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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이고르의 비밀기지는 마치 공격당한 벌집 같았다.
밖으로 뛰쳐나온 헬기들과 자동차들. 그리고 날아다니는 놈들. 기지 주변을 뒤지고는 있지만….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저놈들…. 과연 강한 놈들 맞을까? 분명 체계는 잡혀있다. 일사불란한 거 보면 분명 실력은 있어.
근데 하는 짓이 이해가 안 간다.
저렇게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헬기와 차로 나를 잡겠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들의 대응이 어설프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왜 저러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쟤들도 경험이 없는 거야. 높은 티어에 있는 적과 싸워보는 게 처음인 거다.
이렇게 스킬을 열 몇 개씩 얻은 사람이 나타난 건 고작 일 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
이 녀석들도 그렇고 모스크바의 루블료프카 거기도 마찬가지다. 아니,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인 거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거다. 그러니 옛날에 하던 대로 일단 튀어나온 거고,
좋아. 이해했어. 그렇다면 녀석들이 익숙해지기 전에 빨리 쳐 죽여야지.
나는 승미세안 네 여자를 바라보고 말했다.
"절대 땅바닥 근처로 내려가지 말고. 자신의 발밑에 스킬 사용 불가 지대가 깔리지 않게 하고. 그거 두 가지만 조심하면 돼. 알겠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런 그녀들에게 일단 파티를 초대했다.
그럼…. 이제 녀석들을 쳐 죽여야지?
"세아도 이제 탐지 있으니까 저기 저놈들 나오는 통로가 보일 거야. 그것들 매몰시켜버려."
"알았어. 어? 근데 땅바닥 내려가지 말라며? 땅바닥 안 내려가고 어떻게 저 통로를 부숴?"
"어…. 블링크로 빠르게 치고 빠져야지. 절대 다음에 어디로 갈지 눈치 못 채게 하고."
"어렵네."
"통로가 꽤 많으니 여기저기 다녀야 할 거야."
"알겠어. 일단 해볼게."
말해놓고 보니 역시 살짝 불안하긴 하다.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리고 승희랑 미나는…. 나랑 가자. 안나도."
산 위로 올라간 나와 세 여자.
어떻게 해도 광역 스킬 무효화에 안 맞는 높이까지 올라간 뒤 미나에게 말한다.
"우레 폭풍 써."
"알겠어요. 지금 바로요?"
"어."
"우레 폭풍!"
지이이이이이잉
그려지는 노란 선. 근데 범위가 좀 크다. 미나도 패시브를 잔뜩 배웠기에 엄청나게 커진 범위.
이야. 이정도면 눈치채도 1분 안에 도망가긴 쉽지 않겠는데? 어마어마한 크기야.
1분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예전에는 되게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뭐 이리 빠르냐.
이제 곧 첫 번째 벼락이 떨어지겠지? 그럼 저기 날아다니는 헬기는 다 뒤졌다고 보면 되겠네.
콰르르릉!
드디어 떨어진 첫 번째 벼락. 그리고 수많은 벼락이 그 뒤를 이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데…. 저 헬기는 왜 멀쩡하냐? 어이없네? 보니까 헬기 주변을 커다란 보호막이 두르고 있다.
이야…. 저게 되나? 저 큰 헬기를 보호막으로 둘렀다고? 저건 좀 멋지네. 발상의 전환이야.
사실 그렇다. 헬기는 상당히 강력한 장비긴 하지만 약점 또한 너무 훤히 드러나 있다.
아무리 효과가 좋으면 뭐해. 그냥 프로펠라 있는 데다가 막대기 하나만 던져도 끝인걸.
근데 저렇게 보호막을 두르고 있으면 단점을 상당히 보완할 수 있게 된다. 보호막 헬기라니. 신기하긴 하네.
물론…. 아무 의미 없지만.
쿠웅
어느새 헬기 밑에서 보호막을 후려친 세아.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서 깨지는 보호막 사이로 우레 폭풍의 벼락이 내려꽂힌다.
그걸로 저 헬기는 끝이다. 바로 같은 무게의 고철이 되는 거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 것 같다. 녀석들이 경험이 없다는 것.
물론 녀석들이 시원찮은 놈들이라는 건 아니다. 분명 전쟁이나 전투, 교전 방면에선 프로가 맞겠지.
하지만 고티어 소수정예를 상대해 본 적은 없는 게 확실하다.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상대 안 했을 거야.
어쨌든 나에겐 좋은 일이다. 깔끔하게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우리의 공격이 단순하게 높은 티어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현 스킬 상으론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공격.
4분간의 벼락은 황당하게도 산까지 무너뜨릴 정도였다.
하긴. 건물들도 다 박살 냈었는데. 산이라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뭘 안 해도 되겠는데?"
