?
작업을 보는 건 재미없기에 스킵스킵스킵. 어느덧 퇴근하는 남자. 집에 도착한 이후는 아까 여자의 기억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남자는 더 볼 게 없네. 더 단조로워.
이전의 기억도 본다. 역시 비슷한 일상. 계속 그 동네의 집들을 부수면서 쓸만한 것들을 추리는 모습.
근데 특이한 걸 발견했다. 남자가 시청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
세상이 망하기 직전의 시청이랑 다를 게 없어보인다.
아마 다들 손에 스마트폰 하나씩만 들고 있으면 위화감이 없을 것 같다.
시청에서 감독관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나는 모습. 뭔가 허가에 관련된 내용을 어려워 보이는 서류들을 보며 이야기한다.
정부가…. 작동한다고?
시청이란 건 정부의 기관이다. 그리고 뭔가 허가를 받는다는 건 결국 관리를 받고 있다는 뜻이고.
하긴, 여자의 기억에서 봤었지. 무려 돈을 쓰고 있다.
그래. 경제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지만 돈을 쓰고 있다는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망해버린 세상에서 돈,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달러가 그대로 쓰인다는 건 그 돈의 화폐 가치를 누군가가 보장해준다는 뜻.
그리고 그건 당연히 정부일 거다. 미국 정부. 이 미친놈들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SG 시티에서도 봤으니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고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이해했다.
그래. 불가능한 건 아니지.
물론 SG 시티는 50만 정도 되는 작은 도시라고 하지만 어쨌든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SG그룹이 총력을 다해서 유지하고 있는 도시. 그래 대기업 정도면 50만 도시 하나는 유지할 수 있어.
그렇다면 미합중국 정부라면 이렇게 망해버린 세상에서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아무런 문제 없이 이렇게 평화롭게? 마치 21세기와 80년대를 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남자의 5년 전의 기억을 뒤져본다. 그날의 기억이 있을 거야.
물론 과거로 갈수록 기억이 흐려져서 제대로 안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해 본다.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억들. 그렇겠지.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의 그 강력했던 기억이 사라질 수는 없지.
눈앞에 뜬 메시지. 어리둥절한 모습. 그리고 죽어버린 스마트폰, TV, 그 외의 통신들.
근데 묘하게 침착하다. 밖에서 사고 나는 소리가 나고 남자는 허둥지둥 자신의 가족들을 챙긴다.
마치 재난 물 영화의 초반 장면 같다.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남자. 아들을 붙잡고 혼란에 빠진 여자.
지금보다 훨씬 어린 아들.
그리고 그 이후 기억은 상당히 끊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어찌 됐는지 알 수 있다.
이들에겐 세상이 망했다는 메시지는 허리케인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엔 패닉이었지만 그건 순간이었을 뿐.
혼란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재빠르게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난 사고 같은 건 그리 많지 않았다.
70세 이상의 운전자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빈 차가 집이나 상점을 들이박은 정도니까.
그리고 각 집에서 사라진 노인들의 빈자리. 그런데 이 집은 그런 노인이 없었기에 그렇게 혼란스럽진 않았다.
조심히 상황을 확인할 뿐. 그리고 의외로 빠르게 정상으로 복귀한 일상.
이걸 이렇게 쉽게 복귀한다고?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긴 했었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사람들이 광분하면서 옆 사람을 때려죽인 건 아니니까.
분명 우리나라도 일상으로의 복구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지.
갑자기 생긴 힘과 죽으면 시체가 사라진다는 그 간단한 조합에 우후죽순처럼 벌어지는 사건·사고.
게다가 통신이 사라진 덕분에 사람들은 어떻게 상황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나 또한 그랬고.
우리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서로를 죽이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있었다.
생판 모르는 타인, 거세되어버린 도덕성, 살인의 편의성.
고삐는 너무 쉽게 풀렸고 지켜야 할 가족들은 적었다.
서로를 죽이는 데 망설이는 자는 죽임당했고 뻔뻔한 자들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들의 기억에는 그게 없었다.
사회는 원래대로 돌아갔고 이들은 조심스럽게 주변의 이웃들과 정보를 나눴다.
스킬의 위험성과 현 상황에 대해서.
남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총기를 자유롭게 휴대할 수 있는 나라라서 그럴까?
