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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역시 복잡한 일들을 모두 끝내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더없이 평안한 아침. 잠을 깼을 때 상쾌함이 느껴지는 건 참 고마운 일이야. 급할 게 없는 느긋한 하루.
비행만 몇 시간 하고 하루카만 슬쩍 보고 오면 되잖아? 어차피 수원은 당분간 안 가도 되니까.
습관적으로 탐지를 돌린다. 각자의 방에 있는 승희와 세아. 그리고 밖에 있는 건 미나 일 거고.
안나는 또 없네. 출혈 숙련 때문인가?
"뭐해?"
승희의 방으로 가니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다 나를 보고 웃는 승희.
"아. 잠금 해제 숙련이요."
"아아. 스마트폰으로 하는 거야? 중급인가?"
"네."
"근데 이런 아침부터 숙련하는 거야?"
"조금 해두게요. 그게 낫지."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네. 아 참. 어젠…. 고마웠어."
내가 말하자 승희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흐음. 진짜 고마운 거 맞아요? 맨입으로?"
"아이고. 이걸 뭐로 보답해야 하나."
"흠흠. 그럼 와서 찐하게 키스 한 번 해봐요."
"어? 이건 나한테 포상인데?"
그러면서 승희에게 다가갔다.
스마트폰을 옆에 내려놓고 내 목에 팔을 감는 승희. 서로의 입술이 닿고 혀가 얽힌다.
잠깐 이어진 키스. 아. 아침부터 불끈불끈하게 될 정도네.
"이거 뭐에요?"
그러면서 내 물건을 쓱 만지는 승희.
"어어. 그러면 아침부터 못 참는데."
"이크. 그러면 안 되지. 만지지 말아야겠다."
승희가 손을 거두자 아쉬운 느낌이 든다. 쩝. 어쩔 수 없지. 느긋하게 하자.
"계속 방에 있을 거야?"
"네. 지금은요."
"알겠어. 난 나간다?"
"넹."
승희의 방을 나와 세아의 방 앞에서 고민한다. 들어가? 말아?
"들어오지 마."
방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뭐야. 탐지 썼나?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에 들어온 나를 노려보는 세아.
"뭐야. 내 말 씹는 거야?"
역시나 무시하고 침대에 기대 반쯤 누워있는 세아의 옆에 앉았다.
"싸우자는 건가?"
"미안."
내가 사과로 시작하자 입을 다무는 세아.
"화났겠지. 근데 내가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모르겠네."
"눈치도 없고. 정성도 없고. 어쩌자는 건지."
투덜거리는 세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안아줄까?"
내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세아.
"나가. 나가. 나가라고."
발로 내 엉덩이를 밀며 말한다. 음. 어쩔 수 없나. 하긴, 이렇게 들이대서 해결될 리가 없지.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줘."
"내가 필요한 건 오빠가 나가는 거야."
그렇게 방을 나왔다. 뭐, 말을 걸어주는 게 어디냐. 솔직히 이정도만 돼도 고마운 거지.
벙커 밖을 나오자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펑 하고 터지는 소리, 와장창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 미나가 주변을 초토화하고 있는 거겠지.
"잘 돼 가?"
"아. 오빠."
나를 보고 웃어주는 미나. 진짜 고마운 여자. 분명…. 세아만큼 화가 났어야 정상인데 미나는 그런 기색이 없다.
"어…. 미안. 그리고 고마워."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미나. 봄날 아침의 따듯한 바람이 미나의 머리를 살짝 나부낀다.
그야말로 화보 같은 모습. 맙소사. 어떻게 이런 애가 내 눈앞에서 이렇게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건지.
"그래도 감동했어요. 영원히 말 안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나는 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죠.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의심을 남긴 채."
미나의 말이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한 게 다행이네.
"그렇다고 해서 오빠가 잘한 건 아니에요. 알죠?"
"어? 어. 당연하지. 나도 양심이란 거 있지."
있던가? 솔직히 자신 없네. 잘 뒤져보면 닳고 닳은 한 조각 정도는 나올 거 같기도 하고.
그런 비루한 양심을 가진 나라도 미나는 웃으면서 봐준다.
아. 분에 넘치네. 이래도 되나 몰라.
"근데요."
"어?"
"매혹. 나도 써봐요."
"어?"
"어제 세아에게 매혹 썼잖아요?"
"응…. 그랬지?"
"별 차이 못 느꼈죠?"
"어. 걸리긴 걸렸는데. 잘 모르겠더라고."
"짐작 가는 게 있어서요. 써봐요."
잠시 미나를 바라보다가 스킬을 쓴다.
