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508화 (50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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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

세아랑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곱 번? 여덟 번? 정확히 기억 안 난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하나 있었다. 내 남은 정액이 한 방울도 없다는걸.

마지막 즈음에 세아는 진짜…. 정말…. 어휴. 완전 야했지.

여러 번에 걸친 절정과 몸 안 가득 찬 내 정액이 세아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은 게 분명했다.

살짝 부어버린 자신의 음부에 포션을 바르던 모습.

누워서 완전히 힘이 빠진 내 물건에 포션을 붓고 두 손으로 정성껏 세우던 그 모습들.

어쨌든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좋은 경험이었지.

더 좋은 건 이렇게까지 했으니 다음에도 이런 것들을 이어서 할 수 있다는 거다.

츤츤대던 여자가 밤에는 내 물건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순종적으로 변한다고?

아. 이건 못 참지. 이 가스나. 이걸 위해서 여태까지 츤츤거린거 아냐?

이거이거 컨셉 아니냐고.

어쨌든 이렇게까지 했는데 세아가 임신이 안된다면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다.

근데 솔직히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머리는 그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얘들. 생리도 안 하잖아?

아. 하긴. 그건 만약 제약 해제가 진짜 그런 거라면 바로 생리를 시작할 수도 있긴 하구나.

어쨌든 질펀한 밤을 보내고 둘이 오랜만에 목욕까지 한 다음 또 그녀의 긴 머리를 말려준다.

기분 좋은지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들릴락 말락 하게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괜히 말했다가 멈추면 내 손해니 잠자코 머리를 말리며 그런 세아의 모습을 즐겼다.

제길. 존나 귀엽네. 솔직히 이건 반칙 아냐? 어휴. 이런 여자 앞에서 이성을 지키고 있는 나도 정말 대단하네.

그렇게 긴 머리를 전부 말려주고 게이트를 열어 벙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서 심장이 덜컥 떨어질 뻔했다. 그 뻔뻔한 세아도 표정이 딱 굳을 정도.

내 침대에서 안나가 자고 있었다. 아니 자고 있었었다.

우리가 나타나자 빼꼼 눈을 뜨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나와 세아에게 말한다.

"다녀왔어요? 좋은 시간 보냈어요?"

사실 나와 세아가 뭘 잘못한 건 아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하면 안 될 짓을 한 것도 아니다.

근데 왠지 바람피우다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왜 이리 불편하냐. 그리고 쟤는 또 왜 저렇게 해맑아.

"왜 아직 안 자고 그러고 있어. 나는 자러 간다."

"응. 세아 안녕."

더 웃긴 건 세아는 나 같은 생각이 조금도 없나 보다. 쿨하게 방을 나서는 그녀.

게다가 안나는 그런 세아에게 손까지 흔들어준다.

뭐지? 뭐야. 이거 나만 불편해? 나만 불안한 거였어? 얘들 왜 이렇게 쿨해?

"케이크 하나 통째로 훔쳐먹은 다음 혼날 걸 각오하고 눈치 보는 멍멍이 같은 표정 짓지 말고 어서 이리 와요."

아니. 어떻게 알았지? 내 마음이 보이나?

약간 삐걱거리면서 안나에게 다가간다.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치는 안나.

내가 약간 뻘쭘하게 눕자 안나는 그런 나에게 포옥 안기며 말한다.

"음…. 세아 냄새."

"어? 목욕…. 했는데."

"당연히 날 리가 없죠. 그냥 해본 거예요. 그거 알아요? 당신 지금 되게 귀여운 거?"

뭔가 안나에게 엄청나게 휘둘리고 있는 느낌이다. 와. 이거 땀이 나려고 하네.

"그렇게 불편해할 필요 없어요. 씅희나 미나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누구랑 뭘 해도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아요. 나에게 당신은 그저 고마운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댄다. 시원한 안나의 손이 잡생각이 가득한 내 머릿속을 싹 쓸어내는 것 같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요.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말해줄까요? 나는 내가 한발 늦은 게 아쉬워요. 사실 아까 깨어있었거든요? 당신 왔을 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어요. 구해준 것도 고마운데 복수까지 하게 해줘서. 그리고…. 인사 다음엔 더 좋은 것도 하려고 했죠. 당신이 원하면."

