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20화 (52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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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상당한 후폭풍을 예상했던 나였다.

어쩌면 미나와 세아가 잠깐 시간을 달라고 하고 벙커에서 나가서 따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벙커는 여러 군데 있으니까. 아니면 내가 나가 있을 수도 있고.

근데 승희의 도움으로 정말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미나가 매혹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도, 이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랐다.

하아. 역시. 세상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아.

내가 저들을 너무 무시한 거다.

내 마음대로 거두고 내 품 안에 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닌데.

존중이 부족했어. 대화도 부족했고.

그래도 이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물론…. 미나와 세아에게 따로 사과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둘러앉아 먹은 저녁 식사. 무난하고 깔끔하게 넘어간 시간.

미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웃었다.

세아랑 마주쳤을 때는 살짝 노려봤고.

뜨끔하긴 했지만 뭐…. 저 정도는 몇백 번도 받아줄 수 있지. 노려본다고 뭐 뚫리는 것도 아니고.

"나. 또 다녀올 곳이 있어서."

내 말에 식탁을 치우던 여자들이 나를 일제히 바라본다.

"조심히 다녀와요."

승희의 말에 다들 잘 다녀오라고 한마디씩 해준다.

승희 쟤는 은근히 리더기질이 있단 말야. 신기해. 미나나 안나는 어린데도 말이지.

역시 짬에서 오는 바이브라 이건가.

바로 순간 이동.

내가 온 곳은 멀티 벙커. 아까 재워둔 성연과 신영이 있는 곳.

오늘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지만, 아까 미나와 승희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게 있었다.

스킬로 만들어 낸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그 말.

내가 본 바로는 아니다. 기억 조작은 다른 스킬로도 해제되지 않는 완벽한 작업.

사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쓰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스킬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영원한 건 없어. 영원히 속일 수도 없고.

멍청한 짓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 그게 맞지.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

그렇기에 다시 왔다. 이 여자들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서.

물론 지워버린 기억을 어떻게 돌릴 수는 없다. 어딘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진실을 알려주는 것.

스킬로 덧씌우는 게 아닌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

작업하고 있던 기억 조작들을 전부 지우기 시작했다.

조작에 비해 기억을 지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게 다행이다.

어차피 그날 이후의 기억은 다 지워버리면 되니까. 그저 체력만 소모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작업.

전부 지웠다. 결국, 고성연과 최신영에겐 나와 연관된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이들이 봤을 땐 나는 완전 남. 전혀 모르는 사람.

게다가 이들에겐 그날의 기억도 없다. 자신의 남편과 시아버지, 오빠와 사용인들이 죽은 기억조차 없어.

그걸 말하는 것은 나의 몫. 내가 한 짓이니 내가 말해야지.

수원 벙커의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염력으로 두 여자를 동시에 들었다.

둘 다 날씬해서 이게 가능하네. 하긴 둘이 합쳐도 절대 100킬로는 안 넘겠지.

그렇게 게이트를 넘어와 인공 정원 앞에 둘을 눕혀놓는다.

그리고 게이트를 닫고 한숨 한번을 쉰 다음 무효화를 썼다.

"으음."

"음…."

알몸으로 잠에서 깬 두 여자.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의 몸을 바라본 뒤 깜짝 놀란다.

"반사 있으니까 매혹 걸 생각하지 말고 가서 옷 입고 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성연과 신영.

자신의 알몸을 손으로 가리는 모습. 이런 상황에서도 그게 먼저니?

내가 몸을 돌리자 두 여자는 주춤거리며 일어나더니 재빨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인공 정원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아 여자들을 기다린다.

맨날 최신영이 앉아있던 자리. 인공 정원이긴 하지만 볕이 가장 좋은 자리.

얼마 뒤 신영이부터 방에서 나왔다.

잔뜩 나를 경계하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여자.

웃긴다. 저들의 마지막 기억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벙커 안쪽에서 왕처럼 살던 기억이다.

하지만 눈치가 있는지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느끼나 보다.

뒤를 이어 바로 나오는 성연. 그녀 역시도 잔뜩 경계하고 있는 모습.

"와서 앉아. 서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게다가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떤 게 가장 나은지 판단할 줄 안다.

게다가 저 둘은 그나마 똑똑한 인간들이지. 적어도 골빈년들은 아니니까.

내 앞 의자에 앉은 성연과 신영.

간단한 복장들. 몇 번은 봤던 옷들. 하지만 눈빛이 다르다. 표정도. 분위기도.

