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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멀티 벙커.
성연은 침대에 누워있다. 그리고 신영은 공중에 떠 있다.
마술사의 공중부양 마술처럼 허공에 떠 있는 신영. 하지만 이건 시시한 눈속임 마술이 아니다.
염력.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
신영의 몸무게 정도는 얼마든지 이렇게 들 수 있다. 거기에 이런 장난질까지 가능하지.
살짝 벌어진 다리. 그리고 그사이를 파고드는 염력.
내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그 염력은 딜도 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 자지랑 닮았지.
그런 것이 신영의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말 그대로 무형 딜도.
"으음."
잠들어 있는 신영이지만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작게 신음을 흘린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내가 생각해도 존나 웃기네.
이렇게 한다고 나에게 오는 자극은 전혀 없다. 그냥 공중에 떠서 발정하고 있는 여자를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염력으로 신영의 보지와 똑같이 만들어서 거기에 쑤셔볼까? 거기에 맞춰서 무형 딜도를 쑤시면?
그러면 이게 블루투스 섹스인가? 미치겠네. 내가 제정신이 아니긴 한가 봐. 이런 짓이나 하고 있고.
공중에 떠 있는 신영을 내려놨다. 염력도 모두 치우고.
기억 조작 같은 건 할 엄두가 안 난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니까 그런 짓을 할 겨를이 없어.
별거 아닌 거로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당히 얼버무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내가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정도로 말빨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아.
근데 중요한 건 그러기 싫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
적어도 승희, 미나, 세아, 안나. 이 여자들을 속이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 더하면 민희 정도.
그렇기에 이렇게 고민하는 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신경도 안 썼지.
그런 거로 따지면 오히려 민희는 편하다. 그녀에겐 애초부터 거짓이 없었으니까.
스킬도 뭐가 있는지 다 말했고. 매혹의 존재도 알지.
기억 트리는 제대로 말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그 여자는 똑똑하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승희와 안나는 걸리는 게 없지. 결국은 미나와 세아가 문제잖아.
하아. 결국은 똑같은 고민을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다. 나 혼자 고민해봐야 나오지 않는 정답.
그때. 승희의 말을 듣고 미나와 세아를 벙커로 들였던 그 날. 그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정말 머리 빠개질 것 같았는데…. 결국은 잘됐지.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왔고.
멍한 상태로 누워있는 신영을 바라본다.
이미 기억이 난도질당한 여자. 마음껏 주물러진 여자.
불쌍하기도 하지. 나한테 이런 짓을 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여자였는데.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 당했다는 걸 눈치채놓고도 도망도 안 가고 있다가 나에게 다시 잡힌 여자.
왜 도망을 가지 않았지? 성연과 신영. 둘 다 멍청한 여자는 아니다.
나에 대한 의혹을 품었으면 도망부터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실이라도 알고 싶었나?
나를 기다렸다가 은근슬쩍 떠보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사라졌다.
자신들의 의문 자체도 지워졌지. 지금은 이렇게 그저 나의 장난감이 되어버렸고.
염력으로 성연을 들어 신영의 위에 포개놓았다.
그리고 조금 자세를 바꾼다. 자연스럽게 팔과 몸의 위치를 바꾸고 다리를 조금 움직여서 그럴듯하게 포개 놓는다.
모녀 관계는 아니지. 숙모와 조카 사이? 아니지. 당숙모와 종질녀? 뭐 그런 관계인가? 촌수로는 5촌이면 그렇게 부르는 거 맞나?
알게 뭐냐. 어쨌든 남보다는 가깝고 가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관계.
그런 두 여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야한 자세를 하고 있다.
저대로 깨우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질겁하겠지? 기억 조작으로 서로를 좋아하는 거로 만들어볼까?
그게 가능한가? 기억 조작으로 없는 애정을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성연을 들어서 침대에 내려놨다.
에휴. 뭐 하는 짓인지. 결국, 초조해하고 있는걸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 못 하고 있네.
시계를 봤다. 네 시. 아직 가기엔 이르다. 이른데…. 더는 못 기다리겠다.
성연과 신영에게 수면을 한 번씩 더 걸고 문을 닫고 잠갔다. 그리고 순간 이동.
