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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당
일단 상황을 정리해본다.
1층의 여자. 아직 저 여자는 매혹에 걸려있다. 그리고 착실하게 1층에 있던 남자들을 죽이고 있고.
벌써 두 명을 죽였다. 남은 건 남자 하나. 일단 저긴 됐어. 곧 마무리하겠지?
2층에 있는 여자. 이 여자가 가장 위험하다. 매혹에 걸렸다가 풀린 여자니까.
일단 이 여자를 다시 매혹하거나 재워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해.
2층 여자에게 기절 당했던 남자. 이 남자 역시 상황을 모두 아는 놈이다.
다만 2층 여자를 완벽하게 믿지는 못하고 있어. 방금 자신을 공격했던 여자를 완벽하게 믿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그걸 풀어줬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결국, 목표는 2층 여자다. 그리고 저 여자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상해야 한다.
페이즈 아웃은 아직 쓸 수 없다. 1층 여자의 매혹이 풀리면 안 되니까.
과연 2층 여자가 무슨 짓을 할까? 남은 남자들을 다 깨울까? 아니면? 그래. 1층 여자의 매혹을 풀어주려고 하겠지?
내 예상은 맞았다. 뭐, 사실 예상도 아니지. 저 여자가 날듯이 계단을 내려가는 걸 보면서 생각한 거니까.
그리고 때마침 1층 여자가 세 번째 남자의 방에 들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2층 여자가 내려오는 것보다 1층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게 먼저일 거 같다. 그렇다면?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저 타이밍을 재고 언제든지 스킬을 쓸 준비를 할 뿐.
1층 여자가 세 번째 남자의 가슴팍에 대검을 찔러넣었다.
정말 기가 막힌 솜씨다. 아무리 방심한 남자를 찔렀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솜씨 좋게 찔러 넣지?
확실히 저런 걸 배운 사람은 무서워. 순식간에 사람을 골로 보내네.
그렇게 남자가 죽자마자 나는 바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그와 동시에 2층 여자가 1층 여자에게 스킬을 쓰는 게 보인다. 아마도 광역 스킬 무효화겠지? 걸린 매혹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페이즈 아웃을 썼기에 아무 의미 없다. 이미 매혹이 풀려서 자기가 한 짓을 깨닫고 비명을 지른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미 조용히 모두를 처리하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녀석들이 겁먹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게 최선이야.
일단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면서 바로 여자 둘에게 무효화와 매혹,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블링크 한 다음 1층에 있던 여자는 바로 마체테로 찍어 죽였다. 그러려고 재웠으니까.
그런 다음 매혹에 걸린 여자에게 바로 속삭인다.
"엎드려서 기절한 척해. 그리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서 남자들을 공격해. 무효화는 쓰지 말고."
그렇게 말한 다음 투명화를 비롯한 모든 버프를 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1층 여자가 죽인 세 번째 남자의 방. 위의 녀석들이 탐지를 돌려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
위쪽이 소란스러워지며 남자 넷이 내려왔다. 투시로 그들을 지켜보니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남자들을 멈춰 세운다.
"무슨 일이야!"
아마도 공격당할 것을 염두에 뒀는지 계단 위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지르는 상황.
한번 공격당했다 이건가? 조심성이 많네.
하지만 남자의 말은 공허하게 집 안을 울린다.
대답할 사람이 없잖아? 하나 있긴 하지만 기절한 척하라고 했으니 대답할 리가 없다.
"로자! 멜라니야! 율리안! 야고브! 글렙!"
계단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소리만 지르는 녀석들.
근데 투시로 바라보니 지금 외치고 있던 남자 말고 다른 셋이서 내 쪽을 가리키며 뭔가를 속삭이고 있다.
아. 탐지로 보고 있는 건가. 녀석들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밑에 두 명이 있다는 건 확인한 거다.
천천히 내려오는 녀석들. 쓰러진 여자를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슬금슬금 다가와 쓰러진 여자를 조심스럽게 흔든다. 기절한 척을 하랬더니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는 여자.
진짜 기절한 거 같네. 되게 리얼해.
그렇게 여자를 흔들어보다가 포기한 뒤 내 쪽으로 다가오는 놈들.
나는 바로 수납에서 빈 병을 하나 꺼낸 다음 그대로 유리창에 던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남자 셋. 그와 동시에 기절한 척했던 여자가 일어나 남자 셋에게 스킬을 쓴다.
남자 하나가 기절을 당하고 여자도 반사를 당했는지 뻣뻣하게 굳는다.
그걸 보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남은 남자 둘.