"매혹."
미나에게 뜬 시간. 매혹은 확실히 걸렸다.
미나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근데 그건 매혹에 걸린 여자가 웃는 부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니다.
옅고 온화한 웃음. 억지로 만들어진 웃음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아름다움.
"그렇네요. 내 생각이 맞았어요."
"어?"
"세아는 이미 매혹에 걸린 것만큼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네요. 그리고 저도."
"아…."
"이제 풀어줘 보실래요?"
"응. 무효화."
미나에게 걸려있던 매혹이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느껴보는 그녀. 그리고는 웃는다. 방금 지었던 것과 똑같은 미소.
"스킬이란 거 별거 아니었네요. 적어도 매혹은 내가 이긴 거 같아요."
당당한 미나의 말에 가슴이 저미듯이 아픈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도.
하. 참나. 봄바람 이새끼. 아직도 미세먼지 같은 걸 옮기나? 왜 이리 눈이 따가운 거야. 정말.
그렇게 미나에게 감동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안나가 날아온다.
나와 미나 둘 다 안나를 바라봤고 덤덤한 미나에 비해 나는 깜짝 놀랐다.
"어!? 안나? 그 피는 뭐야? 아. 동물 피인가?"
"맞아요. 썽철. 근데…. 울었어요?"
"엥? 무슨 소리야."
"아니. 눈이 촉촉해서."
"아. 바람 때문에. 눈에 뭐 들어갔나 봐."
윽. 이런 구태의연한 표현을 쓸 줄 나도 몰랐는데.
맙소사. 평소엔 몰랐는데 막상 닥치면 이런 표현을 진짜 쓰는구나. 어휴.
"출혈 숙련하고 온 거야?“
말을 돌릴 겸 안나에게 물어본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나의 시도가 눈에 뻔히 보이지만 안나는 웃으며 받아준다.
"네. 번거롭네요. 숙련 한번 하러 산을 뒤져야 하는 건."
"으음. 그러게. 그렇겠네. 근데…. 옷은 빨리 갈아입어야겠다."
"그쵸? 누가 보면 뱀파이어나 마녀라고 생각하겠죠?"
안나의 옷, 소매, 앞쪽과 바짓단. 피가 잔뜩 묻어있는 모습이 조금 섬찟하다.
사람을 죽이면 피가 사라지는 세상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 막 연쇄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 같았을 거야.
"근데."
"네."
"출혈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스킬인가?"
"글쎄요. 저도 의문이에요. 데스 윈드 때문에 배우고 있긴 한데…. 이게 대체 왜 있어야 하는 스킬인지 모르겠네요."
"효과가 뭐야? 정확하게?"
"상대를 맞추면…. 피가 나요. 끝."
"끝? 그게 다야? 그냥 출혈 과다로 죽이는 용인가?"
"하급일 때는 주르륵 흐를 정도였는데 지금은 쓰면 처음에는 팍하고 뿜어져 나올 정도는 돼요."
"어…. 그래? 그래서 니 모습이 그렇구나. 지금 고급이야?"
"네."
"마스터 하면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건가."
"으…."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떠는 미나.
안나는 그런 미나를 보며 싱긋 웃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럼 옷 갈아입으러 들어갈게요."
"어. 그래. 아. 그럼 나도 볼일이나 보고 와야겠다."
내 말에 미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밥 안 먹고요? 밥 먹고 가죠?"
"수납에서 대충 꺼내서 먹지 뭐. 그럼 바로 다녀올게."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미나와 안나가 손을 흔들어 줬고, 나는 바로 순간 이동했다.
바다 한복판. 앞으로 미국까지 남은 거리는 2천 킬로 아래.
오늘 내일만 부지런히 날면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지만…. 오늘 밟아볼 생각이다.
원래의 계획은 성연과 신영을 잘 기억 조작해서 서부에서부터 함께 가며 동부까지 쭉 훑는 게 목적이었다.
미국 사정도 알고 그 여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킬도 배우게 해주고…. 기회 봐서 섹스도 존나 하고.
하지만 어제의 그 일로 생각이 다 바뀌었다.
그냥 예전에 성연이 아들과 있었던 뉴옥에 떨굴 생각이다.
아들을 찾든 양키 남자친구를 만들든 그건 알아서 하라고 하고 그냥 손을 놓을 생각.
나에대한 악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방생하는 게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그거야 뭐 지속적인 모니터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여기저기 떠돌아다녀 버리면 문제가 되겠지만 안되면 발신기라도 붙여버리지 뭐.
그 정도는 SG에 가면 구할 수 있겠지.