그러면서 내 뺨을 만지던 안나의 손이 쓰윽 내려가 내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내 물건을 잡는 안나의 손. 평소 같았으면 아마 손이 닿는 순간 힘이 바짝 들어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세아랑 너무 하고 와서 그런지 미동도 없다.

아니. 전원은 들어갔는데 시동이 안 걸리는 정도?

"근데…. 세아가 선수를 쳐버렸네요.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어서."

안나의 입술이 다가와 내 뺨에 닿는다.

가벼운 키스. 그렇게 내 뺨에 지신의 체온을 남긴 그녀는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고마워요. 모든 게 다."

나는 몸을 돌려 안나를 마주 봤다.

늦은 밤 어두운 방 안. 어슴푸레한 무드등만으로도 반짝이는 안나의 푸른 눈빛.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은 생기가 넘친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빛.

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 나를 한점 흔들림 없이 바라볼까.

그래. 내가 해준 건 있다. 구해줬고, 생활을 책임지고 있고, 실력을 갖추게 해줬고, 복수까지 해줬다.

그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지. 그러니 안나가 그 정도 해준 나를 믿고 의지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 믿음의 크기가 다르다.

이 여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눈빛이 아니다. 거의 신앙과 가까운 눈빛.

말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게 불안하다.

"안나."

"네."

"나는 안나가 나를 바라보고 웃으면 너무 좋아."

"다행이네요."

그러면서 또 한 번 싱긋 웃는다.

그래. 저 웃음. 나는 저게 좋다. 기분 좋은 봄날의 햇볕 같은 미소.

"그리고 나는 나를 대등하게 바라봐주는 안나가 좋아."

내 말에 안나의 미소가 살짝 사그라들었다.

"안나는…. 나에게 너무 헌신하려 하고 있어. 물론 그런 안나도 좋아. 하지만…. 안나도 본인을 조금 더 사랑했으면 좋겠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본인도 사랑해 줘."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거다. 미나를 걱정할 게 아니었어.

이 여자. 안나 스타르체바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 같다.

사랑이란 이유로. 신세를 졌기에.

맹목적인 눈을 하고 거침없이 나를 위해 앞장서고 내가 말하는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일 거다.

그리고 만약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거침없이 나를 지키려고 할 거 같다.

자신의 몸을 버려서라도.

지금 안나의 눈은 그렇다.

나는 안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을. 표정을. 그들이 바라보는 것을.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 주변에 있는 누군가만을 바라보고 산다.

그리고…. 그 삶은 굉장히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건 자기애가 기본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게 자존심이고 자신감이다.

그렇기에 안나의 상태는 좋지 않다. 저 해맑은 미소에 너무 속았어.

"하지만…. 저는 더러운걸요."

아. 이거…. 들어봤던 말이잖아. 미나도 그랬지. 민희도 그랬고. 똑같은 반응이었어.

"앉아 봐."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는 안나. 흰색 티셔츠가 스륵 흘러내려 그녀의 어깨가 보였다.

무드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한 그녀의 하얀 피부. 그녀가 피부하얀 백인이란 게 확 느껴진다.

내가 너무 바깥에만 나돌아다녔나 보네.

벙커에서 함께 살며 같이 밥 먹고 스킬 배운다고 모든 걸 아는 게 아니었어.

반성해야겠네. 반성해야겠어.

"안나."

"네."

"나는 너와 승희, 미나, 세아랑 같이 살고 있어. 그렇지?"

"네."

"그럼 나는 더럽니?"

"네?"

"나는 너희 넷 말고도 다른 여자와 섹스한 적 있어. 그럼 나도 더러워?"

"아뇨. 아니…. 당신은 더럽지 않아요."

"그래. 나도 니가 더럽지 않아."

"하…. 하지만! 저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

"그래. 나는 내 자유였지만 너는 강제로 당했지. 따지고 보면 내가 더 더럽네."

"그게 대체 무슨…."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물론 과거에 대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순결에 대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게 있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아.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니 더럽다는 생각…. 그런 건 다시는 하지 마."

"당신은 잘 몰라요. 그거에 대해서."

"당연히 모르지. 그래서 모르는 것엔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신경 쓰지 않는 거고.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지금 당장과 앞으로 가야 할 미래만 봐. 과거는 다 정리했으니까. 나는 안나 니가 앞으로의 미래에도 계속 나와 함께 있었으면 해. 본인을 사랑하면서. 당당하게 내 옆에서."

말이 없는 안나.

