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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당
얽혀있는 게 없기에 마음이 편안하다.
아침. 아니 점심일 수도 있다. 벙커는 시간을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잠에서 깬 나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미루고 미뤘던 안나의 복수를 마쳤으니 당분간은 메인 퀘스트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그야말로 느긋함 그 자체.
물론….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있다. 고성연과 최신영. 그 두 여자도 미국에 던져놔야 하잖아?
게다가 하루카와 가면 그놈도 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본의 절대 강자인지 나부랭이들도 있지.
그리고 만악의 근원. 짱개들도 처리해야 한다. 할 건 많지. 몸이 두세 개 더 있어도 부족할 정도로.
하지만 느긋함이 더 크다. 사실 다른 것들은 안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런 거지. 필수 메인 퀘와 서브 퀘스트의 차이? 그 정도?
그렇기에 이 느긋함이 너무 좋다. 한껏 게으름 피워도 되는 이 여유.
지난겨울부터 그렇게 원한다고 부르짖든 느긋함이잖아? 드디어 만끽할 수 있겠어. 크으.
철컥
문 열리는 소리. 문을 힐끔 보니 세아가 들어온다.
"얼래? 왜?"
"뭐."
"아니. 왜 들어왔냐고."
"난 오면 안 되나?"
"아니. 안될 건 없지. 자. 이리와."
내가 팔을 벌리자 세아는 안기기는커녕 침대 끝에 살짝 앉는다.
하여간. 저 계집애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근데 표정이 왜 저러지? 되게 새침하네.
"할 말 있어?"
"그게."
평소라면 필터링 없이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여자가 오늘은 웬일로 우물쭈물한다.
뭐지? 뭐 잘못했나? 되게 큰 실수를 한 게 아닌 이상 저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는데.
"왜?"
"그러니까…."
똑똑 벌컥
세아가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났어요!? 식사하세요! 어머? 세아? 여기서 뭐 해?"
약간 높은 텐션의 안나. 어제 일 때문인가?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텐션이 높은데.
게다가 그런 안나 때문에 기껏 뭔가 말하려고 했던 세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머. 제가 뭐 실수 한 건…."
"아냐. 밥 먹자고?"
그러더니 안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는 세아.
"제가 눈치가 없었던 걸까요…."
세아를 바라보며 말을 흐리는 안나. 나는 몸을 일으켜 그런 안나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말했다.
"글쎄.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하겠지."
그렇게 밖으로 나가니 미나가 이미 식탁을 다 차려놓았다.
언제나 화려한 식탁.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먹고 사는 걱정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내가 물었다.
"식량. 많이 남았나? 슬슬 떨어질 때 안됐나?"
"넉넉해요."
미나의 간결한 대답.
"아. 그래? 우린 생각보다 음식 소비가 적은 거 같단 말이지."
"다들 군것질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러면서 승희와 세아를 슬쩍 바라보는 미나.
자기들 이야기인 걸 아는지 승희와 세아는 고개를 숙이고 밥 먹는 데 열중한다.
하긴, 회귀를 써주는 게 나니까. 쟤들이 군것질에 진심인 건 알고 있지.
"그래도 넉넉한 편이 좋겠지?"
"네?"
미나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어휴. 이뻐라. 어쩜 저리 이쁘냐.
"아냐. 밥 먹어."
식량을 가지러 펜스도 한번 가긴 해야겠다. 잘하고 있는지도 한번 보고.
근데 세아 쟤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궁금하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밖에서 여자들이 스킬 숙련하는 걸 지켜본다.
동물 탐지를 숙련하는 승희와 세아. 저 멀리에서 소규모 동결을 쓰고 있는 미나.
아예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바람을 등지고 독무 숙련을 하는 안나.
독무 저건 확실히 위험해. 예전에 대학교 거기에서 그 짱개놈이 기억난다.
지가 쓰고도 지가 죽었지. 어처구니없는 놈이었어. 다윈 상 후보에 오를 정도잖아?
생각해보니 어제 그 이고르의 비밀기지. 거기 틈에 바닷물을 들이붓는 게 아니고 독무를 밀어 넣었어도 괜찮았을 거 같다.
와. 그러고 보니 끔찍하네. 밀폐된 공간에서는 독무만큼 잔인한 스킬이 없어.
보호막은 기체를 못 막잖아. 독무를 뿌리면 막을 방법이 없다.
뭐, 방독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로 얼마나 버텨질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독한 스킬이긴 하네.
아. 거기 코인도 회수하러 가야 하는데. 바닷물 좀 빠졌으려나?
거기 배수시설은 나쁘지 않았던 거 같으니 하루 지난 지금이면 어느 정도는 빠져있겠지?
하늘로 올라가 안나를 부른다. 내가 올라오자 황급히 독무 쓰던 걸 멈추는 안나.
"위험해요. 그냥 밑에서 부르죠."