"무슨 상황인지 궁금할 거야. 지금부터 이야기 해줄 테니 잘 들어. 질문은 바로바로 해도 되고."

"당신은 누구죠?"

성연의 질문. 성격이 급하시네. 질문하라고 하니 바로 하고.

"좀 듣고 질문하지?"

내 말에 입을 다무는 성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연다.

"최치호 회장, 최정규 상무, 최정렬 이사, 그리고 이 벙커에 있던 사용인들, 대호 그룹의 주력 부대…. 전부 내가 다 죽였다."

"!!!!"

"!!!?"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두 여자.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거다.

"너희를 안 죽인 이유는 너희가 가진 매혹 스킬 때문이야. 쓸모가 있으니까. 근데 이제 필요 없게 됐어. 그래서 말인데 선택지가 있어. 그냥 죽을래? 아니면 미국에서 니 아들 찾을래?"

"너어!!!!"

"뭐."

"그걸 어떻게…."

"너희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어. 너희한테 몹쓸 짓도 많이 했고. 고성연 너 하고도 꽤 많이 섹스했지. 최신영 니 처녀는 내가 가져갔고."

"미친 놈이!"

벌떡 일어나려는 성연을 염력으로 눌러 앉혔다.

자신의 몸이 제압당하자 깜짝 놀라는 성연. 혹시 몰라서 신영이도 붙잡았다.

뭐, 쟤는 일어날 생각은 없던 거 같지만.

"미국에 두고 온 니 아들. 찾고 싶지 않냐?"

입술을 깨무는 성연.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나기 시작한다.

염력으로 그녀의 입을 벌리자 성연이 소리를 지른다.

"어하응거야! 이거 어야! 나! 나 이 새꺄!"

"하. 제발 조용히 좀 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선택권마저 뺏기지 말고. 지금 니가 니 입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둘 중에 하나야. 지금 죽겠다. 혹은 미국 가겠다. 그거나 결정해."

두 여자를 잡고 있던 염력을 거뒀다.

다시 몸이 움직이자 자신의 턱을 만지는 성연.

독기에 차오른 모습도…. 섹시하네. 자빠뜨려서 개처럼 박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원하는 게 뭐야!?"

"없어. 니네한테 이제 원하는 건 없어. 그냥 쓸모없어진 너희들의 처리를 하려는데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을 뿐이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성연. 근데 신영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어본다.

"죽는 것과 미국 가는 거 말고는 다른 건 없나요?“

“어.”

"회장님과 상무님, 오빠는 전부 죽었다고요?"

"어."

"하아."

무기력한 모습의 신영. 그래. 저 여자는 두 달 내내 저런 느낌으로 여기 앉아있었지.

"아참. 잊은 게 하나 있는데 그 녀석들이 죽은지는 두 달이 지났어."

내 말에 깜짝 놀라는 두 여자.

"무슨 개소리를!?"

"이상하네. 성연이 너는 이정도로 입이 험하진 않았는데. 원래는 이런 여자였나?"

"닥쳐! 니가 나를 뭘 안다고 그래!"

"알지. 은행원 부모님. 차분한 학창시절. 인기도 좋았고 대학교에서 최 상무 만났고, 미국에 있는 아들을 놓고 온 거에 대해 미친 듯이 모든 것을 원망하면서 그저 운동에 몰두한 여자."

내가 읊어대자 흠칫 놀라는 모습.

아이고. 이거 아무리 봐도 그냥 변태 스토커인데.

"그러니까 너는 그냥 곱게 미국 가라. 그래야 혹시나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니 아들을 찾지."

"너…."

"저는 죽을래요. 안 아프게 죽여줄 수 있어요?"

담담한 최신영의 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바라봤다.

뭐 어쩔거냐? 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신영. 아. 존나 띠껍네. 저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나도 죽여. 너 같은 새끼 말 들을 바에야 죽고 말지."

독기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연. 어이구. 아주 쌍으로 지랄이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이 여자들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면 원하는 대로 되는 거고 여기서 굽히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지는 거잖아.

머리를 짚으며 잠시 고개를 떨궜다.

진짜 미치겠네. 역시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뭐 한다고 기억 조작을 관뒀을까? 그냥 하려는 대로 할걸. 어휴. 정말.

"이이익!"

어느새 죽도를 들고 나에게 휘두르는 성연. 하지만 그건 염력에 막혔다.