똑똑한 여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다.

그래. 타이밍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복수를 이루고 나서 어떻게 보면 허무할 수도 있는 지금 상태.

그런 그녀에게 확실한 방향성을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더는 과거에 매몰될 필요가 없어. 더는 과거의 일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잊어. 잊어버리고 이제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걸 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거.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도 사랑해주고."

눈물을 흘릴법하지만, 역시 안나는 안나였다.

나를 바라보는 안나. 역시 그 환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러더니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를 훌렁 벗어버린다.

새하얀 피부. 새하얀 가슴.

"어?"

아니. 대체 이 여자는 왜 또 갑자기 벗는데.

그렇게 놀란 사이 안나는 나를 밀어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탄다.

"아…. 안나?"

"왜요. 힘들어요? 걱정 마요. 가만히 누워있어도 되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아마 힘이 안 들어갈 거라서."

내 몸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간 안나가 내 바지를 벗겼다.

이렇게 안나가 육탄공격을 해도 미동이 없는 나의 물건.

그대로 잡고 입에 넣어버리자 안나의 따듯한 입속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역시 축 처지는 물건. 몇 번을 더 빨고 핥았지만, 반응이 없는 나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입에서 뱉으며 안나가 중얼거린다.

"대체…. 세아랑 얼마나 했길래…."

약간 머쓱해진 나는 저절로 시선이 피해진다. 음…. 좀 과하긴 했지.

"괜찮아요. 뭐. 그럼 그냥 안고만 있죠."

그러더니 내 옆으로 내려와 내 팔을 베고 등지며 눕는다.

그리고 내 팔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피곤하죠? 이제 그럼 자요. 나도 여기서 잘래요."

손에 느껴지는 안나의 가슴. 으음. 또 이래 버리니 이것도 참 아쉽네.

포션…. 먹어봐? 대형 포션 한번 먹어볼까? 효과가 있나? 아까처럼 내 물건에 바르면….

아. 새끼들 진짜. 코인 회수를 하고 싶으면 상점에 정력제 같은 건 만들어놨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여간 새끼들 상도덕이 없어. 상도덕이. 사람도 막 픽픽 죽일 수 있는 놈들이면 정력제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아니 대체 왜 스킬중에는 정력 강화나 정력제 제작, 강제 발기 이런 스킬은 없는 거야. 어우. 근데 강제 발기는 조금 무섭네.

생각해보니 호러 스킬이야. 이건 취소. 생각 안 한 거로 하자. 악용될 여지가 너무 많다.

어쨌든 그렇게 안나의 가슴을 만지며 이대로 그냥 잠드는 것과 어떻게든 세워보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데….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안나.

그녀의 숨은 느긋했다. 천천히 내쉬는 날숨. 그리고 조용히 들이마시는 들숨.

나를 번민에 휩싸이게 해놓고 자기는 잠들어버려? 살짝 괘씸하네.

잠든 안나의 꼭지를 살짝 쥐고 비틀었다.

"으응…. 아…. 미안해요. 잠들었어요. 너무 편해서…."

"아냐. 미안. 내가 깨웠네. 다시 자."

그렇게 토닥이자 다시 안나는 잠든다.

복수치고는 너무 소심했나. 그래도 부럽네. 다시 잠들 수도 있고.

에이. 나도 자자. 잠이나 자야지.

오늘은 힘을 많이 썼고 안나도 안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잠들수 있을까? 하고 잠을 청해봤지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 스킬이 숙련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면 숙련이나 더 하다가 잘 텐데.

기억 조작은 지금 숙련할 수 없는 스킬이다.

솔직히 아주 사소한 기억들. 예를 들어서 방금 내가 안나의 꼭지를 꼬집은 것.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기억 조작 숙련을 해도 사실 상관 없을 거다.

하지만 그건 싫다. 그러고 싶진 않아.

매혹이든 기억 관련 스킬이든, 이제는 내 여자들에겐 쓰고 싶지 않다.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스킬 숙련은 내일 하지 뭐.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이대로 순간이동으로 수원을 다녀와도 되긴 하지만…. 그냥 자는 게 나을 거 같다.

혹시라도 안나가 깨서 옆에 내가 없으면 그것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닐 거잖아?

자자. 잠이나 자자.

앞으로도 계속 신세를 져야 할 원수 같은 친구. 그 새끼를 억지로라도 불러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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