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09화 (50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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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아침을 먹는데 세아가 나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그리고 안나는 나를 해맑게 바라보고.

얘들 왜 이래. 부담스럽게.

"세아 뭐 잘못했니?"

오죽하면 미나가 세아를 향해 물어볼 정도였다.

"어?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해! 그런 거 없어!"

하여간, 저런 거 보면 애라니까. 누가 봐도 뭔가 잘못한 거잖아.

근데 사실 잘못한 건 없을 텐데 말이지. 진짜 오해받기 쉬운 여자야.

여자들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승희와 미나를 살펴보고 있다.

어젯밤, 안나를 보고 느낀 것.

아무리 같이 살고 있고 모든 게 괜찮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어딘가가 고이면서 잘못 돼가고 있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것.

세아와 안나는 어느 정도 괜찮은 거 같다.

세아는…. 그런걸 담아둘 여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 자신에게 쌓이지 않게 털어내고 있으니까.

안나는 확인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닐 수 있지만, 어쨌든 안나는 괜찮을 거 같다.

승희도 아주 걱정은 안 한다. 쟤 성격상 쌓아놓기보단 나에게 당당히 이야기하겠지.

미나…. 미나가 문제인데.

쟤는 묵묵히 참는 스타일이니까. 제일 걱정이 된다면 역시 미나겠지.

그렇다고 승희도 괜찮을 거라고 간과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둘 다 성인이라고 하지만 속은 어린 소녀 같은 여자들이니까.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어. 꼼꼼하게.

"혹시 말인데."

내가 입을 열자 다들 나를 바라본다.

네 여자의 똘망똘망한 눈동자. 이렇게 보니 진짜 나는 복 받은 새끼야. 행복해 뒤지겠네.

"오늘로 5월이 됐잖아?"

다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하는 표정.

"이번 여름에 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그 말에 다들 머리 위에 느낌표가 빡! 하고 뜨는 거 같다.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달아오르는 네 여자.

"바다!?"

"당연히 바다죠!"

"설마 산이겠어? 혹시 여기 있어? 산이랑 바다 중에 바다 말고 산 고를 사람? 빨리 나와봐."

"오. 따듯한 바다…."

역시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근데 세아 쟤는 뭐 산이랑 원수라도 졌나? 왜 저래.

"그래. 당연히 바다지. 바다인데…. 어느 바다냐는 거지."

"엥?"

내 말에 세아가 무슨 소리냐 싶은 표정으로 말한다.

"알다시피. 나랑 승희는 바다에 간 적이 있어."

그렇게 말하자 다들 완전 부럽다는 듯 승희를 바라본다.

이건 뭐 예전에도 다 이야기 한 건데…. 뭐 저렇게 또 부러워하냐.

"주인에게 허락은 받지 않았지만 나름 개인 호텔과 개인 해변이 있단 말이지. 그치? 승희야?"

"그렇죠."

미친 소리지만 다들 그런 건 신경 안 쓴다. 그저 부럽다는 듯한 표정들.

"그때는 내가 스킬도 뭐 없고 그래서 차를 타고 갔지. 근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 내가 차보다 빠르거든. 게다가 알다시피 나에겐 게이트가 있잖아? 너희들이 원하는 곳을 말하면 내가 미리 찍은 다음에 '짜잔' 하고 바로 해변에 바로 열어줄 수 있단 소리지. 그러니 너희가 정해봐. 어떤 바다를 가고 싶은지."

"아아…."

이제야 그 '어떤 바다'라는 뜻을 이해한 네 여자.

"그럼…. 제주도도 되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미나.

"제주도는 두 시간 뒤에도 갈 수 있어. 우리 송미나양은 생각보다 소박하시네?"

"어…. 제주도가 어때서요. 나…. 제주도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에요."

"어? 진짜?"

"그럴 수 있지. 나도 안 가봤는데."

신기하다는 듯한 승희의 표정과 자기도 안 가봤다고 하는 세아. 그리고 이 대화에 끼기 어려워하는 안나.

음. 승희는 제주도 가봤나 보네. 세아는 안 가봤고. 안나야 뭐…. 한국지리는 잘 모르니까.

제주도 정도면 이름은 들어봤을 테지만.

"좋아. 그럼 일단 제주도 한번 가고."

"어? 뭐야. 한군데 정하는 거 아니었어?"

나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세아.

"엥? 뭐하러? 여름은 길다고. 뭐하러 한군데만 가. 내가 두 달 전부터 말한 이유가 뭐겠어. 각자 가고 싶어 하는 곳 정리해서 미리 찍어 놓을 생각인 건데."

"와…. 아니. 근데 그 저장 위치가 그정도로 많아?"

"많지. 일단 지금도 열한 곳인데. 게다가 스킬 하나 마스터 할 때마다 한군데씩 늘어나고. 그러니 여유 있어. 말하기나 해."

