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19화 (51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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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쾅!

"나는! 나는 몰랐어!"

탁자를 내려친 세아.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표정.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나는…. 나는 모르겠어. 내가 매혹에 걸렸었다고? 내가 오빠를 좋아한 게 매혹에 걸려서라고!?"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 누구라도 매혹에 걸렸다고 말하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걸어봐!"

"뭐?"

나를 보고 다짜고짜 외치는 세아.

"나한테 걸어보라고! 매혹! 지금도 쓸 수 있잖아!"

"매혹."

내가 진짜로 걸자 다들 깜짝 놀라는 분위기.

하지만 정작 매혹에 걸린 세아는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이거 건 거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시간은 떠 있다. 23시간에서 22시간 59분으로 바뀐 걸 봤으니까.

근데 세아는 나를 보고 웃지도 않았다. 원래 매혹에 걸리면 나를 보고 활짝 웃는데.

"확실한 거야? 뭐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러네. 내가 봐도 그래."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원래 세아는 매혹에 걸렸어도 엄청 츤츤거렸지.

개인 내성이라는 게 있는 건가? 불면증에 걸린 내가 수면에 바로 안 당하는 것처럼?

"풀어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

"무효화!"

세아의 머리에 떠 있던 시간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한 표정의 세아.

"나 참.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네!"

"세아야."

미나가 조용히 부르자 세아는 바로 그쪽을 바라본다.

"내가 왜 아까 매혹 지속시간을 물어봤는지 알아?"

"엉?"

"그때 내가 승희랑 너를 처음 만난 날. 그날 이전까지는 오빠랑 함께 살던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럼 그 전까지 날마다 만났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래. 자주 만난 건 아니지? 그럼 오빠를 만나지 않은 날 오빠를 생각한 적 있지?"

"어…. 있지?"

"그때는 어땠어? 그때는 오빠를 어떻게 생각했지?"

"어? 그때? 그게…."

차분한 미나의 말에 세아는 골똘히 그때의 일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매혹의 지속시간은 두 시간이랬어. 그 말은 네가 오빠를 만나지 않았던 날 오빠를 생각했던 마음이 어땠는지 기억해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 세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탁자를 내려다보는 세아.

"미안하지만."

내가 말하자 다들 나를 바라본다.

"매혹은…. 상당히 잔혹한 스킬이야. 강제로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스킬이라고. 매혹이 풀어져도 그 사람을 좋아했던 감정이 남아있게 돼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미나 니가 말하는 건 틀렸어. 매혹이 누적되면 매혹이 걸려있지 않아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린다고."

내 말에 승희와 안나의 표정이 굳는다. 세아는…. 이미 내가 말해줬었기에 알고 있지.

근데 미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내가 틀렸다고 말했는데도 조금의 표정 변화가 없는 모습.

"누가 그러던가요?"

"응?"

여전히 웃는 얼굴의 미나.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혹시 오빠…. 당해 봤어요?"

"어? 당해 봤냐고? 매혹을?"

"네."

미나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매혹에 당했었나?

정세희. 내 손으로 죽인 여자. 그 여자가 나에게 매혹을 걸었었나?

생각이 안 났다.

누가 내 머리에 기억 삭제를 걸었나 보다. 아니. 기억 조작? 모르겠다. 왜 이렇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나지?

대학교에서 정세희 그년의 팔을 놨을 때, 그렇게 내 손을 떠나 자연과학대 옥상에 떨어졌던 그때.

내 머릿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모두 빼갔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근데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매혹이었을까? 그 정세희를 좋아했던 나의 모습은 매혹에 걸렸었던 모습이었을까?

아니다. 아니야. 나는 매혹에 걸린 적이 없다. 정세희는 나에게 매혹을 걸지 않았다.

그년에게 죽을뻔한 것도 사실이고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매혹은 안 당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매혹할 가치도 없었지. 그런 걸 걸지 않았어도 그년 옆에서 딸랑거렸으니까.

이제야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매혹에 당한 적이 없어.

내가 봐온 건 그녀 곁에 있으면서 매혹에 당한 다른 남자들을 지켜본 것뿐.

"아니. 당해본 적 없어."

세상에나. 내가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그럼 내가 매혹당했다고 생각했던 건 진짜 내 마음인가?

아니…. 세상이 망하기 전, 스킬이 생기기 전에도 정세희 그년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 그래. 그건 맞아.

하지만, 그 후에…. 매혹으로 증폭 당한 게 아니었어?