상당히 안일한 느낌이지만…. 더는 손대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게 내가 했던 일을 모두 말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복수심을 가지게 하려고.
그런 복수심이 있으면 어떻게 돼 있을지 모르는 미국 땅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
뭐, 의지와 실력이 비례하는 건 아니라 금방 누군가에게 잡혀서 한국산 암캐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건 뭐 가봐야 아는 거고.
어쨌든 미국 땅을 향해 빠르게 비행한다.
아메리카. 기회의 땅. 대체 그 땅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이게 가장 궁금하다. 세상이 망한 이후 과연 천조국은 어떻게 되었을지.
명색이 미국인데 허무하게 망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 러시아에선 발레도 보고 짱개들도 살아남아 있는데 미국이라고 안 그러겠어.
열 시간의 비행.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걸 해냈다. 한국 시각으로는 저녁 7시. 하지만 이곳은 깊은 새벽인듯한 시간.
그리고 저 멀리에 보이는 아주 익숙한 다리.
저거…. 금문교인가 그거잖아? 그럼 여기는 샌프란시스코라는 이야기고.
크. 제대로 왔네. 목적지랑 크게 벌어진 건 아니야.
사실 LA를 목적지로 잡고 오긴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정도면 뭐 크게 차이 안 난 거지.
500킬로 정도? 소박하네.
후우. 근데 미국 땅을 보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거 같다.
아니, 사실 대단한 일 맞지. 세상이 망하고 비행기도 없는 이런 세상에서 대체 어떤 미친놈이 비행으로 태평양을 횡단했겠어.
대단한 거 맞을 거야. 나 말고 이런 일을 한 새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어쨌든 이렇게 도착했으니 미국 땅을 밟아봐야지. 바로 육지를 향해 다가간다.
서서히 다가오는 미대륙. 탐지를 켜고 새벽녘의 해안가로 다가간다.
근데…. 씨발. 이거 뭐냐. 탐지 고장 났나?
기척. 엄청나게 많은 기척이 느껴진다. 이게…. 말이 돼?
금문교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 시야 아래 잔뜩 있는 주택가.
그리고 그 집집마다 가득가득 느껴지는 기척들.
어이가 없다. 아니. 이렇게 기척이 많다고?
일단 땅으로 내려갔다. 뭔가 황당한 첫 상륙이 되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눈앞에 반듯반듯하게 구획 지어져 있는 주택가. 그런 블록마다 가득 찬 집.
모든 집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빈집도 제법 있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집이 더 많았다. 이게 되나? 이거 맞나?
아니. 물론 SG 시티도 봤고 짱개들도 봤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 건 뭐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근데 분위기가 다르다. 뭔가…. 평온해.
새벽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여기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러한 느낌이 든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평화로움. 위협당한 적 없는 평온함. 그런 거.
이럴 게 아니지.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일단 탐지. 가장 가까이 있는 집안에 느껴지는 세 명의 기척.
투시를 써서 안을 바라본다.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부부. 2층 방에 잠들어 있는 남자애 하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전형적인 미국의 주택. 딱 그 느낌.
페이즈 아웃을 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해제.
모든 버프를 다 켜고 조용히 부부의 침실로 들어간다.
무효화. 그리고 수면 두 방. 가까이 붙어서 바라본다.
살집이 좀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 역시 조금 통통한 금발 여자.
아. 기왕이면 조금 젊은 여자가 있는 집으로 올 걸 그랬나? 그래도 기왕 왔으니 하자.
바로 여자의 곁으로 가서 기억을 읽는다. 일단…. 어제의 기억부터.
아침, 그의 아들을 깨우고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준 여자. 남편은 일찍 나갔다. 곧이어 아들도 가방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간다.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집안 정리를 하는 여자. 그렇게 간단하게 집 청소를 마친 여자는 차를 끌고 마트에 간다.
마트??? 식료품을 사면서 한숨을 쉬는 여자. 뭐가 맘에 안 드나 보다. 그렇게 돈을 계산하고…. 돈???
집으로 돌아온 여자. 다시 라디오를 들으며 식물들에 물을 준다. 벨 소리가 나고 찾아온 옆집 여자.
둘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이게 뭐지. 드라마인가???
스킵스킵스킵. 빠르게 뒤로 넘겨본다.
어느새 저녁을 준비하는 여자. 남편이 돌아오고 아들도 돌아오고 저녁 식사를 하고…. 이게 뭐야?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분명 이건 어제 있건 기억이다. 이 여자의 기억. 실제로 있었던 하루.
대체 내가 뭘 본거지? 이거…. 세상 망한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