"파티 썼잖아."
"아무리 그래도요."
그런 의미에서 파티는 정말 좋다.
자기가 써놓고도 독무의 영향을 받아 죽을 수 있지만, 파티를 하면 독무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참 웃기는 스킬들이야. 이런 식으로 단점을 보완하다니. 이게 정말 의도 한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어제 거기. 코인 주우러 가자."
"아. 그럴까요?"
코인을 줍기 위해선 안나의 코인 탐지는 필수다. 눈으로 그걸 일일이 언제 다 줍고 앉아있어. 귀찮게.
"그럼 다 같이 가나요? 아니면 둘만?"
둘만이라는 단어에서 안나의 눈동자가 빛났다. 노리는 게 분명한 듯한 표정과 태도.
흐음. 알고도 당해줘야 하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는데 말이지.
"다들 물어보고."
내 대답에 약간 실망한듯한 눈치. 하지만 본인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빠르게 포기하는 모습.
"가요! 같이 가!"
당연히 다른 여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다.
승희와 미나, 세아는 당연하다는 듯 따라온다고 했고 안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참 재밌어. 다들 내가 그렇게 좋은가?
가끔 이럴 때 보면 내가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가 만든 상황이긴 하지만…. 상황이 너무 잘 풀렸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일 거야.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다 같이 게이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
엉망진창이 된 비밀기지. 그리고 탐지를 써보니 두 개의 기척이 느껴진다.
"사람 있다. 두 명."
어제의 생존자일까? 아니면 어제 일을 보고 찾아온 하이에나들인가?
거의 한 시간 넘게 우레 폭풍을 써댔으니 주변에 살고 있던 놈들이라면 여기서 벌어졌던 일을 못 봤을 리가 없을 거다.
뭐가 어떻든 간에…. 발견한 이상 잡아 죽여야지.
일단 투시로 어떤 녀석들인가 살펴본다. 어디 보자. 뭐 하는 놈들이냐.
남자 놈 둘. 입고 있는 걸 보니 하이에나들은 아니다. 아마 여기 있던 용병단 놈들인 거 같다.
페이즈 아웃이나 순간이동 같은 거로 도망쳤다가 다시 나타난 놈들 인 거 같은데….
저 둘밖에 없나? 그 많은 놈 중에서 저 둘밖에 없다고?
그거야 일단 잡아놓고 기억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
"잠깐 공중에 떠 있어 봐. 안에 잔당이 남아있으니 처리하고 올게."
네 여자를 공중에 남겨놓고 기지 안쪽으로 들어간다.
어제 우레 폭풍으로 드러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냥 페이즈 아웃을 썼다. 혹시라도 안쪽에 숨어있는 놈들이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스무스하게 벽을 통과하며 녀석들이 있는 쪽으로 향한다.
다행히 페이즈 아웃을 쓰고 있는 놈들은 없는 거 같다. 딱히 보이는 놈들이 없네.
근처까지 다가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바로 해제한다. 그리고 무효화와 수면 두 방.
혹시 모르니 탐지를 킨 상태에서 주변에 보이는 곳에 무효화를 뿌려본다.
더 드러나는 놈들은 없는 거로 봐선 저 두 명이 다인가 보다.
버프를 모두 걸고 잠든 두 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기억 읽기.
녀석들은 순간이동이 있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 말고도 다른 녀석들이 더 있는 걸 알아냈다.
두 녀석을 포함해서 열 명. 녀석들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전진기지 같은 곳에 머물고 있었다.
생각보다 적네. 게다가 게이트는 없는 거 같고.
어쨌든 녀석들도 모두 처리해야지.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지.
기억을 조금 더 읽고 녀석들을 처리했다. 둘이 합쳐서 코인 10만. 소박한 놈들이네. 귀여울 정도야.
다시 하늘로 올라가 여자들에게 파티 초대를 하면서 말했다.
"잔당이 있네? 그거 처리하고 올게. 여기서 코인 회수하고 있어. 알겠지?"
"같이 가요."
안나가 의욕을 앞서며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정도로 대단한 놈들은 아냐. 금방 다녀올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여자들은 내 말에 토를 달거나 하진 않는다.
그야말로 순종적 그 자체. 이러니 내가 복 받은 놈이지. 얼마나 좋아?
"녀석들이 순간이동으로 올 수 있으니까 항상 긴장하고. 탐지 유지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여자들을 두고 녀석들의 기억에서 읽은 전진기지 쪽으로 향했다.
물론 같이 가도 상관없지만…. 내가 쓰는 스킬들을 아직 전부 설명하지 않았기에 혼자 가는 게 편하다.
가서 매혹을 쓸 수도 있고 기억 조작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아. 이것도 전부 이야기 해야 하는데. 이제 슬슬 이야기하긴 해야겠지?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긴 한데.