"당해본 적 없다면 알 수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런 스킬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건…. 내가 오랜 시간 생각했던 거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나만의 경우일 수도 있죠. 내 성격이 그랬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평생 그 매혹이 걸려있으면 모를까, 매혹이 풀렸을 때는 그 마음이 남아있지 않아요. 오히려 의심하죠. 반발하고. 자연스럽지 않으니까요."

내가 알고 있던 상식들이 박살 나는 느낌이다.

매혹에 대한 것.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그걸 제대로 모르는 병신의 착각이었다고?

“오빠는 분명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을 걸었을 거에요. 그렇죠?”

“...응.”

“어떻던가요? 그 사람들이 전부 매혹이 풀려도 오빠를 좋아하던가요?”

미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어땠지? 모든 여자가 나를 좋아했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분명 매혹이 풀렸어도 내가 좋다고 한 여자들도 있었다. 청평에 있는 지연이나…. 뭐 그런 애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매혹이 풀리면 돌아갔지. 원래의 증오하는 모습으로.

대부분이 그랬다. 그리고 그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

사실이기도 했고.

"세아. 네가 오빠를 만나지 않은 날에도 오빠를 생각하고 호의적인 생각을 했다면, 그건 네가 만들어낸 네 마음이야. 스킬 같은 거로 만들어진 감정이 아니고."

"내가 왜! 저런 오빠를…."

"그거야 모르지. 너도 나처럼 속으로는 망해버린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그건 결코 이상한 게 아냐. 아마….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미나의 말에 나도 세아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이라고?

그래.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겐 그게 승희니까.

물론 미나, 세아, 안나도 나에게 소중하다.

하지만 마나가 말한 구원의 의미라면 승희가 그런 사람이다.

망해버린 세상에서 발정 난 미친개처럼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나를 안정시켜준 사람.

이런 내 곁에 있어 줬고 나를 받아 줬으며 미나와 세아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고 안나까지 받아들인 여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아가 말한다.

"그럼…. 이 오빠가 나에게 매혹을 걸었던 건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아니.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지금 너는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세아.

저 녀석 얼굴 붉히는 거 봐라. 왜 설레냐. 저걸 보고.

"그게 답이야. 나는 스킬 같은 거로 지금 너의 그런 마음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

거기까지 말한 미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하. 미치겠네. 그렇게 미나를 봐왔지만, 지금처럼 눈부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나를 위해 항변해주는 걸까.

그게 사랑이라는 걸까? 나를 사랑해서? 매혹에 당해 봤었으면서도 그런 짓을 한 나를 위해 저렇게 열변을 토한다고?

"그래. 저 오빠가 그런 면이 있지."

갑자기 말을 꺼낸 승희. 모두가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저 오빠는 미친 사람 맞아.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지. 의심 많고 음흉하고 수단 방법 안 가리는 데다가 얍삽한 짓은 전부 하기도하고."

적나라하게 말하는 승희를 보며 다들 대단하다는 표정이지만 반박은 안 한다.

제길. 사실 나도 반박 못 하겠는데 다른 애들이 그걸 반박할 수야 없겠지. 젠장.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자기 품 안의 사람들은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니까."

웃긴 건 저 말에 미나와 세아,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다.

"난, 저 오빠가 우리한테 잘못할 짓은 안 했다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그래. 그리고 만약 했다면 이런 식으로 밝히지도 않았지. 더 음흉하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했겠지."

또 끄덕끄덕.

뭐지. 이 인정받는데 기분이 안 좋은 느낌은?

"게다가 아까 기억 조작? 그거 말한 것도 그 의도인 거 같아. 나는 이런 스킬을 하고 있다. 근데 너희들이 오해할까 봐 차마 말 못 했다. 게다가 매혹 쓴 전적도 있다. 근데 나는 이제 너희한테는 그런 거 안 쓴다. 믿어달라. 맞죠?"

승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뭐지? 내 마음이 읽히고 있는 이 기분은?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구나. 이제야 알겠네.

"저 오빠. 뭐랄까. 되게 단순한 사람이야. 방법이 많이 삐뚤어져 있어서 문제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일단…. 내가 봐왔을 때는 그래."

승희의 말에 완전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여자들. 와. 이거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되게…. 성추행범 누명을 썼는데 게이라서 무죄방면 받는…. 그런 느낌이네."

"오빠 게이야!?"

"풉."

세아의 말에 승희가 풉하고 웃어버렸다.

그건 미나랑 안나도 마찬가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

"아니! 비유가 그렇다고!"

"아. 난 또. 바이면 몰라도 게이는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

어쨌든 저 말도 안 되는 가스나 때문에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매혹을 걸었던 짓에 대해서 면죄부를 받아도 되는 건가?