알아서 무너지고 있는 산. 그렇기에 세아는 굳이 통로를 박살 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보호막 쓰고 있는 녀석들의 보호막만 깨는 모습.
안나 역시 번개 주먹을 배웠기에 보호막으로 버티고 있는 놈들을 하나하나 잡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쉬운데? 이렇게 일방적일 줄은 몰랐네.
미나의 우레 폭풍이 끝났다. 이곳저곳이 무너져버린 산. 그로 인해 파묻혀버린 용병 놈들.
아직 기척은 있었다. 근데 나올 엄두는 못 내겠지. 나오는 순간 죽으니까. 보호막이 있다고 해도 세아와 안나가 전부 깨버리고.
"미나야."
"네?"
"또 써."
"우레 폭풍요?"
"어."
미나는 별말 없이 다시 우레 폭풍을 쓴다.
또다시 1분. 그리고 떨어지는 벼락.
페널티가 큰 스킬이지만 그만큼 위력도 엄청나다.
게다가 따로 뭔가를 안 해도 된다는 게 편했다. 그냥 써놓고 기다리면 되니까.
세 번째 우레 폭풍 때는 가볍게 잡담을 했다. 다섯 번째 쓸 때는 미나가 장난도 쳤다.
"이것 봐요."
스킬을 쓰는 동안엔 움직일 수 없으니 몸에 힘을 전부 빼고 느긋하게 있는 모습.
육면 게이트 안쪽에 있기에 미나의 저런 여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아무도 깰 수 없는 공간이니까.
"우리 발밑에 스킬 사용 불가 지대를 까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요?"
"어. 내가 생각할 땐 그래."
"그럼 밑에 누가 오나 계속 지켜봐야죠."
"이 밑에는 아무것도 없어. 다 계속 보고 있다고."
"스킬 몇 번 더 써요?"
"스무 번."
"네?"
"그냥 계속 써. 지루하겠지만 그냥 계속 쓰면 돼. 우레 폭풍만으로도 산이 무너지니까."
"뭐…. 저야 상관없지만."
"그럼 잠깐 나갔다 올게. 여기 있어."
"그래요."
육면 게이트의 하나를 닫고 밖으로 나간 다음 다시 게이트를 깔았다.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개사기란 말이지.
근데 제약 해제가 생기면 이 짓을 안 해도 된다는 거잖아? 아. 아직 확실하진 않지. 적용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어쨌든 우레 폭풍은 계속 이어진다. 4분간의 격렬한 공격과 1분의 휴식.
하지만 그 1분도 또 다른 4분을 위한 대기 시간이다. 안에 있는 놈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꼼짝없이 갇혀있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탈출을 생각해보지만, 나갈 수 있는 길은 다 막혔다.
게이트 있는 놈이 없었나? 고작 티어9의 게이트도 없이 저렇게 지들이 뭔가 있어보인 척 했던거야?
으휴. 븅신들.
우레 폭풍이 열 번 정도 이어졌을 때, 산 일부가 무너지면서 녀석들의 기지 일부가 드러났다.
오오. 그래? 그렇다면 나도 선물을 줘야지.
기지 안쪽으로 슬쩍 들어가 게이트를 열었다.
미나에게 여섯 개를 쓰고 있기에 다섯 개밖에 열진 못했지만, 바닷물 게이트 다섯 개만 해도 쏟아지는 바닷물의 양은 엄청나다.
과연 안에 있는 놈들은 어떻게 될까? 배수시설은 신경 썼겠지? 물론 그 정도 수준으로 감당이 될 양은 아니긴 하지만.
출구가 무너진 데다가 물이 빠져나간다고 해도 게이트 다섯 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닷물의 양이 엄청나기에 기지 안쪽은 금방 물바다가 됐다.
기지 밖으로 나가면 감전사. 기지 안에 있으면 익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녀석들.
마지막으로 남은 놈들이 한데 모여서 밖으로 나가려고 우르르 몰리며 탈출 시도를 했지만…. 녀석들은 실패했다.
무효화에 당하고 승희의 폭발을 맞은 녀석들. 그대로 빛이 되어버린다.
보호막을 써보지만 내 무효화에 번번이 풀리면서 녀석들은 터져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지 안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깔끔하게 정리된 곳.
분명 도망간 놈이 있겠지? 페이즈 아웃 같은 걸 쓴 놈이 있을 텐데.
기지 주변에 무효화를 계속 뿌려봤지만 튀어나오는 놈은 없다. 쯧. 귀찮네.
저런 놈들을 살려두면 안 되는데. 분명 나중에 저런 놈들이 복수한다고. 짜증 나게.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전부 해치웠다. 놓친 녀석들은 어쩔 수 없지. 여기 물이 조금 빠지면 다시 와서 지켜봐야지.