그 순간 내가 튀어나가 무효화를 걸고 바로 남자 둘에게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기절했다 무효화를 맞고 깨어난 남자 하나와 여자에게도 바로 수면을 걸었다.
"휴…."
겨우 상황 종료.
한 놈도 순간이동을 못하게 하고 다 잡아냈다. 다행이긴 한데…. 아. 이게 무슨 삽질이래.
어쨌든 상황을 수습해냈으니 됐다. 귀찮은 상황은 생기지 않았으니까.
녀석들의 기억을 한 번 더 읽어본다. 혹시라도 또 도망갔거나 남아있는 놈들은 없는지.
기억을 읽어본 바로는 이놈들이 다다. 그럼 뭐…. 남겨둘 필요가 없지.
바로 마체테를 들어 하나씩 처리한다. 아. 파티광 여자와 죽일 걸 그랬나? 됐다. 그냥 잡자.
그렇게 총 여덟. 다 합쳐서 60만 코인 정도.
녀석들의 수준도 그렇고 코인도 그렇고…. 이제는 이런 녀석들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고 좀 더 강한 놈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은데. 어디 약한 데 코인 많은 놈들 없나?
역시 질보단 양인가? 정말 편하게 날로 먹고 싶네. 어휴.
아. 쉽고 간단하게 처리하려다가 이게 뭔 고생이냐.
매혹을 그렇게 써댔으면서 이런 식으로 풀린 것도 처음이네.
그래. 지금까지는 스킬 많이 있는 녀석들에게 매혹을 건 적이 별로 없었지.
아까 그 여자가 본인이 의도해서 무효화를 쓴 건 아닐 거다. 자신의 매혹을 풀기 위해 무효화를 쓴 건 아니야.
그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효화를 썼다가 덩달아 풀렸을 뿐이지.
기억 조작을 썼다가 매혹을 쓰니까 이렇게 확 차이가 나네.
무효화에 간단하게 풀리는 매혹. 그래. 단지 무효화뿐만이 아니다. 내가 페이즈 아웃 같은 걸 써도 매혹은 풀리지.
그렇게 쓸만한 매혹이었지만, 더 좋은 게 나오니 이제는 단점이 눈에 보인다.
물론 기억 조작도 그렇게 만능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체감이 확 되네.
결국은 날로 먹으려던 내가 문제다. 쉽게 쉽게 가려 했던 내가 문제라고.
사자박토라고 했는데. 자꾸 해이해지는 기분이네. 토끼 한 마리를 잡으려고 해도 전력을 다해야지.
근데 내가 사자라고 하는 거야? 어휴. 이것도 문제네. 언제부터 나 자신을 사자라고 하고 상대를 토끼로 보는 거야?
하여간. 새끼 요즘 하는 일마다 잘 돼 가자고 기고만장해있는 거 같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리자. 성철아. 응? 잘하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파티 풀리던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내게 다가와 물어보는 승희. 걱정했다가 내가 멀쩡한 걸 보고 안심하는 눈치다.
"아. 괜찮아. 별일 아니었어. 파티 풀려서 코인 줍는 거 멈춘 거야?"
"아뇨. 코인은 다 주웠어요. 적당히 우리끼리 나눠서 다 주웠어요."
"잘했네. 역시."
"괜찮은 거죠?"
"뭐가? 코인? 괜찮지. 난 코인 많아. 일일이 안 나눠도 돼."
"아니요. 오빠요."
"아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면서도 걱정하는 눈치를 지우지 못한다.
하긴, 얘는 내가 스킬이 지금보다 두세 배는 많다고 해도 똑같이 걱정하겠지. 그런 성격의 여자니까. 고맙게시리.
"그럼. 볼일은 다 끝났지? 돌아가자."
내 말에 다들 별다른 이견 없이 돌아가는 게이트를 탄다.
그렇게 돌아오고 다시 스킬 숙련을 하는 여자들.
참…. 이런거 보면 다들 착해. 불평불만 없이 하자는 대로 하잖아?
"그럼…. 난 또 나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하던 일들을 마저 하러 움직인다.
일단 수원은 잠시 텀을 둬도 될 거다.
새로 기억을 만들어내다시피 한 고성연과 최신영에게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어야 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기억 읽기와 기억 삭제 숙련을 마스터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여자들이다. 그래서 살려놓고 있는 거지.
여기서 뭔가가 더 잘 안된다고 해도 이제 미련은 없다.
그런 그녀들에게 줄 마지막 선물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보내는 것.