"근데, 이 이야기는 왜 한 거예요? 아까 세아가 오빠 스킬 몇 개 물어봤냐고 물어봐서?"

"그게…."

잠시 말끝을 흐린다. 나를 보고 있는 여자들.

근데 이건 승희가 나에게 주는 기회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확실하게 하려고 일부러 꺼낸 거야.

그렇다면 그 기회를 잡아야지. 이렇게 코앞까지 떠먹여 줬는데 못 받아먹으면 그건 내 문제겠지.

"오래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쓴 적도 있다는 것. 게다가 기억 조작 스킬도 얻었고. 이 기억 조작이란 스킬은 지독해. 말 그대로 기억이 바뀌어버려. 어떤 스킬로도 원래대로 돌리지도 못해.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안할 거 같아서."

"그 스킬 마스터 했죠? 오빠 지금 염력 배운 거면 결국 마스터 했다는 뜻인데."

"맞아."

"그럼 누군가에게 썼겠네요. 6,250번이나."

"어…."

"어때요. 스킬은 완벽하던가요?"

"어? 글쎄. 스킬 자체의 효과는 제대로 돌아가지. 하지만 쉽진 않아. 다른 조건들을 맞추고 기억뿐만이 아니라 현실도 거기에 맞춰야 하고…."

"오빠는 우리의 기억을 완벽하게 조작할 자신 있어요?"

"글쎄. 간단한 거라면…."

"할거에요?"

"아니. 안 한다고 했잖아."

"조건도 맞춰야 하고 현실도 끼워 맞춰야 하고, 간단한 거 밖에 못하는데 우리에게는 안 쓴다면.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그렇…. 지?"

"됐어요. 그럼. 난 신경 안 써."

쿨한 승희의 말에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니 분명 그렇다니까? 저 오빠 성격상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냥 이렇게 와서 직진으로 들이박고 말걸? 그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 우리의 기억을 일제히 꼼꼼하게 바꿀 사람이 아냐."

"아."

"그렇구나."

"역시 씅희!"

승희 저거 분명 독심술을 쓰는 걸 거야. 아니면 내가 쟤한테 조종당하고 있다던가. 이정도로 파악을 당하고 있다고?

"암튼, 나는 그래요. 기억 조작은 신경 안 써. 매혹에 관한 건…. 그건 당사자들이랑 협의하세요. 미나 언니랑 세아에게 알아서 사과하시라고요. 근데 나한테는 어차피 시기가 안 맞아서 안 썼을 테고. 안나에겐 왜 안 썼어요?"

"나에게도 아마 쓸 필요가 없었을걸? 쓰나 안 쓰나 똑같이 좋아했을 테니까.“

의기양양한 안나의 대답. 쟤도 역시 무서운애야.

"그건 그렇겠지. 근데 그거랑은 별개로 왜 안 썼냐 이거지."

"그땐 내가 조금 정신 차릴 때여서…."

내 말에 다들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나를 봐?"

"오빠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조금 안 어울려서."

승희의 말에 또다시 수긍하는 여자들.

아. 이거 내 편이 없다. 하긴,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느냐마는.

"어쨌든. 미나 언니랑 세아는 더 할 말 있어요?"

"있긴 한데, 그건 오빠한테 따로 이야기할래."

"그래요. 그건 당사자들의 문제니까. 세아는?"

"어? 어. 나도. 따로 이야기할래."

"안나는 뭐 더 이야기할 거 없어?"

"저요? 저는 썽철에게 불만 있는 거 없어요. 그저 고마운 사람인걸요."

"으이그…. 그러면 안 돼. 저 오빠는 주기적으로 확인을 해야 한단 말야. 오빠. 이거 스킬 말고 다른 이야기할 거는 또 없어요? 뭐 숨기고 있다는 거라던가?"

그러면서 승희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승희를 따라 나를 바라보는 미나, 세아, 안나.

뭐…. 뭐지? 뭐야? 뭐 더 이야기 해야 할 거 있나? 내가 뭐 숨기는 거 있어? 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은 뭐야.

혹시 민희인가? 아닌데. 민희는 절대 알 리가 없는데.

"없어."

"흐음. 그래요. 없다고요. 알겠어요. 그럼 여기서 끝내죠? 불만 있는 사람?"

승희의 말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저녁이나 먹죠. 밥 먹을 시간 됐는데."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들. 그렇게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승희는 나에게 가볍게 윙크했다.

아. 정리해준 거구나. 은근히 몰아가면서 정리해준 거야.

크…. 그래.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얻은 가장 값진 건 결국 승희네. 승희야.

이거 뭐라도 거나하게 한번 해줘야겠네. 하아.

근데…. 진짜 뭐 알고 있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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