"그럼 저는 제주도요!"

당당하게 말하는 미나. 아이돌이었으면서도 참 소박해. 소신 있고.

"좋아. 그럼 일단 제주도. 다음은?"

"저도 제주도요. 꼭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안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승희는?"

"음. 저는 또 양양 갈 생각밖에 안 하고 있었어서. 꼭 지금 말해야 해요?"

"아니. 아직 널널한걸. 근데 미리 말해주면 고맙지."

"알았어요. 빨리 정해볼게요."

"세아는?"

"나? 괌."

"괌?"

"응. 괌."

"괌이라. 괌. 어딨더라?"

지도를 켜고 괌 위치를 본다. 아. 그래. 저 밑에 저기네. 거리는…. 3,100킬로미터?

"뭐, 금방 가겠네. 오케이. 그럼 이제 승희만 정하면 되겠네."

"어? 그렇게 쉽게 오케이라고? 솔직히 막 던진 건데…."

"러시아도 갔다 왔는데 괌이 문제겠니. 3,10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데."

"...저 오빠는 내가 알던 그 오빠가 아닌거 같아.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

"그치? 나도 요즘 그런 생각해."

중얼거리는 세아와 속삭이면서 맞장구치는 승희.

쟤네 저러는게 왜 이리 웃기냐. 재밌네.

"암튼, 괌이라. 알겠어. 그럼…. 그건 내가 준비하도록 하고. 이제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네."

"와. 사람을 두 달이나 설레게 할 셈이야? 권성철. 이 멋진 오빠야."

그러면서 세아가 나한테 안긴다.

평소에 보기 힘든 모습이라 다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

어이쿠. 어젯밤 보낸 게 그렇게 효과가 좋았나? 얘 이제 츤츤끼 다 빠졌네.

세아는 자기가 한 짓에 놀라 흠칫하더니 흠흠 거리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쓰윽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들 그 모습을 보고 쿡 하고 웃는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귀엽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어.

"자. 그럼…. 나는 밥도 먹었으니 일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세 여자의 인사를 받으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펜스랑 청평. 간단하게 다녀오자. 뭐, 별일이야 있겠냐만…. 그래도 한번은 들러야지.

펜스는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식량도 챙겨오고. 소고기도 챙겨오고. 할 게 많네.

바로 동두천으로 날아갔다. 블링크를 섞어서 10분 컷.

그 사이 어느새 동두천은 뭔가 그럴듯하게 변했다. 지난번에 의정부 쓰겠다는 이야기하러 왔을 때랑은 또 느낌이 다르네.

요새? 그런 느낌이다. 근데 요새라고 해봐야 크게 의미는 없긴 하지만….

볼 때마다 조금 조마조마해. 운이 좋아서 아직 무사한 거지 괜히 이상한 놈에게 잘못 걸리면 전멸당하는 건 순식간인데 말이지.

"왔습니까?"

내가 나타나자 반갑게 맞이해주는 정 부장.

누군가가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스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듬직함이 있다.

별거 아닌거 같아도 저건 상당히 크다. 나라면 그럴 거 같아.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

"네. 안 죽고 다시 나타났네요."

"성철 씨가 죽는 건 상상이 안 되네요. 자. 그럼 말해봐요. 이번엔 어디를 박살 내고 오셨죠? 미국? 러시아?"

"어…. 저한테 뭐 도청기 같은 거 붙이셨어요?"

"네?"

"아니. 러시아를 다녀오긴 했는데…."

"허. 그냥 한 말인데. 진짜 러시아도 잿더미로 만들고 오신 거예요!?"

"아니. 무슨 잿더미는…. 제가 무슨 흉신악살도 아니고…."

"산샤댐…."

"아."

"흉신악살?"

"죄송합니다…."

"하하. 앉으세요. 유쾌하신 거 보니 갔던 일은 잘된 거 같네요. 말해보세요. 또 무슨 신나는 일을 하고 왔는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나를 데려가 앉으라고 권하는 정 부장.

이 사람은 무슨 모험가 길드 장이야? 퀘스트 완료해주면서 있었던 일 들어주는 느낌이네.

근데 또 정 부장은 뭔가 이야기를 하면 재밌게 들어주는 사람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가?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이야기해 줬다.

다만, 기억 관련 스킬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 부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어느 정도 선까지는 다 말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 밑천을 전부 나불거릴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몇몇 개는 아예 말을 안 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정 부장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한다.

그래. 그 점이 또 이 사람의 좋은 점이지. 서로의 비밀을 완벽하게 알 필요는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흐음. 경호업체요."

의외로 정 부장이 관심 있는 건 그쪽이었다. 하긴, 남아있는 러시아의 부촌마을이나 거물 정치가 같은 건 솔직히 크게 와닿진 않겠지.