그들에게 공격 스킬은 총기와 다를 게 없었다. 위험하지만 안 쓰면 되는 무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기.
그게 우리와 다른 점이었을까?
우리는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거에 실감이 없었지.
총기사고는 흔한 일이 아니었고, 우리에게 죽음은 교통사고나 자살, 병에 의한 죽음이 훨씬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익숙했나 보다.
손바닥만 한 죽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향해 남발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그래. 그게 가장 큰 차이었던 거였어.
매일 봐오며 농담하던 이웃, 언제든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무기, 최소한의 방어, 치안을 믿기보단 자신을 믿는…. 그런 세상.
단지 불편한 건 야구 경기를 못 본다는 것, 전화를 쓸 수 없다는 것, 검색을 바로 하지 못한다는 것, SNS에 사진을 바로 못 올린다는 것. 그런 것. 단지 그 정도.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나라에 따라서.
그 강대한 미군. 수많은 병력과 화기, 군대가 사라졌고 치안이 공백이 됐지만, 이들은 원래 그런 거에 기대는 삶이 아니었던 거다.
자신들의 삶은 자기가 지키는 나라였지. 불을 뿜고 화약 냄새를 내는 도구로.
그리고 그게 사라지고 스킬이 되었을 뿐이고.
신기하네. 신기해.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이들이 어떤 식인지를.
그래도 더 읽어봐야지. 다른 사람들도. 다른 집들의 인간들도.
아직 새벽이라 다행히 아침이 되려면 시간이 좀 있다. 그러니 옆집으로 가서…. 아. 이 집의 아들. 걔도 한번 읽어볼까?
온 김에 읽어보자. 이 녀석은 그 미국 특유의 샛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학교가 유지 된다는 게.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제어가 힘들다. 거기에 이정도 나이면 스킬 정도는 얼마든지 고를 수 있고 쓸 수 있다.
무엇보다 스킬이란 건 나이가 적다고 약하게 나가는 게 아니다. 맞으면 뒈지는 건 똑같지.
근데 어떻게 그걸 제어하지?
아이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게 쉽지 않을 텐데.
이미 자는 녀석에게 무효화와 수면을 갈기고 기억을 읽는다.
아침 식사. 노란 버스. 학교. 평범한 수업. 뭐…. 볼 건 없네. 그렇게 넘어가는데 아이들의 대화에서 뭔가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블루 휩? 사이킥 큐? 썬더피어? 슈퍼히어로???
무슨 슈퍼히어로 코믹스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 들은 스킬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신경 써서 기억을 자세히 살펴보니…. 가관이다.
스킬을 쓰는 자경단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저런 이름을 쓰면서 활약했고.
하. 미친놈들. 돌아버리겠네. 누가 슈퍼히어로 좋아하는 미국 놈들 아니랄까 봐.
아니…. 어느정도는 이해가 갔다. 스킬을 잘 조합하면 그래…. 슈퍼히어로 같은 느낌이 나긴 하지.
하늘을 날고 특별한 스킬을 쓰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그래. 이해해. 이해할 수 있어.
근데 카드까지 만드는 건 정말 광기네. 미치겠다.
블루 휩은 파란색 코스튬을 입은 여자다. 채찍과 비행을 쓴다.
사이킥 큐는 염력과 비행을 쓰는 젊은 남자.
썬더 피어는 번개 주먹과 가속화를 쓰는 흑인 남자.
그 외에도 슈퍼히어로는 되게 많았다. 별별 컨셉으로.
근데 왜 스킬이 두 개씩밖에 없지? 라고 생각했는데 숨겨진 스킬도 있단다.
하 미치겠네. 그리고 그건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고 하고.
듣다 보니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이걸 이렇게 포장한다고?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
근데 또 생각해보니 묘하게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존재하고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국민이 각자 자기방어를 한다고 할지라도 부족한 건 있다.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지. 어쨌든 치안의 공백은 있으니까.
아무리 개개인이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한순간이다.
물론 누가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 모르니 함부로 지랄은 못 하겠지.
하지만 조금만 조사를 하거나 약간의 조합만 있으면 상대가 무슨 스킬을 가졌든 죽이는 건 금방이다.
게다가 시체도 안 남고 증거도 없다.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으면 땡이지.