우레 폭풍 스무 번까지도 필요 없었네. 역시 좋다니까.
바로 미나에게 다가가 인제 그만 써도 된다고 말해준다.
한 2분쯤 지나고 우레 폭풍이 끝나자 나는 게이트를 닫아버리고 네 여자를 한데 모았다.
"끝났어. 이제 돌아가자."
"네."
대답하는 안나의 표정이…. 살짝 무섭다. 그래 이제 그럴 시간이네. 안나가 주최하는 피의 복수.
과연 이 여자는 이고르 녀석을 어떻게 괴롭히려나.
벙커로 돌아가 밖으로 나가자 아까와 크게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고르를 지켜보고 있는 들개들. 그중에서 유난히 각이 잡혀있는 들개 보스 렉스.
그리고 지린내를 풍기고 있는 이고르.
"아. 더러워 진짜."
아무리 세상을 험하게 살아온 놈이라도 지가 죽게 생겼으면 오줌을 지리기도 하는구나.
"렉스. 친구들을 데리고 전부 물러나 줄래요?"
안나의 말에 렉스가 컹하고 짖었다.
금세 개들은 렉스를 따라 뒤로 물러났다. 마당에 덩그러니 남은 이고르.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와 네 여자.
"어떻게 하면 이놈을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요…."
조용히 중얼거리는 안나. 그 목소리에서 섬찟한 느낌이 든다.
이고르에게 다가가더니 그 옆에 살짝 쭈그려 앉는 안나.
"바람 칼날."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람 칼날이 이고르의 몸을 덮었다.
자르지는 않았다. 거의 포를 뜨다시피 피부만 살짝 벗기는 기술.
"바람 칼날."
그리고 그건 한번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스킬.
바람 칼날이 훑고 간 이고르의 몸은 피부가 썰려 나가며 빨갛게 피가 몽글거린다.
그렇게 몇 번의 스킬을 썼는지 모르겠다.
온몸에 낭자한 피. 이미 옷들은 전부 다 찢어져 넝마와 다름없다.
이고르의 몸은 무슨 폴리곤 덩어리 같아졌다. 피부가 직각으로 썰려있는 모습은 역시 말이 안 된다.
그걸 계속해서 하는 안나.
입을 틀어막힌 이고르는 이제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한 듯 조용히 있다.
그런 이고르에게 주먹질을 하는 안나.
"번개 주먹."
"음으으으므므음!"
죽을 만큼은 아니게 감전당한 이고르가 깨어나 비명을 지른다.
그런 이고르에게 다시 바람 칼날을 쓰는 안나.
느긋하게 포션도 하나 사 마시는 모습. 확실히 무섭네. 무서워. 그래도 본인이 당한 아픔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직 모자라지.
"오래 걸릴 거 같아?"
"네. 쉽게 죽이고 싶진 않아요."
"으음. 그래? 알겠어. 우리가 계속 볼 필요는 없지?"
"네. 보고 있으면 더 잔인한 걸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 그래. 그럼 우린 들어갈게."
빙긋 웃는 안나를 두고 나와 세 여자는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저것보다 더 잔인한 걸 한다고? 사람을 포를 뜨고 있는데? 상상이 안 가네. 그냥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안나가 들어온 건 세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녀석은 죽었는지 피 냄새 같은 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저 산뜻한 표정의 안나만 있을 뿐.
이미 늦은 시간이기에 다들 자러 갔고, 나만 남아있어서 그런지 안나는 바로 내 옆에 앉더니 대놓고 몸을 기댄다.
"고마워요."
"괜찮겠어? 속은 시원해졌어?"
"당연하죠. 그동안 얼마나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는데요. 모두 비워냈어요. 개운하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당신을 만난 건 역시 축복 같은 일이었어요."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는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팔. 분명 복수는 했지만, 아직 몸은 진정 안 된 거겠지.
그런 그녀의 손을 같이 잡아준다. 안나의 손보다 내 손이 더 따듯해서 그런가? 내가 손을 잡아주자 떨림이 조금 줄어든다.
"좀 쉬어. 좋은 날이니까."
"그래요. 그래야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쓰러뜨리고 한껏 야한 짓 하고 싶은데…."
"아? 그래? 그것도 좋긴 하지."
"나중에 해요. 지금은 조금 힘드네요."
"그래. 나야 언제나 니 옆에 있으니까."
그런 안나가 나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환하게 웃는 안나.
저 미소. 그래. 저 미소가 좋은 거야. 앞으로는 저 미소를 잃을 일은 없겠지.
"그만 잘게요."
"응. 잘자."
그렇게 안나가 들어갔다. 그리고 안나의 복수도 끝났다.
하. 힘들었네. 길고 길었어.
그래도 잘 끝나서 다행이야. 이정도면 성공적인 복수였으니까.