물론 고성연에겐 선물이지만 최신영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미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그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미국까지 게이트는 뚫어야지.
바다 위를 나는 비행.
한동안 안 했던 거라 다시 하려니 상당히 귀찮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비행 속도가 빨라졌다는 거?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속 190킬로로 날아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스킬 덕분에 멀쩡한 거지 차 같은 걸 타고 맞바람을 맞으며 190으로 달린다면…. 이미 머리가 작살나있지 않을까?
어쨌든 속도가 빨라진 덕에 거리를 팍팍 줄일 수 있게 됐다.
다섯 시간만 날아도 거의 천 킬로미터는 날 수 있잖아?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이렇게 앞으로 며칠만 더 날면 미국 서부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한 5일 정도만 더 날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행을 마치고 위치를 저장한 뒤 홋카이도로 순간 이동한다.
그리고 다음 할 일은 하루카 지켜보기.
혼자가 된 이후로 더욱 열심히 사는 여자. 음. 정말 열심히 잘사네. 행복해 보일 정도로.
그나저나 가면 이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걸까? 녀석이 빨리 와야 할 텐데.
누가 왔다 간 흔적은 없다. 식량이나 동물들이 줄어든 기색도 없고.
5월이 됐으니 며칠 내로 올 거 같은데…. 되게 안 오네.
어디 가서 뒤졌나? 뭐, 그랬을 수도 있지. 절대 강자니 뭐니 해도 결국은 사람이니까.
야쿠자의 왕 그 녀석도 나한테 죽었잖아.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다.
녀석이라고 어디에서 객사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카를 바라본다.
능숙하게 소를 도축하고 있는 모습. 지난번엔 양이더니 이번엔 소야?
만약 쟤한테 스킬을 더 배우게 한다면 세 번째는 무조건 수납이다.
그것만큼 좋은 스킬은 없지 싶다. 갓 도축한 고기를 바로 보관할 수 있는 스킬. 수납만큼 좋은 스킬이 없어.
물론 세상을 뒤져보면 도축 할 수 있는 사람은 많겠지. 하지만 저렇게 어리고 이쁜 여자는 아닐 거야.
양을 도축할 때는 그냥 신기하네! 수준이었는데, 소를 도축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아는 거라서 그래. 아는 거라서. 해체돼서 그럴듯한 모양이 되는 고기들. 내가 아는 것들이다.
모양도 맛도 모두 아는 것들. 그래서 이렇게 군침이 도는 거겠지?
한번 모습을 드러낼 때도 됐는데…. 해볼까?
근데 웃기네. 고기 한번 얻어먹겠다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코미디야.
참자. 참아. 고기 못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쓰읍. 근데 존나 맛있어 보이긴 하네.
게다가 저건 곱창이잖아? 물론 저 상태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래저래 처리를 해야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될 거야.
아. 근데 눈앞에 곱창이 있는 건 좀 반칙이네. 자꾸 결심이 흔들리려고 해.
솔직히 소고기로 유혹하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냐? 진짜 난이도 극악이네. 못된 계집애.
저거. 저년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고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 소고기 때문에 이렇게 흔들릴 수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지켜본다. 진정하자. 오바 그만하고.
괴력의 효과가 확실히 크긴 한가 보다. 커다란 소를 이리저리 잘라내는 하루카.
그렇게 뼈와 살을 분리한 그녀는 고기를 들고 가더니 훈제를 하기 시작했다.
저거…. 훈제 맞지? 쟤는 뭐 어떤 삶을 살았는데 저런걸 할 줄 아냐?
정말 생존 특화형 인간이네. 어떻게 보면 이런 세상에서 가장 살아남기 좋은 능력 아닐까?
이쁘고 어린데 식량 생산 최적화라니. 가면 그놈도 하루카 쟤를 보면 넋이 나갈 거 같다.
욕심이 나겠지. 저 정도 인재면 욕심내는 게 정상이야.
그렇게 홀린 듯이 하루카의 작업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더 보고 싶었지만, 농담 아니고 계속 보고 있으면 하루카가 잘 때까지 볼 거 같았으니까.
세상이 망하기 전이었으면 쟤는 저런 거 방송하고 살았어도 평생 먹고 살았을 거야.
이렇게 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니.
하루카…. 무서운 계집애.
어쨌든 집으로 들어오니 다른 건 몰라도 소고기 생각이 자꾸 났다.
아. 내일은 펜스에 좀 가보자. 가서 소고기 좀 내놓으라고 해봐야지.
안 되겠어. 이렇게 된 거 무조건 구워 먹고 말 테다. 참기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