벙커로 돌아와서 바로 탐지를 돌린다. 거실에 모여있는 네 여자. 잘됐네. 바로 문을 열고 나겠다.
"아. 왔어요."
승희가 나를 반기고 다른 여자들도 나를 보며 인사한다.
세아만 조금 굳은 표정이네. 미나는? 의외로 밝은 표정이고.
내 자리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네 여자.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내 스킬은 스무 개야."
뜬금없는 내 말이지만 말없이 듣는 여자들.
"수면, 탐지, 매혹, 반사, 무효화, 투명화, 비행, 페이즈 아웃, 수납, 회귀, 블링크, 순간 이동, 게이트, 파티에 천리안. 투시. 아. 되게 많네. 그리고 거기에 기억 읽기, 기억 삭제, 기억 조작. 마지막으로 배운 염력."
줄줄이 스킬을 열거하는 내 말에 다들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 신기하지? 나도 신기해. 스킬 참 드럽게 많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다름 아니라 매혹과 기억 스킬들 때문이야. 매혹은 너희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끔찍한 스킬이야. 이성에게 쓸 수 있고 매혹을 당하게 되면 당한 사람은 건 사람을 아주 좋아하게 되지.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야. 당장이라도 몸을 주고 싶을 정도가 되니까."
표정이 굳는 미나와 세아. 짚이는 게 있나? 그렇겠지. 직접 걸린 당사자들이니까.
"기억 읽기는 너희도 무슨 스킬인지 알 거야. 기억 삭제는 말 그대로 접촉한 상대의 기억을 지울 수 있지. 기억 조작은 말 그대로 상대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어. 내 마음대로."
아무 말없이 내 이야기를 묵묵하게 듣고 있는 네 여자. 한번 쓱 둘러보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는 미나와 세아에게 매혹을 쓴 적 있어.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그 후로도. 승희와 안나에게는 쓴 적 없지. 기억 조작은 너희들에게 아예 쓴 적 없어. 기억 삭제도. 그걸 밝히기 위해서 말한 거야. 궁금한 거 있는 사람?"
말했다. 깔끔하게.
변명이나 핑계, 구구절절한 사연 팔이나 어쩔 수 없었다는 개소리. 그런 것들을 하나도 넣지 않고 담담하게 사실만 말했다.
이제 모든 턴은 저들에게 넘겼다. 나는 이제 성실하게 대답만 하면 된다.
속이 시원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진작에 했어야 했던 걸 이제야 말했을 뿐.
"제가 먼저예요? 아니면 세아가 먼저예요?"
담담한 미나의 질문.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진실만 대답할 뿐.
"너."
"왜요?"
"왜 너에게 매혹을 썼냐고? 그걸 물어보는 거야?"
"네."
"곁에 두고 싶었으니까."
내 말에 미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듯한 저 표정.
신기하네. 저렇게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미나는 처음인 거 같아.
"매혹을…. 걸었다고?"
황당한 표정의 세아. 뭐지? 조금 의외의 반응인데.
"어."
"아니…. 언제?"
"널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너를 물류 센터로 보낸 다음 그 이후 만날 때마다."
잠시 멈칫하는 세아. 그러더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성철 씨. 매혹의 지속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세아가 말이 없어지자 나온 미나의 질문.
근데 다들 '성철 씨'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는다.
승희와 안나가 놀란 표정으로 미나를 바라봤고 잠시 말이 없이 생각하던 세아마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미나를 바라보는 모습.
"그때 상황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마스터는 안 했었던 거 같은데. 마스터 했었어도 두 시간."
그리고 세 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설마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이미 각오하고 왔다고.
이야기를 듣자마자 싸대기를 안 맞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데.
저 정도 호칭 정도야 뭘.
"그때 가지고 있었던 스킬이 뭐였어요?"
"수면, 탐지, 매혹. 끝."
"페이즈 아웃은요?"
"한참 뒤에 얻은 스킬인데."
"그런가요. 알겠어요."
승희와 안나의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세아는 충격을 받은 거 같고.
지금 이 방안에서 침착한 건 나와 미나밖에 없다.
미나는…. 무슨 생각일까? 어떻게 저렇게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지?