그런 공백을 위한 자경대.
그것도 슈퍼히어로라는 이름을 덮어씌워 엔터테인먼트로까지 확장하는 그런 마케팅.
아이들에게 스킬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게 효과가 있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만하다.
물론 머리가 조금 굵어지면 소용없겠지만, 또 그런 녀석들에겐 아이였을 때는 몰랐던 다른 장면들이 보일 거다.
범죄자의 즉결처형. 그 미친 짓을 한다는 것.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저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어차피 세상은 한번 망했다.
이만큼 유지하면서 저 정도 일탈은 뭐 애교라고 볼 수 있지.
상당히 똑똑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죽기는 싫을 테니까.
직접적인 범죄 소탕과 범죄 예방, 스킬 남용 방지를 동시에 가능한 시스템.
분명 이건 지들이 재밌으려고 만든 시스템이 아니다. 분명히 모두가 동의하고 지방 정부나 나라 차원에서 운영하는 걸 거야.
안 그러면 당위성이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네.
근데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거다. 고작 스킬 두 개? 슈퍼히어로가?
말이 안 된다. 두 개라니. 장난치나.
그래. 뭐 숨겨진 스킬도 있다고 하니 꼴랑 두 개는 아닐 거다.
두 개로 슈퍼히어로면 스무 개 있는 나는 뭐 씨발 우주 대마왕인가?
아마…. 세네개? 더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잘 숨기면서 쓰다가 적당히 가져다 붙이겠지.
그편이 훨씬 그럴듯하다. 그래. 모든 능력을 다 밝히는 건 웃기지.
주력 컨셉스킬 몇 개만 오픈하는 게 맞지.
근데 그렇다 해도 너무 적다.
사망자가 적어서 전체적인 수준이 떨어지려나?
웃기는 세상이다. 사람이 코인을 쓰지 않고 죽어야 코인 수급이 되고 누군가가 강해진다.
SG 센터의 존속이 가능한 이유가 그랬지. 코인 제로. 죽일 이유를 없애버린 것.
그럼 이들은? 코인이 있나? 기억으로 읽고 싶었는데 키워드로는 힘드네. 깨워서 매혹으로 물어봐야 하나?
뭐가 됐든 좀 시시한 느낌이 든다. 뭔가 그럴듯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슈퍼히어로…. 그래. 그건 좀 웃겼다. 나쁘지 않았어.
근데 이게 다라면 실망할 거 같다. 뭔가 더 있겠지? 분명히 있을 거야. 그게 뭔지 몰라서 그렇지.
어쨌든 더 알아보자. 다행히 인간은 많으니까.
몇 집만 더 돌아보면 알게 되겠지. 이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의 실체를.
그렇게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될 때까지 기억들을 읽어봤다.
근데…. 없다. 평화로운 세상. 그럭저럭 굴러가는 평화.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없고 쓸 수 없는 과학 기술이 몇 개 없는 것 말고는 예전과 다를 게 없는 세상.
너무나 깔끔한 게 오히려 수상하다. 조오오오오온나 수상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아마 내가 스킬에 대해서 많이 몰랐고 다른 나라들을 안 가봤으면 이런 의심은 하지 않았었을 거야.
하지만 아니다. 이건 아냐.
의심을 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그림같이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미국인데 고작 이 수준이라고?
내가 여자관계에 눈치가 없는 건 인정하지만, 이런 일에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남녀관계에 병신 호구는 맞지만…. 스킬과 사람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그 수준은 아니라고.
구린 냄새가 난다. 상당히 흥미로워.
이 상황을 보면 오히려 짱개놈들이나 러시아가 자연스럽지.
자국민의 고혈을 빨아가며 유지하는 짱개들.
지방 사람들이나 민간인들은 뒤지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쓰고 자신들의 성세를 이어가려는 러시아의 갑부들.
그래. 그게 좀 더 자연스러워. 그게 인간이지.
여기도 뭔가가 있을거야.
교묘하게 가려놓은 평화 뒤에 나동그라져있는 추악한 무언가가.
원래 음모하면 또 빠질 수 없는 게 미국이잖아?
어쨌든 당분간은 심심하진 않을 거 같다.
그렇게 궁금했던 미국이 뭘 감추고 있는지 살짝 들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