"혹시."

"네?"

"그 경호업체라는 자들 수준이 어떻다고 했죠?"

"티어6에서 7정도죠."

"스킬 여섯 개나 일곱 개. 그 정도라는 거죠?"

"네. 그리고 그놈들의 교관은 훨씬 더 많고요. 열네 개. 그보다 더한 놈들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고요."

"흐음…. 아. 그러면요. 잠시 시간 되시죠?"

"음? 왜요?"

"뭐 보여드릴 게 있어서."

어차피 오늘은 한가하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 일은 없으니까.

"네. 보러 가죠."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정 부장. 아무래도 사격장 같은 곳이다. 다만 총이 없고 거기엔…. 석궁이 있었다.

"아. 석궁. 드디어 쓰네요? 저건…. 활이네? 아. 이거 그거죠? 컴포지트 보우?"

"오. 아시는군요?"

"네. 한때 써볼까 하다가 못 구해서 못 썼거든요. 근데…. 많네요?"

"그럼요. 저희 주력 무기인데."

"아. 그거 쫌 멋지네요. 21세기 궁수부대라니. 낭만이란…."

"위력은 더 낭만 있죠. 보실래요?"

그러면서 컴포지트 보우를 하나 잡아들고 옆에 있는 화살도 하나 들어 활에 재더니 바로 과녁을 향해 쐈다.

퍽!

"와. 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상남자시네?"

진짜 놀랐다.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고 쏘기까지 막힘없이 물 흐르는 듯한 동작.

게다가 과녁의 중앙 근처에 맞았다. 과녁이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은 죽었거나 중상을 입었을 거다.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도 그 소리가 제법 큰 데다가 화살 박힌 거 보면 위력도 장난 아니고.

"화살 하나 맞췄다고 상남자는요. 누가 들으면 웃습니다. 하하."

"그래도 멋지네요. 근데 이거 위력 꽤 되네요?"

"물론 이건 수렵용, 혹은 레저용이긴 하지만…. 개조한 거니까요. 그런 거 보면 좋아요? 불법개조했다고 잡아갈 사람도 없고."

"잡으러 오면 그 사람 이마가 뚫리겠구먼."

"하하. 그렇겠죠."

그렇게 웃는 정 부장.

"보여주신다는 게 이건가요?"

"아. 그건 아니고. 잠시만요. 최 박사님!"

정 부장이 몇 번 소리치고서야 저 안쪽에서 최 박사라는 사람이 나왔다.

호칭만 들으면 무슨 하얀 가운을 입고 머리가 백발에 외눈 안경을 쓰고 나올 것 같은데 정작 나온 것은 무슨 산적같이 생긴 아저씨다.

미군 군복 비슷한 걸 입고 조끼 하나를 걸친 한 40대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 아저씨.

"아. 부장님 오셨어요?"

"인사하세요. 여기는 우리 대장. 권성철 씨. 이쪽은 최정혁 박사님이에요."

"안녕하세요."

"전 몇 번 먼발치에서 봤는데.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하하."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남자.

나는 흠칫했지만 얼떨결에 같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악수를 하고도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악수를 했지?

정 부장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그거 보여주죠."

정 부장이 말했고 최 박사는 '오!'라고 외치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뭐요?"

"보시면 압니다."

최 박사라는 사람이 가져온 물건. 작은 공 같은 물건이다. 하얀색 공.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여러 개가 줄지어서 차례로 놓여있는 상자. 하나를 빼서 들더니 최 박사는 정 부장에게 물어본다.

"제가 쏠까요? 부장님이?"

"음. 박사님이 쏘시죠."

"그러죠."

그러더니 함께 가져온 화살을 꺼내더니 그 하얀 공 같은 거에 나 있는 홈에 화살을 돌려 끼운다.

화살은 마치 화살촉에 헝겊을 대놓은 듯한 모양이 됐다. 그리고 활을 들더니 그걸 활에 걸고 시위를 당긴다.

퍽! 촤악!

화살은 과녁이 아닌 그 옆쪽에 있는 마네킹을 맞췄다.

그리고 화살이 마네킹에 맞자마자 공이 터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얀 천 같은 게 촥 하고 펼쳐지며 마네킹을 감싼다.

"어때요?"

그걸 보고는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정 부장.

"네? 뭘요?"

"음. 이것만 봐서는 감이 잘 안 오시겠구나. 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성철 씨가 이 공을 들고 투명화를 쓰는 겁니다."

정 부장의 말을 이해하자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허. 설마 제가 전에 말한 그 인형 탈하고 투명 천…. 그걸 듣고 이런 걸 만드신 거예요?"

내가 바로 대답하자 정 부장과 최 박사는 뿌듯하다는 듯 씨익 웃는다.

와. 미치겠네. 이거 진짜 위험한 사람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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