"아니! 알았다고 하고 끝이 아니잖아!? 더 말 좀 해봐! 미나 언니!"
세아의 다그침. 세아는 많이 혼란스러운 거 같다.
자신의 일, 미나의 일.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찾아온 혼란.
자신도 매혹에 걸렸었으면서 지금 저렇게 미나에게 다그치고 있는 건…. 아마 답을 얻고 싶은 거다.
본인이 바로 답을 내릴 수 없으니 미나의 대답을 참고 하고 싶은 거야.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무슨 말을?"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냐!"
"생각이라. 당연히 있지."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미나의 얼굴은 정말 이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미나의 얼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다른 이유가 없다.
그녀가 정말 이쁘기 때문이다.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런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모두 숨을 죽이고 미나의 말을 기다리는 모습.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게 하는 그녀의 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성철 씨가 나에게 뭔가를 했다는 건."
그 말에 모두 놀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이건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확인 차원에서. 나를 감금하고 있던 소속사 사람들, 매니저, 연습생…. 그 사람들. 성철 씨와는 아무 상관 없죠? 그때 우연히 만나고 우연히 그들을 처리한 거죠? 나를 만난 것도 우연이고?"
"어. 당연하지."
그 말을 들은 미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 내가 아는 미나가 되었네. 방금까지는 내가 모르던 송미나 씨였는데.
"그럼 전 오빠를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오빠에게 처음 안겼을 때는 어느 정도 알고 내 마음을 다 정한 다음 안긴 거니까."
미나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성철 씨에서 다시 오빠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호칭 변화에 나보다 승희와 안나, 세아의 표정이 더 편해졌다.
재밌는 여자들이야. 저렇게 표정 변화가 확실하다니.
근데 미나의 말이 더 충격적이다. 내가 매혹을 잘 써서 성공한 게 아니었어?
"조금 더 길게 말해주면 안 될까?"
내 말에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나를 바라봤다.
저거저거…. 무슨 아침드라마 보는 아줌마 같은데. 너무 몰입했어.
어쨌든 내 말에 다시 빙긋 웃더니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는 미나.
저봐. 저거. 이쁘잖아. 게다가 그런 이쁜 미나의 이쁜 입술이 이쁘게 열린다.
"오빠가 저에게 매혹을 썼다고요? 그럼 그건 실패했어요. 아마 매혹을 걸지 않았어도 반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여자들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
그런 우리를 보더니 미나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안나?"
"으응?"
갑자기 자기를 부르자 깜짝 놀라는 안나.
"너는 오빠를 어떻게 생각해? 오빠는 네게 어떤 사람이지?"
"썽철? 그야…. 당연히 고마운 사람…."
"그치? 단순히 고마운 수준이 아니잖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사람. 그 이상이지?"
"그렇지. 당연하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쟤들도 참 대단해.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네.
그런 내 속마음과 상관없이 미나는 계속 말한다.
"안나가 오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항상 같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동질감이 들었지. 그래서 더 안나를 챙겨주고 싶었고."
그래. 그랬지. 미나가 유독 안나를 많이 챙겼었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네.
"그거 알아요? 그 커다란 아파트에서 내가 뭘 하면서 오빠를 기다렸는지?"
"아…."
"뜨개질도 하고 청소도 하고 오빠가 구해온 영화는 아까워서 못 보고…. 그런 집안에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당연히 오빠 생각이에요. 종일 혼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건 생각밖에 없으니까요. 이건 승희도 이해하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승희. 그래. 승희도 그랬었다. 자물쇠로 잠긴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내 생각을 했다고 그랬지.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나였다고 해도 사람을 좋아하는 것 정도는 내 뜻대로 해요. 나를 구해줘서 좋은 것인지 매혹을 걸어서 좋은 것인지 그냥 좋은 건지 정도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요. 스킬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고요? 물론 가능하겠죠. 근데 그건 영원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작 스킬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 하다고."
미나의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스킬로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
스킬로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그건 영원하지 못하다.
신념과 확신이 담긴 미나의 그 말. 아무런 근거가 없는 미나의 말이었지만 그녀의 맑은 눈빛을 보니 그 말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