어쨌든 그리 멀지 않은 전진기지. 멀리에 기척이 느껴지는 거 보니 제대로 왔나 보다.
해안가 근처에 있는 어느 부자의 별장. 거기를 전진기지처럼 쓰고 있는 녀석들.
코인이 들어오는 거 보니 네 여자는 코인 회수를 시작했나 보다. 음. 만 단위씩 들어오는 코인들을 보니 역시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 나도 참 많이 변했어. 코인 인플레이션 정말 심하네.
별장 안에 있는 생존자들. 녀석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암울해 보인다.
하긴, 녀석들의 처지에서 봤을 땐 갑자기 찾아온 천재지변 같은 일이었겠지.
평화롭게 잘살고 있었는데 하루 만에 전멸하게 됐으니까. 억울한 면도 있겠지.
이놈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티어6에서 7정도.
그 스멜리 코퍼레이션이었나? 그 경호원 놈들이랑 비슷한 수준이다. 근데 여긴 그 교관 같은 놈들은 없다.
하긴, 그 교관 녀석들이 특이한 거지. 숫자도 그리 많은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남아있는 여덟. 게다가 둘은 여자다. 그럼 일이 편하지. 여자가 있으면 매혹을 쓸 수 있잖아?
마침 밖에 나와 있는 여자 하나. 군복 비슷한 걸 입고 있는 모습이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생긴 것도 제법 이쁘장한데. 왜 이런 일을 하지? 하여간 인기는 좋을 거 같네.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 이쁜 여자는 여러모로 좋겠지.
상당히 먼 곳에서 바로 무효화와 매혹을 걸었다. 그리고 여자의 근처로 블링크 해서 작게 말한다.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와."
그리고 다시 블링크.
내 지시를 받은 여자는 주저하지 않고 별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바로 다른 여자가 있는 쪽으로 가더니 뭐라고 이야기하고는 밖으로 나온다.
남자 하나가 밖으로 나가는 두 여자를 보고 뭐라고 물어보지만 웃으면서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게 매혹의 좋은 점이다. 자연스러운 것. 나에 대한 감정만 비정상적이 되는 거지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두 여자. 다시 멀리서 무효화와 매혹 두번. 그리고 블링크로 다가가 여자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조용히 이 별장 안에 있는 녀석들을 죽여."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하늘 위로 블링크 했다. 이제 나는 관전만 하면 된다.
하늘 높은 곳에서 천리안과 투시로 여자들이 하는 것만 지켜보면 되니 정말 편하다.
투시를 배운 건 진짜 잘한 일인 거 같다. 지금까지 쓴 것만 해도 이미 뽕은 뽑은 게 아닐까?
별장 안으로 들어간 두 여자는 서로 갈라져서 하나는 1층의 방으로, 하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제법 좋은 별장인지 방이 제법 많았고, 1층에 세 명, 2층에 세 명씩 각자 방 하나를 잡고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으로 여자들이 각각 찾아가기 시작했다.
노크.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의심 없이 여자에게 문을 열어준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여자. 남자는 살짝 당황한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남자는 그대로 몸이 굳는다. 어느새 여자가 가슴팍에 대검을 꽂아 넣었으니까.
이야. 방금 그건 엄청나게 빨랐다. 어? 하니까 칼이 꼽혀있네.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는 남자. 그리고 금방 빛이 되어 사라진다.
그런 식으로 바로 다음 남자를 향해 가는 여자. 음. 1층은 무난하네. 그럼 2층은?
역시 비슷한 전개다. 노크. 그리고 의심 없이 방문을 열어주는 남자.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여자가 뭔가 스킬을 썼다. 그러더니 남자가 그대로 굳으며 쓰러진다.
근데…. 여자의 반응이 이상하다. 바로 남자에게 스킬을 쓰는 여자.
굳으며 쓰러졌던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공격했던 여자를 보며 뭐라고 소리 지르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런 남자를 향해 여자가 뭐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지? 설마…. 저 여자 광역 스킬 무효화를 쓴 건가?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매혹 걸린 여자가 무효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방금 저 남자를 기절시키면서 무효화를 쓴 거 같다.
남자는 기절시켰지만 자기가 쓴 무효화에 매혹이 풀린 거지.
그리고 제정신이 돌아오자 자기가 걸었던 기절을 무효화로 풀어준거고.
아. 씨발. 골때리네. 이런 일은 또 처음이야.
바로 블링크를 한 다음 페이즈 아웃을 쓰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아. 페이즈 아웃을 쓰면 1층에 있는 여자의 매혹이 풀린다.
근데 이대로 있으면 방금 그 여자가 어차피 1층 여자의 매혹을 풀어줄 거야.
잠시 고민. 하지만 시간이 없다. 아. 귀찮네. 게다가 이놈들은 순간이동이 있는 녀석들이잖아?
잠깐이라도 지체하면 다들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릴 거야.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피곤하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