"바보냐? 내가 빈 틈투성이로 보여? 이 죽도는 또 어디서 났어. 아. 수납에 있었겠구나. 대단하네. 근데 기습을 하면서 소리 내는 사람이 어딨냐? 한심하게."

염력으로 죽도를 뺐어 던져버렸다.

그리고 성연을 잡아 허공으로 들어 올려 팔과 다리를 잡고 벌린다.

몸도 염력 네 개 정도로 붙잡아 꼼짝도 못 하게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연에게 다가갔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성연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브라가 거슬렸지만, 뭐 그 정도야 상관없지. 밑으로 넣으면 되니까.

"빼! 이 새끼야!"

악을 쓰는 성연과 겁에 질린 신영.

이번엔 염력을 뻗어 신영을 움켜잡았다.

"꺅!"

똑같은 방식. 염력을 나눠 이번엔 신영의 양팔과 다리를 잡고 벌렸다.

공중에 두 여자가 떠 있는 모습은 조금 무섭다.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근데 또 이보다 꼴리는 상황은 없지. 아. 염력 정말 좋네.

관음에 면간만 하던 내가 이젠 속박 플레이도 가능하고 말이지.

"훠이!"

"이익!"

"꺄악!"

한번 겁을 주자 이를 악무는 성연과 소리를 지르는 신영.

"에휴. 이래놓고 뭘 죽니 어쩌니…. 웃기네 정말."

성연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이번엔 신영의 쪽으로 간다.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

"매…. 매혹!"

"아. 그거 하지 말라니까."

매혹이 반사되어 자기가 걸린 신영.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으. 소름 끼쳐. 이젠 진짜 매혹 이건 정떨어지네.

두 여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차마 내팽개치지는 못하고 제법 정중하게.

바닥에 내려 놓이고 자유를 되찾자 자신의 손목을 잡으며 나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성연.

반한 표정으로 나를 뜨겁게 바라보는 신영.

무효화를 썼다. 그리고 바로 반사를 쓴다.

신영은 매혹이 풀리자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바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뀐다.

"나흘 뒤에 다시 올 거야. 그때는 바로 미국에 보내주겠어. 그러니 그때까지 남아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아. 여기는 폐쇄됐으니까 어디로 도망은 못가. 그러니 남아있기 싫으면 자살이라도 해야 할 거야. 그건 뭐 알아서 하시고."

그리고 수납을 열어 바닥에 음식을 떨궜다.

그냥 닥치는 대로 음식을 내놓는다. 뭐 먹는 건 알아서 골라 먹겠지. 배고프다면.

"그럼…. 잘 자라. 나흘 뒤에 보자."

무효화와 수면 두 방. 그대로 쓰러지는 두 여자.

친절하게 방에 눕혀줄까 하다가 관뒀다. 그 정도까지 해줄 필요는 없지.

페이즈 아웃을 쓰지 않고 비상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잘 썼던 토사 더미를 찾아갔다.

거기로 가서 또 수납에 흙을 잔뜩 담았다. 수납 크기가 커져서 이제 한방이면 되겠네. 어휴 편해라.

지난번에 기껏 열심히 뚫어놨던 비상 통로. 거기를 다시 막았다.

이게 무슨 개 짓거린지. 어휴. 수납 없었으면 절대 안 했을 짓이다. 그래도 금방 끝나니 다행이네.

흙으로 통로를 다 막았으니 됐다.

이제 앞으로 나흘. 그 이후면 이 여자들도 더는 볼일 없겠지.

나흘 뒤에 왔을 때 두 여자가 안 보이면 그것도 엄청 찝찝할 텐데.

근데 내 생각엔 저 둘은 자살할 리가 없다. 적어도 성연은 자살을 안 할 거다. 자기 아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모르지. 생각보다 강단 있을지도. 그것까진 확신할 수가 없네. 뭐…. 나흘 뒤에 와보면 알겠지.

이제 돌아가자. 아. 아니다. 하루카나 보고 가자.

5월도 됐는데 날마다 확인은 해야지. 언제 그 가면 놈이 올지 모르니까.

바로 홋카이도로 순간 이동. 그리고 바로 탐지.

기척이 잡히는 건 역시 하나. 천리안과 투시로 하루카가 뭐 하고 있나 바라본다.

아. 자네. 벌써 자는 거야? 바른 생활 아가씨야.

자고 있으면 뭐 할 게 없지. 근데 이 가면 새끼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더는 볼일이 없으니 바로 집으로 순간 이동했다.

하. 피곤하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그래도…. 속은 시원하네. 골치 아픈 일들은 다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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